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을 수 없는 삶의 배경들. / 행 6:1-15.

박성완 2024. 8. 21. 00:00

묵상자료 8497(2024. 8. 21. 수요일).

시편 78:34-37.

찬송 23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하고 조금 숨을 돌릴 만 해 지자, 12권짜리 한 질을 집으로 배달 시켰습니다. 아내와 한 판 전쟁이 일어났음은 물론입니다. 살림살이도 장만해야 하는데, 무슨 책이라니, 그것도 월급의 절반이 넘는 투자라니 말입니다.

    중국 송나라 때 육유라는 분은 자신의 서재를 서소/書巢, 즉 책 둥지로 불렀다 합니다. 어떤 손님이 와서 아니 멀쩡한 집에 살면서 둥지라니 웬 말입니까?” 물으니 육유가 당신이 내 방에 들어와 보지 못해서 그럴게요. 내 방에는 책들이 여기 저기 쌓여 있어서, 내 일상의 기거는 물론 아파서 신음하거나, 근심과 한탄 속에서도 책과는 떨어져본 적이 없소. 바깥에서 천둥 번개가 쳐도 모른다오. 간혹 일어나려면 어지러이 쌓인 책이 에워싸고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소. 그러니 서소라 할 밖에.”                      정 민, 옛 사람이 건네 네 글자, p.191.

 

2. “일곱 집사의 선택(1-7)”체포당한 스테판(8-15)”을 읽었습니다. 저의 고교 1년 선배 중 한 분이 형제 교회/The Brethren Church”에서 총회장으로 있는데, 그 교단은 모두가 형제라고 부른다 했습니다. 한국교회와의 연합행사 등을 할 때, 호칭 때문에 어려움이 있어서 총회장만은 한국교회의 관례를 따른다 했습니다. 이유는 분명하지요. 성경에는 목사라는 호칭도 없고, 권사니, 구역장이니, 순장이니 라는 호칭도 없어서 이를 설명해야 할 경우가 많아서 힘들다 했습니다. 교회의 제도나 호칭 등은 굳이 성경을 따를 수가 없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아침 어젯밤 꿈속에서 교회의 설교를 맡아서 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 설교자가 되는 식으로 호칭을 급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교회의 헌법이나 제도 그리고 신앙고백 등은 시대적 요청에 의해서 성경적 이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선용할 수도 있고 악용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사회적 식견이나 지도력이나 교회 봉사하는 자세나 모든 면에서 덕이 되고 지도자로 세워도 좋을만한데, 단 하나가 문제라고 합니다. 담임 목사님이 견제를 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싫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게 의견을 물어왔습니다. 그 교회를 떠나야 하느냐고 말입니다. 마음이 괴롭다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우리 한국 교회는 교회 직분자의 검증 1순위는 모든 교우들 앞에서 모범이 되는 신앙생활일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필요로 하는 신앙심과 인성 등등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잘못된 경우도 없지 않았습니다. 1순위는 고려도 하지 않고, 사회적 신분과 재력이 판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교회 직분의 진면목을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초대교회는 교회 일꾼의 기준을 몇 가지로 정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교우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었고, 둘째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 셋째는 지혜로운 사람 여부를 고려했다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첫 번째 기준이 교우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심은 두 번째 기준이었던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어떤 강제적 구성단체가 아니라 순수하게 자발적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모여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매우 자연스러운 기준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중형 교회에서 여선교회 헌신예배 강사로 갔던 일입니다. 예배를 마친 후 제가 목사님께 요즘 주일 오후 예배가 힘들다고 하는데 목사님 교회는 빈틈없이 교우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을 보니까 참 좋았습니다. 라고 하니까, 제가 독재자입니다. 모이라고 해서 모이지 않으면 제가 야단법석을 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목회자의 가정 구성원들을 자랑하셨습니다. 자녀들이 헌신적으로 교회를 봉사하는데 서울대를 나온 의사 며느리가 강대상을 닦는 일을 하는데 교우들의 칭찬이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녀 중 하나는 사시에 패스했는데도 조용히 교회 봉사를 잘 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런 모범이 되는 삶이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아쉬운 것은 교회 봉사를 희망사항이 응답받는 직행이라고 가르친다 합니다. 결국 신앙생활의 목적이 꿈의 성취에 있다고 인식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활동보다는 교회를 중심으로 한다니까 불행 중 다행(?)이랄 수 있을까요? 차제에 우리는 하나님과 교회 그리고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은 그 자체로 의미가 되고 목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야 시험에 들지도 않고 장기 레이스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