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사랑의 하나님을 좁은 생각의 틀에 담으려 하는 인생들. / 욘 3:1-4:11.
묵상자료 8573호(2024. 11. 5. 화요일).
시편 90:5-7.
찬송 1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001년 기준으로 세계 50대 교회 가운데, 한국의 대형교회가 무려 24개나 들어있다고 합니다. 물론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도 우리나라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기독교회의 큰 문제 셋은, 첫째 근본주의와 교조주의에 빠져있어서 그 결과 경직성과 배타성 때문에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못하는 점이고, 둘째는 성직자 중심의 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 평신도에게 중요한 결정권이 없어서 거짓말과 불법을 개선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며, 셋째는 서구 중심적 사고를 하는 점인데, 풀어 말하면 제국주의 적이라는 권위와 폭력을 일상화하고 있어서, 새로운 시대사조에 유연성 있게 포용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복음의 참된 정신을 가로 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김경집,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pp.5-15.
2. “니느웨 백성의 회개(3:1-10)”과 “요나의 분노와 하나님의 자비(4:1-11)”을 읽었습니다. 믿음이나 신뢰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인 것임을 깨우칠 때가 더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이방인의 도시 니느웨로 보내시려고 큰 고기 뱃속에 요나를 구원하신 것은, 니느웨 백성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것을 믿으셨다는 말입니다. 만일 이방나라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요나의 수고나 사흘씩이나 고기 뱃속에서의 절망감은 헛된 일이 되었을 테니 말입니다. 이런 상호적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 기쁨은 배나 컸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니느웨 백성에 대한 회개를 확신하신 것에 대해서, 요나는 분노했다는 점입니다. 최근 미국의 어느 유튜버가 자비심이 강한 나라들을 찾아다니면서 그 나라 사람들을 비웃고 약을 올리는 사건을 만들어서, 이스라엘이나 인도네시아 그리고 일본을 한바탕 휘저어 놓고 우리나라에 입국했다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 조니 소말리는 위안부 소녀상에 입을 맞추고 음란한 춤을 추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성희롱을 하고, 독도가 아니라 다케시마라고 하는 등, 우리나라 사람들을 분노하게 한 것입니다. 결국 적극적으로 소말리를 찾아 나서서 응징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도 손도 써 보지 못한 이 만행자를 즉결심판을 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셨습니까? 그놈 잘 맞았다 생각하십니까? 더군다나 성추행과 마약 등에 대해서 조사할 예정이라고 하니 감옥에 갈 일만 남았다고 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비난하며 해코지 하던 사람들에게 어떤 응징도 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할 뿐 아니라, 회개함으로 더 이상 벌 받을 기회조차 주시지 않으실까? 그래서 요나처럼 분노하실 분은 없으신지요? 요나는 악다구니를 쓸 수 밖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 옛날 엘리야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 저를 죽여주십시오. 이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가 차라리 죽어 없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아니십니까? 그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나야, 네가 성내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냐? 요나는 니느웨 성 밖에 나가서 초막을 짓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초막을 위해 박넝쿨로 덮어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박넝쿨로 인해서 기쁨이 컸다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벌레를 모여들게 하셔서 그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셔서 해가 뜰 때에는 말라 죽은 박넝쿨로 때문에, 내려 쬐는 햇볕이 너무 강렬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요나는 하나님께 자신을 죽여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 칩니다. 그리고 요나는 하나님의 물으심에 대답을 하겠다 합니다. 박넝쿨로 인해서 제가 죽게 될지라도 성내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말입니다. 여전히 요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측량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수고도 하지 않고, 기르지도 아니한 박넝쿨이, 하룻밤에 나왔다가 하룻밤에 말라버리는 것을 그렇게 아꼈다고 한다면, 이 큰 성 니느웨에는 앞뒤를 구별하지 못하고, 사는 것과 죽은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12만명이나 되고 가축도 셀 수 없이 많은데, 내가 그들을 어찌 아끼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오직 코앞에 벌어지는 일에만 일희일비하고 있는 무지랭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신 하나님, 배신자들 폭군들, 이런 사람들을 여전히 사랑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