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성령과 악령 사이에서 흔들리지 말기를. / 마 12:22-32.

박성완 2024. 6. 3. 00:00

묵상자료 8418(2024. 6. 3. 월요일).

시편 시 68:14-16.

찬송 17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오덕 선생님은 글쓰기를 지도할 때, 쓰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그것은 남의 글을 흉내 내지 말고, 쓰고 싶은 것을 써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작정 글을 쓰라고 하면 당황할 수도 있고, 엄두도 못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좋은 글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팁을 준다. “나도 이런 것쯤을 쓸 수 있어.” 라든지, “나도 내가 한 것을 한번 써 보고 싶구나.”는 생각이 들도록 하면, 글쓰기 지도는 반 이상 성공한 것이라고 한다.

    좋은 시와 좋지 못한 시를 소개한다. <시골 아침> “어머니는 아궁이에 새벽을 태우고 있다. 솥 안엔 아침이 끓는 소리, 그제야 잠꾸러기 앞산은 하얀 안갯빛 커어튼을 말아 올리고. 울 아래엔 짹 짹 짹 아침을 쪼아 먹는 참새들, 나는 산새 울음을 신나게 쓸어 모으고 있다.” <딱지 따먹기> “딱지 따 먹기할 때, 딴 아이가 내 것을 치려고 할 때, 가슴이 조마 조마한다. 딱지가 홀딱 넘어갈 때, 나는 내가 넘어가는 것 같다.”

    <시골 아침>여기에는 기이한 표현의 효과를 노린 손장난이 있을 뿐이다. 어째서 새벽을 아궁이에 태우고, 솥 안엔 아침을 끓이며, 참새가 아침을 쪼아 먹고, 산새 울음을 쓸어 모으는가? 이런 표현이 자연스러운가? 참 기묘한 재주를 부렸구나. 비유가 능란하구나. 하고 느껴지는 것이 결코 시의 감동이 될 수 없다. 그런가 하면 <딱지 따먹기>는 시를 쓴 어린이의 마음이 잘 나타난 좋은 시다. 어린이의 천진한 마음이 나타나 있어서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이 오덕,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 pp.50, 54-56. 박 성완, 24. 6. 1.

 

2. “바알세불과 성령(22-32)”을 읽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도 조절하지 못하는가 하면, 자신의 행동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참 우습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얼마 전에 잘 나가는 대형 병원의 의사가 자신의 처를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이성적인 지식인이, 세상 물정에도 일가견을 가진 지도자가 이런 몹쓸 짓을 하고 만 것입니다. 아마도 내용이야 어떻던,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 의사 못지않게 화가 날 때도 있고, 분노가 몰아칠 때도 있었을 것인데, 이 의사처럼 행동하지는 않고 살아갑니다. 제가 설교목사로 있는 송파구 농인교회에는 90이 넘은 할머니들이 몇 분 계셨는데, 불과 4-5년 사이에 한 분만 남게 되었습니다. 찬송을 인도하는 수화 찬양단은 수화로, 이 할머니는 자신이 만든(?) 율동으로 찬송을 부르십니다. 따님이 천주교 무료급식소에서 봉사를 하시는데, 어머니를 주성교회에 보내시고 있습니다. 생각해 봤습니다. 이 할머니를 농아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시는 것은 왜일까? 하고 말입니다. 교회 오는 길에는 대형교회들도 여럿 있습니다. 왜 이 작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까요? 그리고 우리는 이런저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서로 다른 여러 종류의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교회생활도 하고 직장생활도 하며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살고 있는데 이는 왜일까요?

    오늘 본문에는 귀신의 왕이라 알고 있었던 바알세불이라는 이름과, 삼일일체이신 하나님 성령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침 그곳에 벙어리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께서 고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소경이 되거나 벙어리가 되는 일 등 인간의 능력이 닿지 않는 불치병이나 난치병 환자들을 귀신들려다.” 혹은 신들렸다.”는 말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벙어리가 말을 하게 되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할 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항변하지 못하는 배수진을 치는 말,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는 것은, 더 큰 귀신들린 사람이 하는 일이다.”는 식으로 대답한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사실은 누군가를 망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악령의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살려내려고 힘쓸 것입니다. 그 분을 우리는 성령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악령과 성령 사이에서 서 있다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순간 모든 결정을 해야 할 중요한 순간에 악령의 말을 듣는 사람은 멸망의 길로, 성령의 말씀을 의지하는 사람은 생명의 길로 들어설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