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나은 삶은 없을까? / 행 13:1-12.
묵상자료 8518호(2025. 9. 12. 목요일).
시편 81:1-3.
찬송 41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처음 붓을 잡는 이에게 들려주는 잔소리는 중봉직필/중봉직필이라는 말이라 합니다. “중봉은 붓끝 뾰족한 부분이 어느 방향이든 모든 획의 정중앙을 지나야 한다는 뜻이다. 직필은 붓대가 지면과 직각을 이뤄야 한다는 말이다. 손목이나 손가락으로 재주를 부릴 수 없다. 허리를 곧추 세우고 붓대를 야물게 잡아야 중봉직필이 된다.반대로 측필 편봉/측필편봉은 봇을 좌우로 흔들어 붓끝은 필획의 측면으로 쓸며 재주를 부리는 것이다. 눈을 놀래는 획이 나오겠지만, 정공법은 아니다.”
정 민, 옛 사람이 건넨 네 글자, p.196.
2. “바나바와 사울의 파견(1-12절)”을 읽었습니다. 제 주변에는 순수 문학을 하시는 분들이나, 오직 문자적인 해석만을 고집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쉬운 말로 해서 보수적인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가끔 불편한 한 마디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오해를 사기도 받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차제에 소위 보수와 진보에 대한 저의 속내를 밝히는 게 좋겠다 싶습니다. 사람마다 삶을 대하는 자세는 달라야 하고 그것이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보수란 무엇이고, 진보란 무엇입니까? 주어진 삶에 대해서 크게 불편을 느끼지 않고 그런대로 지낼 만 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자세가 보수입니다. 대체로 이런 보수적인 자세는 현실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크게 가지지 않습니다. 모두가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보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 좀 더 나아질 수는 없을까? 할 수만 있다면 바꿔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불만의식을 가지는 삶의 태도를 가지는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어느 것이 좋은 것이다거나, 어느 쪽이 나쁜 것이다고 섣부른 판단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최종의 판단은 저마다의 삶이 완전히 정리되는 그 순간에 판단해도 늦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함께 살아가는 동료나 가족들에게 불편을 느끼게 하더라도, 좀 더 나은 삶을 좀 더 바람직한 해석을 추구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편안한 가족의 품을 떠나 새로운 세계를 향해 달음질하기도 하고, 현실과는 엉뚱한 삶을 택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은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울이라는 인물에게서 저는 기존에 볼 수 있었던 기독교 지도자들과는 다른 무엇을 느끼곤 합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사상과 신앙을 따랐습니다. 그는 소 아시아의 길리기아 성의 중심 도시인 다소라는 곳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본래 유대인은 부계 혈통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족보가 이를 말하고 있습니다(마 1:2-16). 4명의 여인 중에는 라헬과 룻은 이방 여인이지만, 부계 혈통을 유지합니다. 그런데 주후 70년 로마와의 전쟁이후 유대인들은 세상으로 흩어지게 되는데, 이때부터 모계 혈통으로 유대인을 지칭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유대인이건 아니건,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나은 아이는 최소한 절반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런 편법을 썼을 것입니다. 유대인 아버지와 비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 나은 아이는 유대인이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의 경우는 성경이 이를 뒷받침하는 좋은 예라 하겠습니다(딤후 1:3-5). 아무튼 사울은 유대인으로 제대로 살기를 원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행 22:3). 그래서 남다른 열심으로 율법학교를 다녔고, 유대교가 싫어하는 예수교도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천사를 만났고, 예수교로 개종한 다음에 그는 예루살렘 기독교 공동체에 안주하지 않고, 이방인에게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물론 이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이른바 기독교회는 바울의 진보의식이 가져다 준 최대의 열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독교회의 신앙의 기초를 세우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된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