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형제들의 대화 속에 담겨 있는 서글픔. / 요 7:1-13.
묵상자료 8296호(2024. 2. 2. 금요일).
시편 시 43:4-5.
찬송 42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봄인가 싶을 정도로 포근한 날씨가 며칠 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집 밖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외출하기를 참 잘했다 하는 생각이 들만큼 날씨가 적당히 포근하고 온화합니다. 그동안 날씨나 경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참 많은 것들이 건네는 냉기 때문에, 마음속까지 얼얼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아무튼 이만큼 이었어도 좋겠습니다. 이렇게 한번쯤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조금은 혹독한 시간들이 계속된다고 해도 기운 잃지 않고 견뎌나갈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녹녹하지 않은 삶의 한 시기를 견뎌나가는 나름의 방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산이나 바다처럼 탁 트인 공간에서 맑은 공기를 호흡하는 것으로 새로운 마음을 다지기도 하고요, 또 누군가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기도 합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분들의 경우, 그러한 탈출구는 주로 음악일 때가 많이 있지요. 작곡가 장일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국 전쟁 즈음 그는 가족을 모두 북에 두고 단신으로 월남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많은 시간들을 가득 채워지지 않는 그릇을 바라보는 듯, 묘한 상실감과 결핍에 시달려야만 했지요.
“아득한 꿈길을 더듬으면서 그리운 옛날을 찾아가보니, 님 무덤 앞에는 이름 모를 꽃 한 송이 곱기도 합니다.”
초기의 우리 각곡들은 꿈에 피었던 꽃처럼 노랫말이나 멜로디가 주로 애상적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서 한국 전쟁으로 이어지는 시대적인 배경도 큰 영향을 끼쳤겠지요. 이 곡은 작곡가 장일남이 채 스물도 되기 전인 18에 완성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방과 한국 전쟁사이, 많은 사람들이 이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한참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였습니다. 채 다섯줄이 넘지 않은 짧은 시에 붙인 곡입니다만, 곡이 담고 있는 이미지는 허망하고 쓸쓸합니다. 작곡가 장일남의 대표곡인 <기다리는 마음>이나 <비목>과는 또 다른 여린 감수성을 읽을 수 있는 작품이지요. 주 요한 시 장 일남 곡 <꿈에 피었던 꽃>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년 2월 2일 방송>
2. “믿지 않는 예수의 형제들(1-9절)”과 “초막절 명절에 올라가신 예수(10-13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본문에는 흔치 않는 예수님의 가족사가 나와서 흥미를 끌게 합니다. 그런데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알콩달콩하거나 훈훈하고 정다운 얘기가 아니라서 긴장하게 합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에서 예수님의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대해서는 매우 빈약한 정보만을 제공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어느 신학대학 교수님의 말씀처럼, 성경은 우리가 구원받기에 필요한 말씀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엉터리 자료와 정보들이 범람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가령 외경과 위경에서 전하고 있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한 두 차례 궁금해 할 분들을 위해서 소개드렸던 예수님과 가룟 유다 사이의 관계를 위경에서 찾으려 했던 흥미로운 연애사를 말씀드린 일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런 와중에 예수님의 가족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 초기에 해당되는 어느 해 초막절이 다가왔을 때, 예수님의 형제들이 빈정대는 말투로, 이곳을 떠나서 유다로 올라가 당신이 행하는 훌륭한 일들을 제자들과 널리 알리시라고 합니다. 훌륭한 일을 하는데 숨어서 할 게 아니라 널리 세상에 드러내라고 합니다. 이런 말투를 빈정대는 것으로 해석하는 이유는, “예수의 형제들조차 그분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는 5절 말씀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지 않음이란 서로 신뢰하지 않았다는 말이며 정답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제가 9남매 중 셋째라는 말씀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1년에 2번의 가족 행사에 형제자매들이 다 모이는데, 유독 말투가 빈정거리는 사람이 있는데, 저의 형제자매가 아니라 매제와 제수씨 중의 두 분이 그렇습니다. 왠지 모르게 불만이 있는 분들입니다. 고치고 싶지만 그게 하루 이틀에 생긴 것이 아닐 테니 그냥 대수롭지 않게 속내를 감추려고 합니다만 늘 불편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경우는 저와는 아주 달랐습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6-9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너희에게는 아무 때나 상관없지만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세상이 너희는 미워할 수 없지만 나는 미워하고 있다. 세상이 하는 짓이 너무 악해서 내가 그것을 들추어내기 때문이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형제자매들이 가졌던 시기나 질투심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상대인 세상과 갈등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인기에 영합해서 출세가도를 달리려는 그런 우쭐대는 행태가 아니었습니다. 뿌리 깊고 널리 퍼져있는 세상 죄와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같은 형제지간이면서도 달라도 너무 다른 마음을 보고 있는 아픔입니다. 서로 딴 세상을 살고 있었다는 서글픔 말입니다. 30년이란 긴 세월을 함께 살았으면서도 서로를 감싸주지 못하는 비정함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