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왜 이렇게 과격하실까? / 마 10:34-42.

박성완 2024. 5. 25. 00:00

묵상자료 8409(2024. 5. 25. 토요일).

시편 시 68:7-10.

찬송 53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교회 창립기념 주일에 축사를 하러 갔다. 그런데 담임 목사라는 분이 울고 웃고 신소리를 늘어놓는데 부아가 났다. 그래서 축사는 접어 치우고, 쓴 소리를 했다. 교회당은 성전이라고, 십자가가 전면에 걸려 있고, 촛대에 불이 밝혀져 있고, 설교와 기도와 찬송이 드려지고 있는데, 이게 무슨 극장의 쇼냐고 말이다. 그러지 말라고 축사를 한 것이다. 그 뒤로 그 교회가 초청하는 일체의 부탁에 거절해 왔다. 조선 정조 시대의 학자이자 시인인 이 덕무(1741-1793)의 시 한 수를 소개하려고 한다.

    “종일토록 망령/妄靈된 말을 하지 말고/ 종신토록 망령된 생각을 하지 말자/ 남들은 대장부라고 안 해도 나는 그를 대장부라고 하리라/ 마음에 조바심과 망령됨을 갖지 말자/ 오래 지나면 꽃이 피리라/ 입에 비루/鄙陋하고 속된 것을 올리지 말자/ 오래 지나면 향기가 피어나리라.

    그는 실천의 대가/代價를 벼슬이나 이익, 도덕적 향상에 두지 않았다. 마음에 꽃이 피고 입에 향기가 난다고 했다. 삶의 꽃과 향기를 위한 목표이기에 아름답다.” 개인적 정신의 수양/修養 과정도 이렇듯 절제 있거든,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랴! 새삼 예배하는 우리들의 자세가 생각이 났다.         안대회, 고전산문 산책, pp.167-168. 박성완, 24. 5. 24.

 

2. “칼을 주러 왔다(34-39)”맞아들이는 사람이 받을 상(40-42)”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정치가 국민의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제가 다니는 병원의 전공의들도 파업(?) 중이라 저의 치료 일정이 세 번째 변경(연기)되어 많이 불편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전도에 파송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들과 아버지가,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까닭을 아들이나 딸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하십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고 하십니다.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예수님께서 잠시 이성을 잃으셨거나, 딴 생각을 하신 것 아니냐고 질문하시겠습니까? 너무 엉뚱한 말씀이셔서 말입니다. 칼이 아니라 평화를 주시러 오셔야 했고, 불화중인 가족들 간의 멀어진 사이를 화해와 사랑으로 가까워지도록 하시려 왔다 말씀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아니면 무슨 반어법적인 말씀입니까? 그도 아니면 뭡니까?

    사실은 이런 표현법을 문학에서는 충격요법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역설적인 강조법일 수 있는지도 요.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신앙생활이란 아니 종교생활이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는 두루뭉술한 애매한 태도로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어떤 경우에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거나, 날카롭게 비판을 하거나, 잘못을 눈감아 주고 슬쩍 넘어가려는 그런 삶의 태도 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좋은 사람 이미지를 유지하려 하고, 모나거나 쓴 소리를 하지 않음으로 뼈 없는 무난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싶어 하는 그런 무사안일주의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생각은 확연히 달랐습니다. 세상의 방향성이나 세상이 지키려는 질서 체계에 대해서 분명히 반기/反旗를 들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저의 집은 반골기질/反骨氣質이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 영향을 받은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5식구 중에 딱 한 사람(아내)만 빼고 모두 비판적인 성향입니다. 선거철만 아니면 언제나 조용한 편인데, 선거철이 되면 보수 방송만을 시청하는 아내 때문에 속이 상하지만 만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나오면 함께 평가하는 기회를 가집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보수적이라는 것은 제 생각으론 낯선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님은 항상 새로운 삶과 방법을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이미 죽어 있는 상태인지 모르겠습니다. 시대사조에 대해서, 세상의 풍조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