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 위하여 이해하라/ inellege ut credas. / 요 6:60-71.
묵상자료 8295호(2024. 2. 1. 목요일).
시편 시 43:1-3.
찬송 40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연탄을 주 연료로 사용하던 때가 있었지요. 연탄아궁이의 온기가 미치는 곳은 아랫목, 그리고 좀 멀찍이 떨어진 곳은 윗목이라고 불렀습니다. 겨울밤이면 아랫목에 묵직이 깔아둔 솜이불 아래, 추워서 웅크린 가족들의 발이 가지런히 들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불 안에 넣고 있으면 발은 따뜻했습니다만, 위의 공기가 차가 워서 코가 시리기도 했지요. 화로위에 위에 올려둔 흰 떡이 구수하게 구워지는 냄새를 맡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그 밤은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행복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랫목의 추억만큼 따뜻한 온기가 유난히 그리워집니다.
어릴 적 외출해서 돌아오면 호들갑스럽게 아랫목의 이불속으로 뛰어들곤 했습니다. 그 시절 아랫목 이불에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이 참 많이 있었지요. 어머니께 혼나지 않으려면 발을 뻗으면서도 각별히 조심해야만 했습니다. 찬찬히 살피지 않고 불쑥 발을 넣었다가는, 막 지어서 옮겨 담은 따끈한 밥주발이나, 발을 식히던 식재료들을 둘러엎기 일쑤였지요. 그 아랫목엔 꽁꽁 언 몸으로 돌아올 아이들을 위해서 어머니가 넣어둔 내복도 있었습니다. 고양이처럼 얼굴에 겨우 물만 바르고 옷을 갈아입으면, 따끈한 옷의 온기는 온몸으로 퍼져나가곤 했지요. 무척이나 불편했던 기억입니다만, 그 시절 추억엔 남다른 빛깔이 어려 있습니다. 아랫목에서 전해지던 온기는 모두가 힘들었던 시기를 웃으며 견뎌내게 했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러한 힘의 원천이 무척이나 절실한 요즘이지요.
예전에 방 하나에 온 식구들이 모여 사는 세대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 어려웠던 살림살이를 단칸방 살림이라 부르기도 했지요 좁은 방 하나에 세간을 넣고 모두 누우면, 겨우 발을 뻗을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이었습니다. 지금의 아이들이 이이야기를 듣는다면, 오히려 글쎄요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 때는 방 하나를 가지는 것도 숙원사업이라 부를 만큼 신나는 일이었지요. 오히려 지금보다 그 때처럼 가까이 살을 맞대고 부대끼는 일이, 더 가족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도 됩니다. 각자의 생활이나 의견을 존중하는 만큼 가족으로써의 공통된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 기분이지요. 함께일 때는 지겹다 느낄 수 도 있겠습니다만, 지나고 보면 가족과 함께 의외로 우리 생에서 그리 길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좋을걸 그랬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년 2월 1일 방송>
2. “믿지 않는 제자들(60-65절)”과 “베드로의 신앙고백(66-71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표제어는 “믿지 않는 제자들”이라고 붙여 놨지만, 사실은 “귀에 거슬리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의 귀에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들을 수 없다고 불평했지만, 그 곁에서 그들의 소리를 들으신 주님은 “내 말이 귀에 거슬리느냐?”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마음에 들지 않는 말에 대해서는 호기심을 발동해서 알아보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불평과 불만으로 대꾸한다는 말입니다. 안면을 튼 오랜 지인들이야 면전에서 조금 거슬리는 말이 있어도 잠자코 들어 넘기곤 하지만, 낯선 사람 앞에서는 대놓고 불평을 토로하기 일쑤입니다. 제가 몇 차례 공립인 상봉중학교 기독학생회에서 특강을 하였는데, 참석자들이 교회 학생들임에도 불구하고 신앙적인 얘기를 듣기 싫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보였습니다. 딴지를 부리고 잡담을 하고 책상에서 연필을 떨어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철부지이기 때문이라고 일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작은 강의료를 지불하지 않은 강습회에 와서도 딴지를 부리는 목사들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교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신학적인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의 입장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그러는 것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를 구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송두리째 내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형 교회 담임이라는 분은 달랐습니다. 한 순간이라도 놓치지 않을 량으로 열심히 받아쓰고 있었습니다.
믿음에 관한 논쟁은 어느 종교나 치열할 것입니다. 이성의 영역에서 믿음의 영역으로 올라서는 것은 엄청난 도약이 필요한 때문입니다. 믿고 싶다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닌 때문도 있거나와,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우리를 이성에서 믿음에로 이끄는 힘이 필요한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주후 4세기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 때에는 절정에 이르렀던 것 같습니다. 이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라. 이해하기 위하여 믿어라/ inellege ut credas, crede ut intellegas.”라는 그의 말처럼 인간의 이성이 신앙의 한 수단이 되어야만 한다는 견해를 신봉했습니다. 이런 그의 주장에는 이성은 인간의 사고영역 안에서 제한되며, 신앙은 신의 영역 안으로 고양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토록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항변하는 하나님의 섭리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려고 할 때 보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우리는 이성을 초월할 수 없음을 겸손히 고백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끌림이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