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방식의 엄청난 차이. / 마 25:31-46.
묵상자료 8469호(2024. 7. 24. 수요일).
시편 74:12-15.
찬송 253장.
1.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리더십 불변의 법칙>의 저자 존 맥스웰(John Maxwell, 1947~)은 이런 명언을 하였다. “해야 할 일을 먼저 처리하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날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나는 주일학교와 중 고등부를 오랫동안 맡아 지도했는데, 그 때 가장 많이 얘기했던 얘기가 우선순위/priority가 아니었나 싶다. 청소년기는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서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곤 한다. 대학시절 내 룸 메이트는 그 많은 일들을 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었고, 마침내 형의 후원이 끊어지자 공부를 그만두어야 했다.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맥스웰은 먼저 할 일을 처리하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날이 찾아오기 마련이라니, 얼마나 귀한 충고인가! 이런 말을 들었을 때는 책상 앞에 크게 써서 붙일 일이다.
2. “최후의 심판(31-46절)”을 읽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전체적인 의미와 부분적인 의미를 모두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하는 분문이 바로 오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게 무슨 말씀인지를 묵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가운데 수많은 천사들을 대동하고 재판정에 앉아서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 사람들을 갈라놓는데, 오른 편에는 양으로 분류된 사람들을, 왼편에는 염소로 분류되는 사람들을 갈라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의 기준이 되는 선고를 하십니다. 그 내용은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었을 때, 그리고 병들고 감옥에 갇혔을 때 필요한 것들로 주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언제 주님께서 그런 일이 있었느냐며 영문을 몰라 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여기 있는 형제에게 행하였던 것이 바로 주님께 행한 것과 다름없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염소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저주의 말씀을 하십니다. 양의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했던 정반대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배고프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었을 때, 병들고 감옥에 갇혔을 때 전혀 주님을 돌보아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 역시 항의합니다. 언제 주님께서 그러신 일이 있었느냐고 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여기 있는 보잘 것 없는 형제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양의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축복을, 염소의 자리에 앉은 자들에게는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습니까? 불교의 팔정도/八正道와 크게 다르지 않지 않습니까?
하루는 제가 거처하는 사택으로 탁발승이 찾아와 시주/施主를 부탁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 목사로 시주를 할 수 없습니다고 하니 금방 돌아서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그 뒤론 그런 탁발승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시주란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식량이나 재물을 수행자에게 기부하거나 그런 행위를 말하는데, 탁발은 이 시주를 받기 위해 나서는 수행자의 행동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남방불교(태국과 인도 등)와는 달리 한국 불교는 중국의 선종/禪宗의 영향을 받아서, 마치 가톨릭의 수도사들처럼 자신의 노동을 수행으로 보고, 탁발보다 승려가 스스로 일해서 먹을 것을 더 중요한 행위라고 보았습니다. 이에 대한 선종의 유명한 문구가 있는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一日不食)라고 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길을 사성제(四聖諦: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 즉, 苦·集·滅·道)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정견 · 정사유 · 정어 · 정업 · 정명 · 정념 · 정정진 · 정정의 8가지 수행을 가리키는 팔정도에 이르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처럼 이런 가르침이 우리 인간의 심성을 단련하고 자기 관리에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을 뿐, 이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떻게 바르게 보고 말하고 듣고 행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런 인간 자신의 노력과 능력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우리를 구원하러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세상에 오신 주님을 의지하고 그 분의 손을 붙잡는 믿음을 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달라진 행실로써가 아니라, 십자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행실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