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설교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시대. / 행 7:1-16.

박성완 2024. 8. 22. 00:00

묵상자료 8498(2024. 8. 22. 목요일).

시편 78:38-41.

찬송 23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억의 힘과 잊는 힘이 우리들 인생의 삶을 풍부하게 만든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타국에서 살다가 고국에 돌아온 어린 손주들에게 많은 것을 기억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생각했는데, 그것만도 아니라는 깨우침을 받게 되었다. 유대인 극작가 숄럼 아시(1888-1957)<외설적인>이란 희곡으로 베를린에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미국에서는 똑 같은 작품으로 굴욕적인 대우를 받았다 한다. 그가 남긴 명언 중에는 기억해 내는 힘이 아니라, 잊는 힘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데 더 필요한 것이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기억의 힘으로가 아니라 잊음의 힘으로 살고 있는지 모른다.

 

2. “스테판의 설교1(1-16)”을 읽었습니다. 어제 새벽엔 한 묵상식구가 저의 묵상에 대해서 피드백을 하셨는데, 너무 감사해서 곧 바로 답글을 보내드렸습니다. 요즘 저는 너무도 쉽게 설교를 들을 수 있는 시대를 살다보니까 부작용도 많구나 하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한 주간 내내 수십 편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 때문인지는 몰라도, 신 구교를 막론하고 조금은 톡톡 튀는 설교를 들을 수가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고, 참으로 아쉬운 것은 설교가 예배의 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예배의 내용은 거두절미하고, 설교만을 송출하는 방송이 못내 유감이라는 생각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예배자의 만남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찬송과 기도 그리고 예물봉헌 같은 내용들은 예배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들이고, 성경봉독, 설교, 성찬과 축복선언 같은 것들은 하나님께서 예배자들에게 오시는 내용들입니다. 그러니까 설교는 이 다양한 예배의 구성요소 중에 하나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 기독교회는 마치 예배란 설교다 하는 식으로 하루 종일 아니 한 주간 내내 설교만을 내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럴 것입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설교들 중에서 주목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인지, 설교의 내용은 물론, 설교자의 제스처나 복장 등에 있어서도 불경하기 짝이 없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예배 인도자는 그것이 예배자들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바치는 내용이든, 하나님을 대신해서 예배자들을 찾아오시는 내용이든, 예배의 룰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기자는 이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규정하였습니다. 예배의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남편을 대 여섯 번 갈아치우고도 또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이었습니다(4:20-24). 예배를 규정한 최초의 예전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규정한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예배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예배학에서는 예배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내용을 제사적인 요소/Sacrificial Elements 라고 정의합니다. 기도나 찬송 그리고 감사는 예배자가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입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께서 예배 인도자를 통해서 예배자들에게 오시는 내용을 성례전적 요소/Sacramental Elements 라고 정의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드릴 때 버릇없는 망나니처럼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들 손에 쥐어 주시는 것을 딴전을 피우며 받겠습니까?

    그렇게도 많은 설교를 듣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설교가 병들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하나 고치려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코미디언들이 늘어가는 것 같습니다. 울다 웃다 뛰다 넘어지기까지 하는데 가관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습니다만, 제가 부산 YWCA에서 성경을 가르칠 때, 당시에 유명한 목사님을 졸업식의 설교자로 모시는 것은 어떠냐고 물었을 때, 그 목사님의 친 누나가 학생회장으로 있었는데, 절대로 안 된다고 손 사레를 쳤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듯 예배는 고사하고, 현재 진행 중에 있는 개신교회 지도자들의 설교는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지적하면, 첫째, 성경 본문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주제로 설교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설교를 많이 듣는 것이 구원받기에 유리하다는 생각이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설교는 귀를 만족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한 실천의 말씀임을 알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셋째, 성경 용어를 깊은 성찰 없이 인간의 소유처럼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가령 구원이나 은혜 등은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지는 선물과 같은 것인데, 현실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이나 지혜로 성취하는 보상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말씀을 듣고 행동하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예 처음부터 실천적 말씀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 교회의 첫 집사로 선출된 스테판의 설교인데, 예수 신앙의 기원을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히고 있고, 아브라함의 후손들로 하여금 외국 땅(이집트)에서 400(430)동안 학대 받을 것을 예언하셨고, 하나님의 백성된 표로 할례의 제도를 만드신 것과, 하나님의 예언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 먼저 자리 잡았던 요셉의 도움으로 피신할 수 있었던 일련의 역사를 일깨우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유대교 뿐 아니라 기독교 역시도 역사성을 가진 설교를 지향하지 않는다면, 어느 메마른 광야와 진공의 창공을 향해 소리치고 있다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