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날마다 성장해야 하는 신앙. / 행 8:14-25.

박성완 2024. 8. 28. 00:00

묵상자료 8504(2025. 8. 28. 수요일).

시편 78:59-62.

찬송 49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남의 기쁨에서 우리 자신의 슬픔을 뽑아오고, 남의 슬픔에서 우리의 기쁨을 얻어 온다.” 오웬 펠덤의 명언이다. 그런 의미라면, 나의 실패와 슬픔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기도 하고, 용기와 도전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실패했다거나 병에 걸렸다는 것이 반드시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실패하지 않는 인생도 없거니와, 늘상 행복한 인생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 다 실패하지 않고 불행하지 않는 인생을 살 수도 있지 않은가? 결국 성공이나 행복이란 기준은 잘못된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말이다. 참된 성공과 행복이란 우리들 마음이 정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2. “사마리아에 전해진 복음 2(14-25)”을 읽었습니다.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한 이는 빌립이었지만,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양육한 이는 베드로와 요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그들이 성령받기를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사마리아의 새 신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에게 손을 얹자 그들도 성령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초대교회의 신앙의 현주소를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십여리 먼 길을 걸어서 다니는 김찬섭이란 친구가 있었습니다. 먼 길에서 올 뿐 아니라, 읍 같은 면 소재지에 사는 다른 친구들과 비교되는 도시락 반찬 때문에, 아예 도시락도 없이 학교를 다니곤 하였는데, 가끔 점심시간이 되면 저의 집으로 데려가서 점심을 먹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전도를 해서 지금은 자신의 고향 교회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는 자랑스러운 친구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매우 비판적인 신앙으로 저를 곤혹하게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신앙이 자랐다는 말이고, 신앙의 핵심에 가 닿고 있다는 말입니다. 초대 교회 역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들 역시 다양한 지도자들이나 선배 신앙인들과의 교제에서 신앙의 겉핥기만을 하는 상태에서 조금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것으로 성장하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10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리걸음하는 이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신앙의 문제 중에 하나가 성령 이해였습니다. 그리고 요즘도 회자되곤 하는 성령세례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는 성경에서 취급하지 않는 것은 고민도 신경도 쓸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칼뱅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들 가운데는 삼위일체, 사도신경, 교회 직제와 같은 것은 아예 생각지도 말자고 합니다. 결국 우리가 건강한 교회라고 생각하는 어느 교파는, 이런 주제들을 가르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예배에서 신앙고백도 하지 않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온 친구에게 삼위일체나 사도 신경을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온전한 신앙을 갖도록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기 때문이며,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신앙 역시 시간과 함께 자라나야 할 과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들 중에,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라는 말들이 무슨 관련성을 갖는지 혼란스럽다고 느끼게 되었다고 하면, 이제는 교리나 신학에 대해서 눈을 뜰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의 이름으로 받던 세례가 문제가 있는 것을 깨달은 지도자들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도록 가르쳐야 할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께서 각각 다른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신데 그 위가 다르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했지만, 아직 초대교회도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를 난감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으로만 세례 받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의식만은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세례 의식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가르쳤던 마태복음의 공동체에게 영향을 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참고로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는 수많은 초대 교회의 교부들에 의해서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아레니우스, 아타나시우스, 터툴리아누스, 오리겐, 어거스틴 등에 의해서 논의되고 수정되다가 마침내 콘스탄티노플 회의(주후 381)에서 확정된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회가 믿고 가르치는 삼위일체 교리는 여전히 신비가운데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삼위요 일체이신 하나님은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말씀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믿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믿음은 신비입니다. 어떤 공식이 있어서 그 공식에 대입하면 정답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성령 하나님 이해도 공식화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신비란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은 의미일 수 없으며, 사람마다 다르게 깨달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장한 신앙인의 모습이며,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