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치 정도는 성숙할 기회로. / 요 9:1-12.
묵상자료 8306호(2024. 2. 12. 월요일).
시편 시 45:1-3.
찬송 346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가곡이라는 장르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서양 음악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점쯤을 그 시작이라고 본다고 해도 고작해야 100년 남짓 정도이지요. 그나마 우리의 현대사 속에서 고난기라 일컫는 일제 강점기나 한국 전쟁, 그리고 80년대 즈음까지가 우리 가곡에게는 전성기였습니다. 계층의 구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가곡을 듣고 부르기를 즐기곤 했지요. 홍 난파를 비롯해 현 제명 김 동진 같은 작곡가들이 주옥같은 작품들을 써냈던 것도 그 즈음이었습니다. 이후 많은 작곡가들이 가곡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몇몇 작품을 제외하곤 그리 큰 인기를 얻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작곡가 임 준희가 있습니다.
“가시리 가시리 있고, 버리고 가시리 있고, 날러 는 어찌 살라하고 가시리 있고”
작곡가 임 준희는 가곡 <종과 바람에 실은 가락>으로 1980년대 초반 여러 가곡 경연대회에서 입상하며 이름을 알려왔습니다. 우리에게는 <무지개>라는 곡으로 친숙한 작곡가입니다. “화가가 그림으로 작가가 글로 대중에게 다가가듯이, 작곡가는 음악으로 대중과 호흡할 수 있어야 한다.” 작곡가는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하나의 작품을 창작할 때도 과거 안에서 현재와 미래를 그리고 담아낼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고려 가요 <가시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낸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지요. 국악과 양악의 어울림이 독특한 매력을 주는 곡입니다. 임 준희 곡 <가시리>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년 2월 11일 방송>
2.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을 고치신 예수(1-12절)”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생트집(13-17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가끔 저는 장애인들 중에서 가장 불쌍한 이들로 시각장애인을 꼽곤 합니다. 특히 청각 장애인 교회에서 설교하는 목사로 그들에게 위로의 말 중에도 시각장애인을 꼽곤 했습니다. 시각 장애인들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말하는데, 그것은 앞이 캄캄한 세상을 살아가는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인간으로써의 자존감이라 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외적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는 점도 꼽을 수 있습니다. 대학을 나오고 심지어 대학 교수가 된 분임에도 불구하고 그 행색이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고 더럽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이런 배려와 긍휼이 가장 필요한 이들을 향해서 그들이 보통 사람으로써는 꿈도 꿀 수 없을 정도의 천형/天刑인 장애의 원인이 뉘게 있는가를 따지고 묻는 장면에서는, 우리 인간의 잔인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주님께 던졌던 것입니다. 첫째 그들은 장애를 죄라고 규정하고 있는 점입니다. 모든 문제는 죄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데 말입니다. 둘째는 그 장애를 자신과 부모의 것으로 못을 박고 있는 점입니다. 이는 매우 섣부른 심판행위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장애가 반드시 죄라고 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함이라 하셨고, 장애는 그 자신도 부모의 죄도 아니라고 분명히 대답하고 계신 점입니다. 그리고 땅에 침을 뱉어 흙을 이겨 그것으로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 시각장애인은 건강한 눈을 뜨고 돌아온 것입니다.
실로암 못은 두 번 방문을 했는데, 첫 번째 방문에서는 그 물을 마시면 마음 속 더러움까지 씻어버릴까 하는 마음으로 손 보자기를 만들어 두어 번 마셨는데, 조금 후에 기혼샘에서 실로암에 이르는 통로를 견학하던 관광객의 발을 씻은 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시각 장애인이 맞냐 틀리냐로 서로들 새 언쟁에 빠졌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그것은 그동안 우리들이 남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지 말라는 말, 담하용이/談何容易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것도 시련과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써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깊고 오묘하신 뜻이 있음을 생각하고, 음미하거나 묵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그러면 한 치 정도는 성숙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3. 가끔 저의 블러그의 댓글로 “글 솜씨 장난이 아니시네요.” 라는 글귀가 올라옵니다. “저는 장난치는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딱 한 번 답글을 달았는데, 나이 탓인지 힘들인 수고가 가벼운 한 마디 말로 허망하게 무너지는 것 같아 속이 상했습니다. 궁금하던 제자의 전화번호를 알 수 있을까 해서 물었더니 “꼭 알고 싶습니까?”라고 되돌아 온 말이 떠올라 서글픔이 가슴을 후벼팝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