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하나님의 심부름꾼들일까? / 롬 13:1-14.
묵상자료 8770호(2025. 5. 21. 수요일).
시편 119:55-57.
찬송 36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R. A. 토레이(1865-1928) 회중 교회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수년 전 미시간 호수에서 물에 빠진 23사람을 건져내 살려낸 예화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구해준 의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렇듯 감사가 실종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널려 있습니다.
2. “권위에 대한 복종(1-7절)”, “사랑은 율법의 완성(8-10절)” 그리고 “단정한 처신(11-14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마침 대선을 며칠 앞에 두고 있어서 시기적으로 적당한 주제가 아닐까 싶어서 선택한 것입니다. 아마도 1972년에 유신이 발표되고 기독교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총리였던 김종필 씨가 의례적으로 롬 13:1-7을 꺼내서 세속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성경의 근본정신인양 설법(?)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 교회 안에서도 이 주제가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어떤 주제에 대한 것이든 올바른 해석을 위해서는 그렇게 말하는 상황 혹은 배경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맥락에서 해석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말입니다. 본문에는 두 종류의 권위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권위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위임받은 권위입니다. 이것이 맥락적 이해에서 놓쳐서는 안 될 중심점입니다. 그리고 공통의 용어 권위라는 말에 대한 해석입니다. 헬라어로는 εξουσια/ 엑수시아를 사용하고 있는데, 본문에서 그 정확한 의미는 인간 세계의 당국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 가지 분명한 key word가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를 가장 분명히 밝히는 대목이 세속 권위의 대표 격은 통치자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라는 점입니다(4절). 그러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그에 따라 권위를 행사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세상의 질서를 위해서 이런 심부름꾼들에게 권세를 위임한다는 점입니다. 그 심부름꾼들은 칼을 가지고서 백성들에게 벌을 줄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벌을 대신 행사하며, 다만 양심을 따라야 하고,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세상 통치자들에게 복종할 의무가 있다는 점입니다. 국세나 관세와 같은 세금을 내는 일, 그리고 통치자들을 두려워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만, 그것은 억지로가 아니라, 충분히 그럴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을 때입니다.
실제로 법과 법의 집행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가령 흑룡강성은 중국의 23개의 성/省 중의 하나인데, 흑룡강성의 오지/奧地에 있는 지역에는 새로운 법령이 내렸음에도 50년 동안 옛 법령이 그대로 시행되고 있다 했습니다. 그러니 정규 시간표를 가진 국가가 운영하는 열차도 공식적인 정류장인 아닌 곳 아무 곳에서나 그 지역 유력 유지가 세울 수 있는 초법적인 권세를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지역에서는 사법권을 가진 관리의 힘은 무소불위라 할 수 있없습니다. 우리는 1세기의 근동 아시아의 세계를 염두에 두고서 이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법치주의를 최고의 통치개념으로 내 세우는 로마 당국에 맞설 수 있는 세력은 그 누구도 없던 시절 말입니다. 이제 막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예수교는 무작정 세속 권위에 대항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세속 권력에 대해서 유약한 자세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 막강한 힘을 인정해 주면서, 동시에 기독교적인 목적과 가치를 말미에 덧붙이는 식으로 말입니다. 세속 권세자들을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라는 표현이나, 세속 권세자에게 복종하라고 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임명을 받은 자들이라면서 말입니다. 이런 편지는 감시가 따르는 내부적 편지였다는 점을 십이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유신 시절을 겪었던 대한민국의 상황이나, 노예제도에 버금가는 남미의 상황에서는 신앙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현실을 민중 신학이나 해방신학이라는 도구로 외칠 수 밖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따른 박해는 각오해야 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