묵상자료

건강한 믿음이 위대한 이유. / 히 11:1-12.

박성완 2024. 1. 29. 00:00

묵상자료 8292(2024. 1. 29. 월요일).

시편 시 42:4-5.

찬송 34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윤동주라는 시인의 이름은 우리 국민들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시인이기 이전에 그는 동네 어귀에서 금세라도 마주칠 수 있을 것 같은 수줍은 청년이었습니다. 습작 노트에 마치 일기를 써내려가듯, 청년 윤동주는 날짜를 적고, 그 날의 일들을 시로 적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당시 정지용의 글을 특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정지용의 글처럼, 당시 우리말이 갖고 잇던 소박하면서도 담백한 서정을 가장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61년 전 오늘 그러니까 1948130일은, 바로 그의 유일한 시집이자 유고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된 날이었습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곡 전체의 길이가 140초 정도인 무척 짧은 곡입니다. 이 작품 <새로운 길>은 작곡가 이영조의 연가곡 윤동주 시에 의한 네 노래 가운데 하나입니다. <새로운 길> 외에 <서시>, <무서운 시간>, <별 헤는 밤>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연가곡이라는 형태가 무척 드물지요. 연가곡 보다는 하나의 글이나 음악에 집중하는 형태가 우리 가곡에서는 더 일반 적입니다. 작곡가는 우리 가곡 역시도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처럼, 글과 곡이 하나의 작품으로 유기적인 구성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했다고 전합니다. 하나의 글과 곡에 집중하는 것도 특색이 있겠습니다만, 시인을 대표하는 글들이 하나의 작품으로 보다 두터운 의미를 지니기를 바랐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1985년 바리톤 황병덕의 정년퇴임 기념 음악회를 통해서, 작곡가 이 영조는 윤동주의 시 네 편을 연가곡으로 완성을 했습니다. 윤동주 시 이 영조 곡 <새로운 길>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130일 방송>

 

2. 오늘 묵상자료가 지난 13일의 본문과 겹쳐서 부득이하게 오늘의 다른 본문인 사도 서간문 히 11:1-12을 택했습니다. 연속성을 바라시는 분들이라면 13일자로 되돌아가시면 되겠습니다. “믿음(1-12)”을 읽었습니다. 저는 주일학교 시절에 히 11장을 믿음장이라고 배웠습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궁금해 한다면 히 11장을 읽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예전의 교회학교 교육은 거의 대부분 선생님들에 의해서 다른 교육보조 재료 하나 없이 성경책 한 권만 들고서 가르치는 문답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엄청나게 좋은 시청각 교보재를 가지고 흥미진진하게 가르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육환경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교회교육이 세속적인 발전에 발맞추려는 강박관념 때문인지 교사들의 지도력이 턱없이 열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각설하고 히브리서 기자가 강조해 마지않는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그 명쾌한 답이 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개역 성경으로 길들여진 분들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풀어쓴 믿음의 정의입니다. “믿음은 희망하는 것들을 미리 볼 수 있는 실제 모습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막연하고 희미한 것들을 확신할 수 있게 해 주는 증거물이라.” 고 말입니다. 그래서 가령 저는 시험공부를 할 때, 제가 희망하는 대학생의 교복을 입고 고향 마을에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나타나는 모습을 떠올려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신 바람나는 일이었고, 시들지 않는 용기와 기쁨을 안겨주는 꿀단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시간과 더불어 점점 더 구체적으로 무르익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중학생 때의 국어 선생님이셨던 이동률 선생님이나, 고등학생 시절의 전 영창 교장 선생님의 실제 모습이 저의 믿음의 미래상으로 각인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두 분은 항상 설레는 마음으로 어린 저희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단순하게 지식을 전달하는 분들이 아니라, 사랑과 소망을 담고 저희를 바라보셨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에 찌들고 앞날이 캄캄하다고 절망하는 저희들에게, 너희는 할 수 있다고, 해낼 수 있다고 하시며 일본 삿보로 농학교의 교수 윌리엄 클라크의 “Boys be ambitious!”를 말씀하셨고, 흑인 노예 소년 부커 T. 워싱턴의 삶을 얘기하실 때는 온 강당을 울음바다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앞이 캄캄한 가난한 농촌 학생들에게 서광이 비치는 내일을 바라보게 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절망을 누르는 희망이었고, 믿음은 불안한 세상을 당당하게 걸어갈 용기를 주었습니다. 믿음은 공허로 가득 찬 가슴에 기쁨과 의욕으로 충만케 하였습니다.

 

3. 묵상식구이신 미국의 엥글러 목사님은 손자의 세례식 사진을 보내오셨고, 상해의 고형식 집사님은 막내따님이 영국 유학중인 소식을 전해 오셨습니다. 주안에서 강건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