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이나 기적보다도 더 중요한 것, 일상속에서 맺는 소중한 인연이라는 진리. / 행 10:17-33.
묵상자료 8512호(2025. 9. 5. 목요일).
시편 79:10-11.
찬송 316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엘리자세스 E. 디킨스(1830-1886)은 800여 편의 시를 썼는데, 미국의 여류 시인으로, 주로 남북전쟁이 활발하던 때였다고 한다. 그녀의 시 중에 <한 가슴의 깨어짐을 막을 수만 있다면>이란 제목의 시는 너무 강렬해서 삶의 의미를 찾는 젊은이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젊은이 중의 한 사람이었으니까. “제가 만일 한 가슴의 깨어짐을 막을 수 있다면, 저의 삶은 헛되지 않아요. 제가 만일 한 생명의 아픔을 덜어주고 고통 하나를 식혀줄 수 있다면, 그리고 또한 힘이 다해가는 로빈새 한 마리를 그 둥지에 다시 올려 줄 수만 있어도 저의 삶은 진정 헛되지 않아요.”
2. “베드로와 고넬료의 대면(17-33절)”을 읽었습니다. 우리들 삶이란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신비롭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전혀 상상조차도 하지 않았던 일들이 이상스러운 과정을 거쳐서 해묵은 숙제를 푸는 열쇠가 되기도 하고, 또는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새로운 깨우침으로 떡하니 등장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회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피차에 껄끄러운 관계이지만, 신앙적인 면에서는 감사와 존경의 대상으로 피차 조심스럽게 예절을 차리던 관계같이 보였습니다. 물론 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만남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서로의 이름들은 익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고넬료가 보낸 사람은 거룩한 천사께서 베드로를 욥바에서 모셔다가 말씀을 들으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그 심부름을 왔던 사람들을 베드로의 처소에서 하룻밤을 묵게 했던 것입니다. 이튿날 베드로는 몇 신도들과 함께 욥바를 떠나 가이사랴의 고넬료의 집으로 가니, 이미 고넬료는 자신의 친인척들을 불러 모아 베드로를 맞을 준비를 해 두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넬료는 베드로의 발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는데, 어찌나 공손하게 절을 하던지 베드로가 고넬료를 일으켜 세우며, 나도 사람이니 너무 떠받들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고넬료는 베드로 사도를 청하게 된 연유를 말씀드리게 됩니다. 나흘 전 이 맘때 그가 오후 세시 기도를 드릴 때 눈부시게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선행을 기억하고 계시다며, 욥바로 사람을 보내 베드로를 모셔와 주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려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어떻습니까? 베드로와 고넬료는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 환상을 보았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을 향해서 복음을 전하라는 의미의 환상이었고, 고넬료는 하나님의 일꾼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는 환상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이 대면할 수 있었던 것은 환상이라는 매개체가 필요했지만, 그들이 만났던 환상은 이런 만남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목적과 수단이라는 주제에 멈출 때가 있습니다. 까닭은 목적과 수단이 뒤 바뀌는 현상을 목격하면서 현기증조차 느끼지 않는 때문입니다. 우리의 경험상으로 보았을 때, 우리들 삶에서나, 주님의 말씀에서 목적이란 매우 단순하고 평범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체의 삶이라 할 수 있는데, 때론 그 수단들이 너무 특이해서 그 수단에 푹 빠져버리는 경우가 많더라는 말입니다. 가령 저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러 타지에 머물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학교 교장 선생님 댁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저녁 식사시간에는 교장 선생님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다 모이곤 하였는데, 그 많은 식구(교장 선생님 내외, 그리고 교장선생님의 모친, 교장선생님의 4남매 자녀와 조카 등 해서 저까지 10명)이 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저녁 식사 자리는 그 가족이 중심이 아니라, 갑자기 끼어든 객식구인 제가 주인공이 되곤 하였습니다. 주로 저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 다음 날부터는 학교생활과 교회생활 등이 화제가 되곤 했습니다. 저는 간단히 식사만 하고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밥 한 끼 먹는 일이 무슨 고문을 받는 것 같았고, 시험을 앞두고 복잡한 제 머릿속을 더욱 더 헝클어놓았던 것입니다. 시험에 도움이 될 이른바 팁이 있었다면 아주 좋았겠지만, 이런 목적은 제게서 너무 아득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60여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니까 시험이라는 코앞의 목적보다는 한 인간이 살아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좋은 관계 맺기라는 목적에서 불땐, 훨씬 더 크고 귀한 것임을 새삼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