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향한 빛과 소금의 직무는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을 완성된다. / 행 11:19-30.
묵상자료 8516호(2025. 9. 9. 월요일).
시편 80:8-12.
찬송 35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만난 한 여성은 자신이 가까운 시일에 죽을 것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동안 너무 안일하게 살아왔고,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정신적인 소망을 추구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최후의 날을 생각하며 완전히 내면의 세계를 향하고 있었다. “저기 서 있는 나무는 외로운 나의 오직 하나의 친구여요. 이 나무와 곧잘 이야기를 합니다.” 전혀 대답을 들을 수 없는 나무를 보고, 오직 하나의 친구라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진정한 친구를 만들 수 있다.
2. “안디옥에 세워진 교회(19-30절)”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자생교회(自生敎會)라는 말을 사용하곤 하는데, 로마교회가 그런 교회를 대표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지도부가 정식으로 지도자를 파송해서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이름도 알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진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최초의 이방 땅에 세워진 교회가 오늘 본문에서 소개하는 안디옥 교회입니다. 더군다나 교회가 정치계나 종교계(유대교)에 의해서 박해를 받게 될 때는 공식적으로 교회를 세우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 결과 자생교회는 소리 소문 없이 이곳저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전하는 활동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 지도부는 바나바를 현지에 급파하게 됩니다. 안디옥에 세워진 교회가 어떤 성격을 가진 교회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잘못된 사상이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회를 오도/誤導하기 위해서 세울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을 테니 말입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하나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았고, 그들을 격려한 후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아시아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가 그를 데리고 안디옥으로 가서 1년 동안 교회를 지도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건강한 교회와 병든 교회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예수 중심의 신앙생활을 지도하는 교회여야 합니다. 그러나 병든 교회는 무당이나 박수 같은 사람이 나서서, 엉터리 신앙을 가르치고 마귀의 길로 인도하는 곳이라 하겠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듣고 싶은 말씀을 설파하는 지도자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건강한 교회는 마땅히 들어야 할 말씀을 갈망하며 그렇게 가르치는 지도자를 따르는 경우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도왔던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아가보라는 성도가 성령이 충만하여서 예언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기근이 들 것을 예언하였고, 그의 예언대로 기근이 닥쳐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때, 안디옥 교화는 힘 닿는 대로 헌금을 하여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게 된 것입니다. 이때 안디옥 교회는 절차를 밟아서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도운 것입니다. 교회는 그 교회가 서 있는 현실적인 역사의 현장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인 관심으로 당당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병들고 배고픈 역사 속의 사람들을 외면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빛과 소금이 되어서 역사의 방향을 올바르게 제시하고 모범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자면 현실 정치가들이나 세력가들에게서 비난을 받고 박해를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가끔 교회가 신앙적인 일 이외에는 손을 떼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신앙인들은 역사 속에서 숨을 쉬고 살아가는 사람인 것을 무시하는 엄청난 곡해입니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나 동란/動亂 때 서양의 많은 교회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 고등학생 시절 구호물자로 나온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나 칼국수로 몇 학기를 살았는지 모릅니다. 교회는 당연히 세상의 어두운 구석을 비춰주고 위로와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초대교회는 좋은 본을 보였다 생각합니다. 다만 교회 울타리를 너머서도 그랬어야 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