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식을 가진 설교자가 그리운 시대. / 행 7:17-29.
묵상자료 8499호(2024. 8. 23. 금요일).
시편 78:42-44.
찬송 52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집안이 이곳에 집을 마련한지 4대 째인데, 가난하기가 4대째를 거치며 한결 같았다. 거처하는 방은 벽만 덩그렇게 둘러 있고 먹는 밥은 늘 쌀죽이요, 의복은 몸을 가리지 못했다. 문에는 부릴 아이 종 하나 들락날락하지 않고, 집안에는 훔쳐가고픈 물건이 없으므로 도둑을 유혹할 거리라곤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안이 날로 쇠락해져간 것은 도둑이 끊이지 않은 게 그 원인의 하나라고 아니할 수 없다. <중략> 갑인년(1794년) 일만 일천 전(전)으로 우리 집을 산 자가 있었다. 그 자는 돈을 주지 않은 채 집을 차지하고서 ‘기다리라’는 말만 7년 넘게 하다가 집값을 채 반도 안 갚고 죽었다. 그 자는 아들 넷을 두었고, 생계를 잘 꾸려 아주 잘 살았기에 그 아들들에게 돈을 요구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돈을 거의 다 갚았다고 늘 말씀하셨소.’ 라고 응수했다. 이야말로 그 아들들이 도둑질한 것은 아니지만, 제 아비가 도둑임을 입증한 것이다.”
안 대회, 고전 산문산책, pp.582-583.
2. “스테판의 설교2(17-29절)”을 읽었습니다. 말과 글은 같은 의사표현 혹은 의사전달 도구이면서도 여러 가지 면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말이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표현 방식이라고 하면, 글은 잠재적이고 간접적인 표현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글이 항존적이라 하면, 말은 순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설교와 설교문은 같은 내용을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쌍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스스로 설교문을 써 둘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타인에 의해서 또는 타인을 위해서 쓴 것들이며,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양이 엄청나게 많이 늘어났습니다. 가령 25년간 KNCC 가정생활 위원회가 발행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라는 가정 예배서에는 저의 설교문이 75편 실려 있는데, 각 교단 안배 차원에서 제가 차출되어 반 강제적으로 쓴 설교문들이고, 그 밖에 월간지 <기독교 사상>이나 <새가정>, <새 생명> 등에 기고한 설교문들도 자원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 쓰게 된 경우들입니다. 설교 연구서인 <예배와 강단>에도 20년간 공동 집필한 것들도 각 교단별 안배의 성격이 짙은 글들입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무려 9,499회의 묵상설교 역시도 제자들의 요청에 의해서 쓰게 된 글들입니다. 심지어 저의 이름으로 발행된 단행본 들 역시 교단이나 연관된 단체들에 의해서 억지로 끌려가 발행한 것들입니다. 장황스럽게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자랑스럽지 못하고 오히려 부끄러운 기록들이라는 점을 고백하려는 심산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런 기록물들에는 특별한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오래 전의 일기장을 들춰보듯 말입니다. 그 때는 이래서 비겁했고, 그 때는 저래서 무력했구나! 반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딱 한권 발행된 중어판/中語版 묵상집 <세월을 아낄 이유/珍惜光明的 理由>는 제가 중국교회 지도자들을 위해 강의할 때, 강력하게 요청받아 매우 위험한 모험에 동의한 후 나온 책인데, 내용은 뜻을 모르겠으나 늘 새 힘을 받곤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하신 설교들과 바울과 베드로 그리고 스테판 집사의 설교를 수 백 수천 번씩이나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물론 질곡의 역사라는 태산준령을 거쳐 오는 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수정되고 윤색/潤色되었을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흠숭해 마지않는 분들의 설교를 필요할 때마다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 그리고 희망이 되는지 모릅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영상이라는 도구로 현장감 있는 설교를 재삼 반복해서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래서 저 같은 활자시대를 추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설교문의 가치는 얼마나 구구절절한 의미인지 모릅니다. 요즘 시중에서 회자되는 말 중에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는 말이 단연 독보적이라고 하는데, 스테판의 설교는 신앙의 역사를 거듭 반추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하나님의 약속, 둘째는 이집트에서 환영을 받고 시작한 이스라엘 민족이 푸대접을 넘어서 노예로 전락하게 된 경위, 셋째는 그때 혜성같이 등장한 모세의 출현, 그리고 모세에 의한 이스라엘 민족들 사이의 신앙과 민족의식의 정체성 닦기, 넷째로 모세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민족애의 고취 등으로 전개됩니다. 저는 1950년대 말을 시골 부모님 밑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때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시던 송주방 선생님이 가끔 수요일에 설교를 하셨는데, 그분의 설교는 다른 분들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계속 질문을 하셨고, 신앙생활의 의미와 본질에 관해서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2-3년 후 거창고등학교 전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와 박혔고, 왜 공부해야 하는지,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앞으로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강단에서는 사람들을 고민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저 먹고 배부른 것으로 만족하라고만 줄기차게 핏대를 세웁니다. 제가 목사가 되어 소위 당시 유명인의 설교에서 돌아서게 만든 것은, 역사의식의 부재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모두가 존경해 마지않는 조 아무개, 한 아무개 목사 등이었습니다. 언제나 권력에 기생하는 아류/亞流들이었으니까요.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