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20. 성령강림절 후 스물둘째 주일]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 / 히 4:1-13.
묵상자료 8557호.
시편 89:6-7.
찬송 4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박목월 선생의 <명주 안감>이란 글을 읽었다. 아들은 아침저녁 10리씩 걸어서 학교에 갔다. 혹독한 겨울 날씨에 내의를 안 입은 채 광목옷이 빳빳이 얼면 사타구니가 따가왔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헌 명주옷을 뜯어 아들의 바지저고리에 안을 받쳐주었다. 살결에 닿는 감각이 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럽고 따뜻했다. 우연히 손자의 안자락을 보게 된 할아버지가 불벼락을 안겼다. “당장 벗어라.” 그러고는 어린 것을 지리 키워 뭐에 써 먹겠느냐고 펄펄 뛰었다. 그날 밤 어머니까지 큰댁으로 불려가 할아버지의 큰 꾸중을 들어야만 했다. 손자는 다시 그 옷을 입지 못했다. 훗날 선생은 그때의 소동에서 한 그루 교목/喬木처럼 실팍하고 굳세게 자녀를 기르시려는 할아버지의 준엄한 마음을 읽었고,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기억했다.
정 민, 옛 사람이 건넨 네 글자, p.55.
2. 성령강림절 후 스물둘째 주일의 사도서간 히 4:1-13을 본문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젊은 날에는 잠자리에 들기가 무섭게 잠드는 걸 천국의 안식으로 비유하곤 했습니다. 땀 흘려 일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노동의 가치라고, 매일 비료포대에 엉덩이를 올리고 마을 길가의 잡초를 뽑아내던 97세 노인의 교훈을 기억했습니다.
하나님의 안식/安息은 우리 인간이 추구할 최후의 종착점이어야 합니다(1-3절).
예나 제나 죽음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는 크리스천들도 포함되는 것 같습니다(1절). 오늘 본문에는 안식이라는 말을 8번이나 사용하고 있으며, 동의어인 쉰다는 말도 3번이나 들어 있습니다. 모두다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죽음은 인간 생의 승리이며 최상의 행복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음 너머의 안식은 복음의 중심 주제임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 속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온갖 요란하고 무서운 소용돌이 속에서도 잠을 잘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6.25사변에서 정전협정이 일어날 때까지 육군 5사단이 공비토벌 작전을 위해 우리 마을에 주둔했는데, 하루도 총소리를 듣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잠을 설친 기억이 없습니다. 여덟 살 난 소년은 그때 천국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때 교회에서는 <고대가/苦待歌>를 자주 불렀고, 천국설교가 단골 주제였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안식은 복음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일입니다(4-8절).
며칠 동안 몸살로 힘들던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한 이틀 텃밭을 가꾸는 일을 하고나면 생기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몸살기는 근육을 튼튼하게 할 뿐 아니라, 건강을 유지하게 하는 기회를 주곤 합니다. 마치 힘든 하루가 숙면으로 재충전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들 삶에는 절망을 한가득 안겨주는 날들이 많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매일 매일이 배고픔의 두려움이 그러했고, 학생시절에는 먼 미래에 대한 불안보다는 눈앞에 닥친 학비 걱정이 그랬습니다. 대학생 시절까지 참고서는 물론 교과서조차도 살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 때에 누리던 가장 행복한 순간은 고단한 육신이 쉴 수 있는 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안식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을 알고 계셨습니다. 밀레의 <만종>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안과 기쁨이 된 것은 그 증거입니다. 땅거미가 지는 시간을 기다리듯, 주님의 약속을 믿은 사람들이 누리는 은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것은 힘쓸 과제이며, 그 약속은 확실합니다(9-13절).
삶에 대해서 허무와 비관을 떠드는 사람들은 죽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입니다. 그 이유는 자명합니다. 사람은 그 자신의 능력으로 생명을 주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회 일각에서는 웰 다잉/Well Dying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오래 사는데 목표를 둔 생명 연장이 아니라 자존감을 갖는 삶을 살자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의미 있는 삶에 더욱 더 힘쓰자는 노력에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제 고등학교 친구는 두만강 도문 시에서 성경 전하기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염려를 하자,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삶의 의미라고 했습니다. 선교에서만이 아니라, 위험한 일에 의미를 갖고 투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순한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의미를 재건하려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지하고, 인간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을 최상의 의미로 여길 이유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