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바라볼 분은 예수 그리스도 뿐. / 행 3:12-26.
묵상자료 8490호(2024. 8. 14. 수요일).
시편 78:12-14.
찬송 40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과 싸우는 일이야말로 가장 힘겨운 싸움이며, 자기 자신에게 이기는 일이야말로 가장 값진 승리이다.” 독일의 시인 로가우가 남긴 명언입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광장은 싸움터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수많은 싸움들 중에서 가장 힘들고 가장 값진 싸움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일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자신 안에 있는 온갖 거짓과 불의, 교만과 탐욕을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있는 힘을 다 쏟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오늘의 일기엔 무엇이라 쓸 수 있을까요?
2. “솔로몬 행각에서 한 베드로의 설교(12-26절)”을 읽었습니다. 오순절에 했던 설교 다음으로 두 번째 행한 베드로의 설교문이었습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2살 위인 고향 교회 형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당시는 주일 오전 공동예배를 제외하고 교회의 모든 목회와 행정을 제가 도맡아 하던 대학원 1년차 시절이었습니다. 그 형은 10년도 더 지난 군대시절의 얘기를 꺼내셨습니다. 대구에서 복무를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어느 시골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 대구에 있는 군부대를 방문해서 장병들에게 정훈교육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얘기를 한참 듣다 보니까 제 얘기를 하셨던 모양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려 세 번을 대학시험에 낙방하고, 군복무 35개월을 마치고 7년 만에 연세대학에 합격하고, 단과대 수석으로 총장 장학금을 받고 공부했다는 내용이라 했습니다.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을 지켜주신다.”는 주제였다고 했고, 큰 감동을 받았다 했습니다. 설교의 예화가 너무 황당할 때 우리는 미심쩍어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출처를 정확하게 밝히는 것이 유익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설교자 베드로 옆에 조금 전까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서 있었고, 그를 사람들 앞에 소개하며 설교를 했는데, 이것이 이른바 솔로몬 행각에서의 설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설교의 중심점은 앉은뱅이가 다리를 꼿꼿이 세우고 걷게 된 기적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엄청난 기적에 동참해서 활동한 베드로 자신과 요한을 내세우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어찌하여 이 사람을 보고 놀라며, 어찌하여 우리를 유심히 쳐다봅니까?” 하고 질문을 던집니다. 이런 베드로의 질문은 매우 효과적인 대중적 주목효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들이 아니라 참으로 주목해서 바라보아야 할 분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치유는 그 분의 은총이라고 말입니다.
베드로의 솔로몬 행각 설교는 21세기의 기독교 공동체에게 매우 중요한 하늘의 비밀을 말씀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저는 1970년대 빌리그래함 목사님의 한국 부흥집회를 바라보면서 부산과 울산 그리고 서울이 성시화/聖市化가 되고 전군/全軍 복음화는 물론, 온 나라 방방곡곡에 교회가 세워지기만 하면 우리 한국 땅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줄 생각했습니다. 그 뜨거운 열기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열기는 그리 오래 갈 수가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제5공화국이 탄생하던 시기에 저는 부산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는데, 연합행사에 유명한 부흥강사 신 아무개 목사가 설교를 맡았고, 저는 성경봉독을 하였는데, 그분의 설교 요지는 자신은 150만 명 앞에서 설교를 했던 사람인 것을 알아야 한다며, 예수님을 비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고작 5천명에 불과했다고 말입니다. 그때 저는 저도 모르게 탄식이 입 밖으로 나왔습니다. “망했구나!” 예수님보다 더 잘난 사람들이 너무 많은 우리 한국교회를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았습니다. 여의도 집회의 주역은 5공화국 수뇌가 초청한 오찬 자리에서 몇 번씩이나 허리를 굽히며 “각하!”를 연발했다고 신문에 기사화 된 인물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읽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설령 읽었다고 하더라도 그 얘기는 2천 년 전 캐캐묵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 이 사람(앉은뱅이에서 고침 받은 사람)을 보고 놀랍니까? 왜 우리를 유심히 쳐다봅니까?” “이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의 이름으로 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볼 분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