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를 이겼으나, 허망한 최후를 맞은 니느웨에게서. / 나 3:8-19.
묵상자료 8577호(2024. 11. 9. 토요일).
시편 90:16-17.
찬송 50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면 보따리 내놓으라고 덤빌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래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라.” 켄트 케이스가 쓴 <그래도/Anyway>에 나오는 아홉 번째 가르침입니다. 만일 우리들 삶에서 그래도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들 인생이란 얼마나 서글프고 어리석은 삶이 될까? 그래도를 제대로 배운다면, 인생은 희망과 기쁨이 있는 미래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켄트 케이스, 그래도/Anyway, pp.95-99.
2. “니느웨의 멸망3(8-19절)”을 읽었습니다. 성경은 니느웨의 멸망에 대해서 무려 세 번씩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멸망에 대한 예고로, 니느웨의 전성기를 살펴보게 하고, 그 다음에 쇠퇴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니느웨는 이집트의 수도였던 노아몬(개역개정) 혹은 데베스(공동번역) 보다 낫단 말이냐고 말하는데, 본문의 의도는 이집트의 수도보다는 낫지 않지만, 그에 맞먹을 정도로 부귀와 번성의 도시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보기 드물게 수천 년을 화려한 위용을 뽐냈던 도시를 빗대고 있으니, 얼마나 거들먹거리고 교만했을지는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그 뿐 아니라, 마르지 않는 물줄기 나일 강 가에 자리를 잡은 도시일 뿐 아니라, 또 다른 고대 강대국 에티오피아와 푸트/붓과 리비아까지도 이 이집트의 수도를 도와주었음을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도시의 시민들을 잡아간 나라가 바로 니느웨였다고 인정해 줍니다. 그들을 노예로 부려먹었고, 그 도시의 어린 아이들을 만나는 대로 찢어 죽이고, 유지와 귀인들은 끌고 갔던 니느웨였었다고 말해 줍니다. 그런 니느웨가 어쩌다가 원수를 피해 살 구멍을 찾게 되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일침을 가합니다. 그렇게 힘이 세고 유능하던 니느웨가 형편없는 패잔병처럼 형편없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고 비난을 합니다. 추상같은 권세자들의 세력이 그리 길지 않은 훗날, 추풍에 떨어져 딩구는 낙엽처럼 볼품없는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 세상의 명예, 세상의 재물이 부질없는 것임을 사람들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게 역사의 비극입니다. 그 견고하던 성문의 빗장을 불타버리고, 한 모금 물을 애타게 찾는 신세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 도도하던 사람들은 허망하게도 원수들의 칼날에 맥없이 쓰러져 버린 것입니다. 마치 날아다니는 메뚜기 떼처럼 모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말입니다.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느냐고 조롱하듯 말합니다. 더 이상 앗수르의 왕들을 위해서 땀 흘려 일해 줄 목동들은 모두 다 잠들어 버렸다고 말입니다. 목숨을 내놓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던 그 용사들마저 모두 깰 수 없는 죽음의 잠에 빠져버렸고, 무서운 칼날에 생긴 상처가 너무 깊어 나을 길이 없고,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향해서 고소하다 손뼉을 치게 되리라 예언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니느웨는 역사의 산 증거물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가 얼마나 부질없이 헛된 일인지를 똑똑히 바라보고 깨우치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기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의 눈도 귀도 그리고 마음도 모두 닫혀버린 때문입니다. 오직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때문입니다. 우리라고 무엇이 다를 수 있을까요? 이런 무지랭이들에게 구름 너머를 바라보게 하시고 죽음 저편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할 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