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신학은 성경을 이해하는 조력자로 남게하라. / 마 12:43-50.

박성완 2024. 6. 5. 00:00

묵상자료 8420(2024. 6. 5. 수요일).

시편 시 68:19-21.

찬송 2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유명인이 남긴 어록은 도움이 될 때가 많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르고, 분노로 세상이 보이지 않을 때, 이런 짧은 경구들은 큰 힘이 된다. 노먼 빈센트 필은 이런 말을 남겼다. “무언가 되고 싶고, 하고 싶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고, 오르고 싶고 삶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욕망은 기적을 만드는 재료이다.” 박성완, 24. 6. 4.

 

2. “되돌아온 악령(43-44)”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이냐?”를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우리는 신학 논쟁을 할 때, 교리가 성경을 압도하지 말아야한다는 말을 자주 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 중 하나입니다. 제가 1974년 신대원 재학시절에 성경연구 교재인 베델성서연구의 첫 수강생이 되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당시 루터신학원과 연세대 연합신대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낮에는 연신원을 밤에는 루터신학원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과목 중 하나가 베델성서연구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목사가 될 사람은 다른 어느 무엇보다 성경을 먼저 잘 배워야 한다는 베델성서를 창안한 할레이 스위감 박사의 절절한 기획 의도에 공감을 했던 때문입니다. 물론 리콰이어 과목이었기에 반드시 해야만 한 공부였지만, 소위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그 과목을 지도한 교수는 미국인 이무열박사였는데, 가르치는 방식이 초등학교 수업과 거의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학생들을 일렬로 세우고, 질문을 합니다. 주로 성경 내용을 기억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내용인데, 앞 사람이 틀리면 그는 맨 뒷자리로 가야하고, 맞춘 사람은 제 자리를 유지하는데, 자존심이 많이 상할 수 있는 수업방식이었습니다. 물론 제 기억이 맞는다면, 저는 항상 우수한 학생으로 뒷자리로 간 적이 거의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베델성서는 제게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중심 주제들에 대해서 매우 충실하며, 무엇보다도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력 혹은 통전적/integrity 흐름에 관한한 독보적인 교재였습니다. 이런 기초적인 준비가 되었을 때, 신학이라는 것이 매우 효용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학은 성경 전체의 의미를 설득력 있게 연결해 주고 설명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학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그러면 오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냐?는 주님의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하는지를 두고, 로마가톨릭교회의 해석과 부딪힐 수 있습니다.

    저는 다행히도 명동에 있는 분도 서점을 자주 이용하였는데, 그곳에서 서한규님의 가톨릭교회와 개신교라는 책을 발견하고 약 30분 정도는 서점 라운지에 앉아서 책을 훑어보고 거금을 들여 구입했는데(2012. \29,000), 두고두고 잘 사용 중입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할 주제에 대해서는 여러 곳에서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서 말하고 있기에 제가 가톨릭의 견해라고 말하는 대목은 서한규님(64년생인데, 인생자료 전혀 찾지 못함)의 책에서 말하는 내용임을 짐작하시면 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경은 주님을 찾아온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서 기다린다는 전갈을 받고, 유별나게도 누가 내 어머니이며,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고 전부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구절을 두고 가톨릭과 개신교 간에는 신학적인 논쟁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간략히 가톨릭의 신학적 입장을 요약한 내용만 보더라도 전체 pp.755 중에서 마리아에 관한 내용만 pp.489-636까지 무려 147페이지나 됩니다. 얇은 책 한권 정도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면 이 구절에 대한 가톨릭의 신학은 무엇이라 가르치는가 살펴봅시다. 기본적인 신앙은 평생 동정녀라는 신학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오늘 본문을 제외하고도 많은 반증/反證이 있습니다. 맏아들이란 말씀입니다(1:6). 이 말은 동생들을 염두에 둔 말씀입니다. 다음으로는 예수님의 형제들에 관한 신학은 성경에 4명의 실명/實名이 거론되는데,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그들의 이름입니다(6:3). 예수님의 친형제라고 믿는 개신교와 엘비디우스 이단에 반해, 가톨릭에서는 이복형제 또는 사촌형제로 대답합니다. 그 전거/prove text로 형제라는 헬라어 아델포스가 여러 의미로 쓰인다는 궁색한 대답을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찌하여 친동생이랄지 사촌동생이랄지 한 두 마디만 더하면 고생시킬 필요가 없는데 왜 그랬을까? 강한 의문이 듭니다. 그리고 성경이 아닌 일반 사회의 경험치를 여기저기서 찾아내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중 하나는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이었는데, 성경으로 말하게 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