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9111호(2026. 4. 27. 월요일).
시편 37:31-33.
찬송 35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폐에 대한 로마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는 “인간은 그의 실존 속에서 자신의 현존재의 근거인 거룩한 신비를 향하도록 되어 있다. 이 신비는 가장 근원적인 것이요, 가장 자명한 것이나, 그렇기 때문에 또한 가장 숨겨져 있고, 가장 주목되지 않는 것인데, 그것은 말하는 동시에 침묵하고, 현존하는 동시에 그것은 부재중에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한계로까지 이르도록 지시해 주신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이라 부른다.” H. 오토, 김광식역, 살아계신 하나님, p.30.
2. “금송아지(1-6절)”, “모세가 백성을 대신해서 빌다(7-14절)” 그리고 “모세가 증거 판을 깨뜨리다(15-24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금송아지 사건은 여러 가지 시사 하는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의 시간을 갖느라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불안해진 백성들을 아론을 부추겨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에 절하고 소원을 빌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경박한 민족이 되었을까요? 이 사건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는 이스라엘 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이는 초라하고 나약한 인간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하겠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보이는 하나님으로 믿고 싶어 하는 잘못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요즘 무당집이 자주 방영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어느 무당집에는 온갖 형상들이 집결해 있었습니다. 불상, 예수상, 마리아상, 미륵상, 단군상 등등 말입니다. 하나의 신상으로도 불안하고 두려워서 사람들이 믿고 절하는 모든 신상들을 마련해 둔 것입니다. 이집트의 나일강 상류 아스완에 가면, 람세스 2세를 위해서 만든 아부심벨 신전이 있는데, 그 안에 조각해 둔 신상 중에는 새의 형상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집트 최대의 신전인 룩소에는 황소 등 수많은 짐승들의 신상이 도열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신상 숭배는 영원불사/永遠不死를 꿈꾸는 인간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금송아지 사건을 보면서 심각한 실망감과 절망감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오랜 준비와 엄격한 절차를 거쳐 십계명을 받게 되고 충분한 설명과 이해를 갖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자 모세가 산에서 오랫동안 머물고 내려오지 않자, 불안한 백성들은 아론을 충동질하여 금송아지 상을 만들어 섬기게 된 것입니다. 우상을 새기지도 만들지도 말라는 금령/禁令을 내렸는데 말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야훼 하나님만을 참되신 신으로 섬기기로 약속을 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절대로 이럴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우상 숭배! 문득 어느 높은 관료의 부인 생각이 납니다. 그 분은 4대째 기독교인으로 나름 충실한 기독교인으로 인정받는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편의 관운/官運에 대해서 늘 불안했다고 합니다. 이런 궁금증과 불안의식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도 찾을 수 있는 현상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삶은 항상 불확실한 것들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그 불안과 궁금증을 풀지 않고서는 잠을 이룰 수도 어떤 일을 할 수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용하다는 무당을 찾아 묻게 되었고, 그것도 시원하지 않자 신 내림은 자의/自意로 할 수 없으니까 스스로 주역/周易을 열심히 공부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간의 마음에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려는 마음보다는, 누군가 혹은 무엇엔가 맡기고 싶은 우상숭배의 심리가 내재/內在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나 다른 종교의 경전 등의 가르침을 힘들여 따르려 하기 보다는 자신의 소원을 잘 들어주는 우상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가령 초행길을 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곳에서 소원이나 생각을 이루기 위해서, 또는 그곳 사람들로부터 행패를 당하지 않도록, 마을 입구에 있는 성황당의 돌무더기에 돌을 하나 올려놓고 기도하는 전통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 주변에도 가지 각색의 이런 불안해소나 소원성취를 위해서 우상숭배의 밑자락을 깔아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편한 진실이라 생각되는 것 중 하나는, 일부 유명한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교회 활동에 광적/狂的인 열정을 보이는 것에는, 기독교의 인격적인 하나님 신앙 때문이라기보다는, 매우 주술적인 우상숭배 현상이 가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주일 성수나 십일조를 내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과 힘을 얻는다고 말하는 경우가 그런 현상입니다. 성황당의 돌무더기에 돌 한 개를 올려놓는, 이름만 다른 우상숭배 현상이라고 말입니다.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이 크게 눈을 떠야할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코 새긴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것만이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에 온 힘을 쓰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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