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율법의 제정정신과 목적에 대한 끝장토론이 아쉽다. / 요 8:21-30.

박성완 2024. 2. 8. 00:00

묵상자료 8302(2024. 2. 8. 목요일).

시편 시 44:15-17.

찬송 24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입춘이나 대보름을 하루 앞두고, 적선 공덕 행을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적선, 선을 베풀고, 공 덕행 어진 마음을 갖는다는 말 그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기 위해, 그날만이라도 일부러 노력했다고 합니다. 냇물에 징검다리를 놓는다던가, 걸인의 움막 앞에 따뜻한 밥 한 솥을 지어다 준다던지, 대 보름을 하루 앞둔 오늘 같은 날 남몰래 선을 베풀려는 사람들의 숨죽인 발소리가, 밤늦은 시간까지 끊이질 않았다고 하지요. 누군가를 도우려는 마음이 깃들어 있는 밤, 대보름 전날마냥 어둠과 적막으로 가득했던 밤이, 조금은 더 밝고 따뜻하게 느껴졌을 것 같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정월 대보름쯤에 즐겼던 음식가운데 원소병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달 모양처럼 둥글고 작은 떡을 빚어서, 수정과나 오미자차 같은 음료위에 띄워먹는 것이 바로 원소병인데요. 작은 그릇 안 음료 위에 띄운 찹쌀 경단의 모습은 아마 보름쯤 볼 수 있었던 밤하늘의 모습과 닮아있었겠다 짐작하게 됩니다. 밤하늘에 보름달을 보면서 음료 안에 작은 달을 먹는 일, 이런 풍습 하나에도 우리 조상들은 참 운치가 있었구나, 감탄하게 됩니다. 삶을 즐긴다는 것은 역시 말만큼 거창한 일은 아닌 듯 하지요.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매 순간을 올곧게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선조들의 풍습을 답습하다보면, 그네들은 어떠한 마음으로 살았을까? 짐작해 보게 됩니다. 더불어 후손들은 훗날 우리의 생활 속에서 어떠한 것을 읽어낼까? 조금은 두렵기도 하고요. 우리 선조들의 풍습은 계절을 즐기고 좋은 날을 맞아 나누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문화나 풍습은 내 것을 지키고 상대에게 또 하나를 얻기 위한 대가가 전제된 베풂이지 않나하는 반성도 하게 됩니다. 더 많이 움켜쥐려고 세게 주먹을 쥘 때보다, 손을 폈을 때 손 안에는 더 많은 모래가 남아 있음을 기억하게 되지요. 선조들의 전통과 풍습을 통해서, 지금 우리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도 아마 그와 비슷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28일 방송>

 

2. “내가 바로 그리스도이다(21-30)”을 읽었습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나름 자신의 의사를 주변에 알리며 산다고 합니다. 조류 학자들은 새들은 자기 무리들에게 위험이나 먹잇감의 정보를 서로 교환하기도 한다 말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조심스럽게 다가서는데도 그렇게 모두가 화들짝 놀라 도망갈 수는 없다고 합니다. 심지어 식물들도 호 불호를 표현한다고 하는데, 조용한 클래식 음악을 온 종일 들려주며 키운 농작물들은 매우 건강하게 자란다는 게 그런 증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 나누는 대화는 잘못된 정보나 선입견 등을 제외하고는 차분히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그 중심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생각하고 싶은 데로, 혹은 듣고 싶은 말만 기억하는 잘못된 습성 때문에 오해나 곡해의 늪에 빠져버리곤 합니다. 오늘 주님은 당신 자신을 위에서 왔으며 나는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여기에서 힌트를 얻은 것인지 되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라고 말입니다. 참된 대화의 시작은 서로가 상대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전제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나이와 성씨와 부모와 그리고 살아온 경력이나 여타 등등의 배경을 알려고 시시콜콜 호구조사를 하는 까닭이 예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서로의 마음속에 깊이 들어 앉아 있는 내밀한 속내를 나눌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알아내고 싶은 모든 정보는 이미 밝혔다 말씀하십니다.

    요즘은 해석이 필요한(다툼의 소지가 있는) 자료는 법정에서 말 잘하는 쪽이 이기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말 잘하는 쪽은 수임료를 많이 받는 그룹에서 인재를 확보했다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항복 선언을 받아 내거나 진퇴양난의 자료를 찾는데 주력합니다. 그런데 형식논리가 아닌 법의 제정 정신을 살핀다면, 논점을 억지로 꿰맞추어 이기려는 사람들이 있는 듯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느낌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저만의 생각이 아닐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확증을 얻고 싶어 하는 그리스도 여부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처음부터 내가 누구라고 말하지 않았느냐?”는 말씀 속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주님에 대해서 궁금해 하고 면전에서 질문을 했을 때, 피하지 않고 대답하셨던 말씀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소위 안식일 논쟁이었습니다(2:23-28, 3:1-9). 바리새파 사람들이 가장 강조하는 안식일 규정을 문자적으로 지키려는 항의성 질문에,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러나 논쟁자들은 이 대목에서 끝장 토론을 피하고 어물쩡 넘겨버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논쟁자들이 율법 준수를 꺼내들곤 하였지만, 사실은 제대로 된 논쟁, 율법의 제정정신과 목적에 대해서 끝장토론 같은 내용이 없다는 아쉬움입니다. 실제로 니고데모와의 토론에서는 그런 암시를 예상할 수 있지만 생략된 것 같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