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이카루스의 비극을 기억할 것. / 요 7:14-36.

박성완 2024. 2. 3. 00:00

묵상자료 8297(2024. 2. 3. 토요일).

시편 시 44:1-3.

찬송 41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 안에는 다양한 감정들이 늘 혼재하고 있습니다. 이 감정들을 어느 선까지 통제하고 도 어느 선까지 표출해 낼 것인가 하는 일은, 한 사람의 마음 됨됨이나 성숙도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동양의 사상가들은 분노를 조절하는 방식이 진정 그 사람의 인격이라 말하기도 했지요. 무조건적인 감정의 억압이나 방출은 가장 위험하고 저급하다 평가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가장 옳은 감정의 표출은, 감정을 표현하되 거칠지 않게 상대를 이해하고 설득하는 것이었습니다.

    “복받치는 그리움에 눈을 감았노라/ 불타오르는 정열에도 눈을 감았노라/ 펄펄 끓는 저 용광로가 이내 심정만 하오리까/ 활활 타는 저 불 화산이 이 내 심정만 하오리까/ 애끓는 이 울분을 담겨진 채 한숨짓네/ 아 그대여 이내 마음 정녕 알고 계시는가?”

    작곡가 김 연준은 다작을 한 작곡가였습니다. 비교적 부유하고 유복한 생을 누렸습니다만, 그도 순탄한 삶을 살아왔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로 잃을 것 또한 많다는 사실을, 생의 몇 번의 굴곡을 통해서 그는 깨달았지요. 많은 분들이 아끼고 좋아하는 <청산에 살리라> 라가 만들어진 계기도 바로 그 깨달음 때문이었습니다. 이곳 울분을 비롯한 <비가> <폐원> 같은 곡들은 작곡가 김연준이 어느 순간 깨달은 생의 진리나 관점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누구나 겪게 되는 고난의 과정입니다만, 어둠속에 머물러 있지 않고 암흑에서 벗어나 빛과 당당히 맞선 사람만의 관조가, 작곡가 김연준의 작품에선 느껴집니다. 김 병수 시 김 연준 곡 <울분>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23일 방송>

 

2. “초막절 명절에 올라가신 예수(10-24)”, “이분이 그리스도인가?(25-31)” 그리고 보내신 분에게 돌아가리라(32-36)”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어느 시대건 그 시대의 특징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대화의 주제를 찾아보거나, 아니면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외치는 주제를 찾아보면 알 수 있습니다. 1세기 유대 사회는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던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독립투쟁을 하려는 주제보다는 메시야의 출현을 기대하는 시대정신이 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강한 스피치를 가졌다든지, 기행을 한다든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졌다든지 하면, 이 사람이 그리스도(메시아)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곤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일반 대중들은 그런 질문을 많이 하였고, 백성의 지도자라는 사람인 니고데모라는 사람도 예수를 찾아와 그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렇듯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메시야가 오시기만 한다면,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종교적인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마치 그 옛날 다윗 왕조 시대처럼 말입니다. 유대인의 3대 명절의 하나인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군중들은 이런 이야기에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소위 메시야 논쟁을 들여다보면, 화제의 주인공이던 예수는 논외의 인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어울리지 않는 출신 배경 때문이었습니다. 그중 가장 큰 결격 사유는 메시야는 어디서 오실 것인지 몰라야 하는데, 자신들은 예수의 출신 배경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사렛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점과 혼전 임신으로 얻은 아들이라는 것까지 말입니다. 도무지 메시아로써 자격이나 품격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말을 엿듣기라고 한 듯, 성전에서 가르치시던 예수님은 큰 소리로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해명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논점을 피하려 하지 않고 정공법을 택하십니다. 그것은 그들이 알고 있다는 점을 시인하신 후, 놀랍게도 당신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당신 자신의 의지나 뜻으로가 아니라, 순전히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그분을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무리들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잡으려 했으나,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요한복음서 기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 혹은 섭리를 알아낼 수 있는 듯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를 추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원소의 주기율표를 참고할 수도 있고, 역사의 흥망성쇠를 대입해 보려고도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곧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하나님의 생각은 언제나 우리들 인간의 생각보다 높으시니 말입니다(55:6-11).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