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양심과 상식에 두루 통하는 법조문을 고대함. / 신 19:1-7.

박성완 2025. 5. 28. 00:00

묵상자료 8777(2025. 5. 28. 수요일).

시편 119:76-78.

찬송 45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원말명초(元末明初) 시기에 이루어져 명()나라 홍무(洪武) 26(1393)에 처음 간행되었다는 명심보감/明心寶鑑중국을 넘어 한반도 · 일본 · 베트남 등지에 널리 퍼져있는 동몽서/童蒙書이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비록 환경이 어둡고 괴롭더라도 항상 마음의 눈을 넓게 뜨고 있어라.” 사람이 짐승이나 미물과 다른 것이 예 있음을 알리고 있다.

 

2. “살인자의 도피성(1-7)”을 읽었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 율법의 바탕은 광야 생활 40년 동안의 특별한 삶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백 년 동안의 가나안 정착과정은 유대인의 법률이 엄격해야 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가령 간음한 자는 인민재판식으로 즉결 처단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한 것 말입니다. 이런 가혹한 처벌은 평화로운 지금도 중동지방에서는 종종 벌어지고 있는데,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간음한 가족을 <명예 살인>하는 일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20장에 보면, 실수로 살인한 사람에게도 피난처를 제공하고 재판을 통해 죗값을 치르게 하는 도피성 제도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도피성 제도는(20:1-6) 법과 정의를 유지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소개된 도피성은 6곳으로, 갈릴리의 게데스, 에브라임의 세겜, 유다의 헤브론, 르우벤의 베셀, 길르앗의 라못, 므낫세의 바산 골란이 그곳들입니다(20:7-8). 문제는 실수로 살인을 저지른 자를 위해 도피성을 마련해 두었다는 것입니다. 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문자적 적용이 아니라, 사실은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지점에서 세상의 법률과 하나님의 율법이 보여주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발견해야 하겠습니다. 가령 십계명을 예로 든다면, 두 돌판 중 첫째 돌 판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 따른 계명이고, 두 번째 돌 판에는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데 따른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를 해석한 우리 주님은, 첫 들판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계명으로, 둘째 돌 판을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으로 풀었던 것입니다(22:37-40). 그런데 첫 돌판을 신 6:4-9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도피성의 규정을 제정하신 것은, 문자적이고 일률적인 법의 적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모든 율법의 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근본 목적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단 살인자들에 대한 무섭고 엄격한 법 적용에 앞서서 그의 생명을 돌아보게 하는 또 한 번의 고려를 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도피성을 두게 된 장소가 비록 6곳에 불과하지만, 이스라엘 12지파가 쉽게 찾아갈 수 있는 매우 짧은 거리에 위치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단강 동편에 셋, 요단강 서편에 셋을 두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실수한 살인자들이 도피처로 삼기에는 매우 유리한 장소를 정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우리는 합리적인 법치주의가 작동되는 21세기에, 조령모개/朝令暮改식으로 힘센 사람에 의해서 마음대로 법을 개정하고 집행하는 것을 무력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른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에 의한 관세 폭거가 그것입니다. 그동안 세계 경제는 나름 원칙을 가지고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우며, 자국 물건을 사주지 않는다고, 그 손해를 관세로 징벌적 부과하는 무지막지한 불법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좋은 제품을 값싸게 팔려고 할 때, 거래가 되는 법인데, 미국의 제조업이 높은 고용비용으로 비싼 물건이 되어 팔리지 않자, 억지로 그 손해를 다른 나라에 물리게 하는 힘에 의한 막무가내 식 관세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미국 남부의 근본주의 기독교를 앞세우는 사람이 말입니다. 전 세계가 트럼프에 의해서 경제 질서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좌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오랜 관행은 반드시 유효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말씀하시는 도피성의 규정은 어리석은 인간들의 눈을 크게 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