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9113호(2026. 4. 29. 수요일).
시편 37:37-40.
찬송 43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세계적인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책 샤머니즘은 500여 페이지나 되는데, 도덕이라는 말이 별로 없었다. 샤머니즘과 도덕은 별로 관계가 없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한국의 개신교회가 전래된 지 150년이 가까웠지만, 아직 성숙하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신앙의 초보적인 형태 기복성/祈福性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그 이유다. 기복성을 목적으로 하는 무당종교와 궤를 같이하는 한 필연적인 결과라 하겠다. 나학진, “도덕과 종교인의 삶”, 월간 조선, pp.68-69.
2. “이스라엘 백성에게 출발을 명하시다(1-11절)”과 “모세의 기도(12-23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흥미로운 점이 한 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제대로 알고 계시는가 하는 의문도 들고, 그것을 아시면서도 모른 척 하시는 것일까 하는 의문도 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니까 인간의 겉은 물론 속내도 잘 알고 계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본문을 읽다가 보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매우 역동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높낮이가 있고, 불같은 성격과 뒤끝도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약속의 땅을 향해서 출발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천사를 앞세워 가나안 족, 아모리족, 헷족 브리스족 히위족 여부스 족을 쫓아내라고 명하십니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을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고집이 센 민족이기 때문에, 그들과 동행하다가는 도중에 그들을 다 없애버릴지 모르기에 그들과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어찌해서 우리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는지에 대해서 감탄을 금할 수가 없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인격적인 분이신 것을 깨우칠 수가 있습니다. 이성과 감성 그리고 의지를 가지셨기 때문에, 상호간에 소통이 가능하고, 감정이 교류하며 서로 의기투합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나는 자연인이다>는 프로그램에 산속에서 자전거를 타는 분이 등장했는데, 오리 한 쌍을 키우는데 이 녀석들이 주인을 따라다니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주인이 빨리 달리면 오리들은 날아서 보조를 맞추는 그런 모습입니다. 부인이 키우는 애완견이 할 수 없는 일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이성적으로는 대화가 되지 않더라도 감성적으로는 서로 소통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 보기도 했습니다. 과연 우리 인간은 저 오리 한 쌍처럼, 주인이신 하나님을 어디든 따라다니며 기쁨을 주고 감사를 표하며 살고 있기나 하는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오죽했으면 더 이상 그들과 함께 가나안에 올라가지 않겠다는 섭섭한 말씀을 하실까 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로 하신 말씀이 얼음처럼 차갑기만 합니다. “너희는 고집이 센 민족이기 때문에, 도중에 너희를 다 없애버릴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고집불통과 함께 사는 일은 열불이 날일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냥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친다고 하면 됐지, 다 없애버릴지 모른다고 하셨을까 하고 말입니다.
오랫동안 성탄절이면 수고한 교회학교 교사들과 젊은 집사님들에게 책을 선물했습니다. 그런데 한 20년이 지난 후에 그분들이 책을 잘 읽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은퇴 후에도 저를 찾는 분들에게 책을 선물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마뜩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통과 불통의 문제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격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바로 오늘의 본문이 그것을 깨우쳐 준 것입니다. 고집이 센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고집이라는 말은 자기 나름의 신념이나 가치를 따라서 살고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기에는 매우 힘든 성격입니다. 그래서 자주 부딪히게 되고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하고, 대화가 끊기기도 합니다. 교인이나 학생들을 대할 때에는 왜 그럴까 하고 자문해 보기도 하고 삶의 배경을 조사하기도 하지만, 가까운 가족 사이에서는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지고 모난 성격이 곧 바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처럼 그런 모난 성격을 가지고 계신 것일까? 그럴 수는 없으실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것이란 이것입니다. 성경의 기자들이 우리 인간과의 교제를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인간들 마음 쪽에 옮겨놓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고집 센 인간을 피해서 멀리 떨어지신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인간 쪽으로 마음을 옮기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 만남의 장막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삶의 처소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하나님을 만날 장막을 준비해 두고, 야훼 하나님께 어쭤볼 일이 생기면 장막으로 찾아가도록 말입니다. 사람들은 모세가 장막으로 갈 때마다 자신들의 천막 앞에서 모세가 장막에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게 되었는데, 그때 구름 기둥이 내려와서 장막 문간에 서 있었고, 하나님은 모세와 말씀을 나누셨다고 말입니다. 그때 백성들은 자신의 천막 앞에서 엎드려 있도록 하였다고 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모세와 친구처럼 얼굴을 마주보고 말을 주고받았다고 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묵상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광야 생활 40년간의 신앙훈련이 오늘의 이스라엘입니다. / 출 34:18-35. (0) | 2026.05.01 |
|---|---|
|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기. / 출 34:1-17. (1) | 2026.04.30 |
| 우상숭배 역시 탐욕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 출 32:21-34. (0) | 2026.04.28 |
| 많은 사람들이 우상숭배자로 살고 있다. / 출 32:1-20. (0) | 2026.04.27 |
| 성경에는 풍부한 상징성이 담겨져 있다. / 출 25::1-22. (1) | 2026.04.2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