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839(2025. 7. 29. 화요일).

시편 132:1-3.

찬송 9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텅 빈 방안에 있다. 여기서 텅 빈 방은 마음속을 말한다. 허실생백/虛室生白, 장자는 텅 빈 방이 태양을 낳는다.’고 했고, 낙출허/樂出虛, ‘텅 빈 것에서 즐거움이 나온다.’고도 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예부터 청빈/淸貧의 삶을 으뜸으로 삼았다.” 윤재근, 살아가는 지혜는 가정에서 배운다, p.125.

 

2. “조롱당하신 예수(63-65)”의회 법정에 서신 예수(66-71)”을 읽었습니다. 구치소에 수감된 피의자를 찾아가 면회하는 일이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장면을 방청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제 글을 읽고 계실 묵상식구들 중에는 평생 이런 일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 지인은 그 경험을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할 수 있게 제게 요청했습니다. 서울 중앙지검 법정에는 수많은 재판장/裁判場이 있었고, 하루 종일 재판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제가 방청석에 앉았을 때는 재판 시간 보다 10여분 앞선 때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 그 재판을 방청하게 된 것입니다. 탈북민들 사이에 벌어진 살인 사건에 대한 재판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비록 지인의 재판은 아니었지만, 재판장의 징역 7년을 선고한다.”는 삼엄한 선고가 내려지는 순간에 온 장내는 소름끼치는 전율이 흐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제 자신의 재판이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느낌이 지금도 여전히 솟아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경험은 충분히 유익한 시간이었다 생각하곤 합니다. 죄를 지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각성의 시간이었고, 만인에게 평등한 법치주의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인식과 함께, 비록 재판이 강제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개과천선할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깨달음을 얻는 기회였으니 말입니다. 이런 재판장에 우리 주님께서 끌려가 서 계신 것입니다. 주님이 받으신 심문은 이랬습니다. “그대가 그리스도인가?”란 물음에 내가 그렇다고 말해도 너희는 믿지 않을 것이며, 내가 물어보아도 너희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들에게 대답하자, 모든 심문은 급물살을 탔고 종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심문에서 드러난 진술, 그리스도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신 말씀 중, “내가 물어보아도 너희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는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피고로 잡혀온 주님께서 심문하는 유대종교 지도자들에게 되묻고 싶은 말씀이 있었다는 것이며, 주님은 그들이 그 질문에 대답을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주님께서 묻고 싶어 했던 말씀은 무엇일까요? 그들이 던졌던 질문, “네가 그리스도냐?”란 질문에서 힌트를 주고 있다 생각합니다. 그들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궁금해 하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하는 물음이 진실한 것이었느냐는 것일 수 있습니다. 혹자는 다윗과 같은 강력한 군주로 로마의 세력을 무찌를 수 있는 능력자인지 여부로 식별하려고 했다는 주장을 들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나 제나 하나님이 창조주요, 세상의 주인이시라는 기본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예수님의 행적에서 메시아 곧 그리스도 되심을 찾으려 했을 것이라는 점에 주목했어야 했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구원하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는 기본적으로 평화의 홀을 들고 있느냐를 살폈어야 했다고 말입니다. 갈릴리 호수 주변을 거니시며 산상수훈을 말씀하실 때, 배고프고 병든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돌보시던 그 인자한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그리고 일시적인 왕권으로 힘자랑을 하는 게 아니라, 영원한 평화의 세상을 만들려 뚜벅 뚜벅 걸어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화육/化肉하신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궁금해 했어야 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물으셨을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를 아느냐?” 고 말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본 사람은 니고데모와 자신의 무덤을 내어 준 아리마대 사람 요셉뿐이었다고 성경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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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38(2025. 7. 28. 월요일).

시편 131:1-3.

찬송 36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김씨는 53년을 해로/偕老하다, 지난해에 남편을 여의고 첫 기일/忌日을 맞게 되었다. 며느리가 밤 9시에 제상을 차리려고 하자 김씨는 제사상은 자시/子時에 차려야 한다고 주의 주었다. 그러자 맏아들이 아버지 때는 자시에 제사를 모셨지만 이제는 저녁 9시경에 모셨으면 싶습니다.’ 9시경이라면 술시/戌時냐 해시/亥時? 자시는 밤 11시에서 1시 사이이다. 김씨는 오늘이 어제가 되고 내일이 오늘이 되는 자시에 조상을 뵙는 것이라고 새기고 있었다. 상차림은 계속되었고, 아들은 서툰 붓글씨로 지방/紙榜을 썼다. ‘아버님, 뵙고 싶습니다.’ 김씨가 물었다. ‘신주/神主는 본래 현고학생모모신위라고 해야 하는 것 아니냐?’ ‘저는 아버님을 뵙고 싶은 심정이 절실하지, 옛 형식에 매달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 다음날 김씨는 이래도 되는 거냐며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내 친구의 미망인에게 망자가 훨씬 기뻐할 거라.’는 말을 전해 주었다. 제례/祭禮는 형식보다 정성이 훨씬 더 중요한 까닭이다.”

윤재근, 살아가는 지혜는 가정에서 배운다. pp.225-6.

 

2.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52-62)”을 읽었습니다. 자신의 명령을 따라 목숨을 걸고 실행에 옮긴 부하들에게 내가 언제 그런 명령을 내렸느냐고 오리발을 내민다면, 여러분은 그 부하의 심정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6.25 사변때 일어났던 실화입니다. 50여명의 반공인사들이 트럭에 실리고 있을 때는 저녁노을이 막 지고 있는 때였습니다. 그들 반공인사들은 뒤로 철사 줄에 두 손이 묶여 있었습니다. 어제도 비슷한 인원이 트럭에 실려 갔다가 모두 총살을 당한 터여서 분위기는 살벌했습니다. 그때 지역 인민위원장은 지역 빨갱이로 치과의사였습니다. 그는 험한 말투로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사람이 막 트럭으로 오르려는 찰나, 인민위원장과 눈이 마주친 그 마지막 사람은, 최근 사진기술을 그 위원장에게 몇차례 가르쳤던 인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마지막 간나 새끼, 저 놈을 내 사무실로 끌고 가라우. 내가 취조할 것이 있소.” 그렇게 해서 총살 직전에 살아난 분은 저의 아버지였습니다. 일제가 전쟁에서 패하자, 마을 애국청년회 단장으로 일제 앞잡이들을 몽둥이로 응징했던 일들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눈을 마주친 그 짧은 순간을 평생 두고두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진관을 운영하시던 아버지를 찾아왔던 치과의사는 가끔 과일도 사들고 오셨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와 눈을 마주쳤을 때, 그가 나를 살려줄까? 아니면 부인할까? 마음 졸였다 하셨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5사단이 주둔하게 되었고, 지역 빨갱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했습니다.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을 베드로는 어땠을까요? 베드로는 자신의 무력함을 탓하며 부인하기에 바빴습니다. 주님은 그의 연약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그날에 벌어질 일들을 예언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이 말씀은 그를 고발하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용서의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당당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미국으로 이민을 간 교포가 제게 비난하듯 말했습니다. “어떻게 살인마 전두환에게 맞선 당당한 목사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단 말입니까?” 그래서 제가 한 대답은 남 얘기하듯 말하지 마십시오. 번쩍이는 착검/着劍을 한 병사들이 도열한 그 자리에서 안중근이라면 모를까, 누가 감히 항변을 할 수 있을까요? 그 서슬 퍼런 시절에 숨을 죽이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문은 충분히 받았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또 다시 그런 상황이 재현된다면, 계엄군의 총부리를 붙잡고 부끄러운 줄 알아!” 라며 외치던 젊은 여성처럼 몇이나 할 수 있을까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어찌나 부럽고 대견하던지,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를 비겁하다고, 겁쟁이라고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요? 당해보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말씀은 무슨 뜻이 있습니까? 한 가지 분명했던 사실은, 베드로는 그 누구보다도 주님께 가장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 서 있었다고 말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라고 말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저 멀리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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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36(2025. 7. 26. 토요일).

시편 130:4-6.

찬송 53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 주님, 언제 저 축복받고 사모하던 시간이 오며, 당신이 임재하심으로 저를 채워주시고,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으로 제게 임하여 하시옵니까? 이러한 일이 제게 허락되지 않는 한 저는 완전한 기쁨을 얻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러나 아아, 슬프게도 제안에는 옛 사람이 아직 살아 있사오니(7), 이는 제가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 안에는 아직도 성령에 대적하는 더러운 탐욕이 강하게 살아 있어, 마음의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며 하나님의 평화가 저의 영혼 속에 자리 잡는 것을 방해하고 있사옵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박명곤역), 그리스도를 본받아/요약본, p.181.

 

2. “감람산에서 기도하시다(39-46)”잡히신 예수(47-51)”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 단락입니다. 요즘은 잊혀진 이름처럼 되어버렸습니다만, 제가 목회를 시작하던 70년대에는 산/기도라는 용어가 교회 안에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제가 처음 갔던 기도원의 이름은 구덕산 기도원이었고, 몇 번 갔었는데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양산의 감림산 기도원을 여러 번 찾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와서는 가평의 한얼산 기도원을 몇 차례 갔던 기억이 납니다. 한얼산 기도원은 주초/週初가 되면 기도하러 온 기도자들로 대단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많이 간 곳은 청계산 기도원과 연천의 밀알 기도원 그리고 가장 많이 갔던 곳은 오산리 최자실 기념 기도원이었습니다. 마음으로는 기도하고 싶은데, 도무지 오랫동안 앉아서 기도할 절실함이 없어서 찾았던 곳인데,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구경꾼으로 참가하였습니다. 제 마음에 갈급한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설교를 잘 하고 싶은 열망도, 교회를 부흥시켜 보려는 욕망도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남들이 다 한다는 방언기도에 대한 열망은 애당초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저의 산 기도는 90년대가 들어서면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예루살렘 동쪽 능선에 있는 해발 815m의 완만한 산이었는데, 주님은 자주 그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따라나선 제자들에게 주님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시고는 돌을 던지면 닿을 거리 정도 떨어져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습니다. 매우 짧은 기도였다 소개하고 있는데,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거두어 달라는 것이고, 둘째 그러나 당신 자신의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기도는 두 가지 내용이 아니라 한 가지 내용이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면 십자가를 지게 하시려는 처음 계획대로 진행하시라고 말입니다.

    기도를 마치신 주님이 내려오시면서 제자들을 둘러보았는데, 슬픔에 지쳐 잠들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꾸중하듯 왜 이렇게 잠만 자고 있느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라.”고 말입니다.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기도의 말씀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유혹이라는 커다란 장벽이 가로 막고 있어서, 정작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인지는 말씀도 꺼내지 못하신 것입니다. 40절과 46절에 사용한 유혹이라는 용어 πειρασμος(페이라스모스)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통과하신 마귀의 시험에서 사용했던 바로 그 용어인데, 이 낱말은 파멸을 목적으로 하는 유혹이라는 점에서 매우 무서운 말이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경고하신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유혹에 빠지게 되면 그 다음은 아무것도 기약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마귀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는 한 목사님이 부흥사로 일하다 보면 너무 많은 유혹을 만나게 된다며, 돈과 여자와 명예가 손에 잡힐 듯해서 뿌리치기가 힘들다.”고 알 듯 말 듯한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40여 년 전의 아득한 얘기가 떠올랐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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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35(2025. 7. 25. 금요일).

시편 130:1-3.

찬송 48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공자께 물었다.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은 직/이다. 공자는 이렇게 서슴없이 대답했다. 곧아야 인간이지 굽으면 인간이 아니다. 이보다 더 준엄한 심판은 없다. 마음이 곧아야 인간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반드시 곧은 마음을 익히게 해 주어야 한다. 정직하라. 그러면 무서울 것이 없다. 누가 곧은 사람인가? 자기를 속이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정직한사람은 홀로 있을 때 더욱 엄하다.” 윤재근, 살아가는 지혜는 가정에서 배운다, p.118.

 

2. “베드로의 장담(31-38)”을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공관복음서 뿐 아니라, 요한복음서에도 찾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제사장의 사병들에게 붙들려 심문을 받을 때, 멀 찌기 떨어져서 불을 쬐며 구경하던 베드로가 주변 사람들에 의해 제자인 것을 들키게 되었으나, 이를 부인하고 무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일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도 가고 죽을 수도 있다고 장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거칠 것이 없는 듯 호기/豪氣롭게 말을 하곤 했습니다. 문제는 베드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겁쟁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고, 자신이 하는 말의 무게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조옥진 신부는 심리적으로 풀어 본 성서의 인물들이란 책에서, 베드로의 인간됨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매우 다혈질이며 정서적으로는 충동적이고 분별력이 없으며, 성급하고 더구나 열광적이면서 낙천적인 인물이다. 그의 생활 태도는 대체적으로 우유부단하다. 또한 그는 언제나 먼저 질문하고 먼저 답변하여 사도들의 대변자가 될 만큼 외향적이었다. 그리고 그는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정력적이며 강한 성격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이 여린 나약한 감수성을 지닌 감성형이다. 뿐만 아니라 대단히 현세주의적인 욕구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처럼 그는 생각해야 할 때에 입을 열었고, 눈을 뜨고 있어야 할 때에 잠에 떨어졌으며, 조용히 해야 할 때에 행동했고, 감정을 폭발했다가는 곧 조용해지는 천방지축의 다혈질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책망을 듣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런 허풍쟁이 베드로를 인간적이라고 좋아합니다. 베드로처럼 신중하거나 완벽한 사람보다는, 그 정 반대편에 있는 자신 같은 존재를 의식하는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오늘 본문에서 사도들에게 하신 주님의 엉뚱하기까지 한 말씀입니다. 돈 주머니나 식량자루 그리고 여분의 신발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시며, 그때 부족함이 있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었다 대답을 하자, 그러나 지금은 돈주머니도, 식량자루도 가지고 가라시며, 칼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서 가지고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돈주머니를 가지라 하시고, 식량자루도 챙기라 하시며, 심지어 칼을 차고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제가 입주/入住 가정교사를 그만두면서 했던 마지막 수업이 생각났습니다. 돈으로 대학 입학과 돈으로 대학 졸업을 계획하던 그 학생에게, 저는 그 학생이 영원한 보증수표라 믿고 있던 부자 아버지가 세상에 부재중일 시간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것이 부모가 한사코 자식을 가르치려했던 이유라고 말입니다. 보증수표가 없는 세상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자식이 되도록 깊이 염려하셨다고 말입니다. 주님의 마음도 비슷하셨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문제가 없었지만, 주님이 부재중인 세상(?)에서는 챙겨야 할 일들이 많고 많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입니까? 주님께서 부재중인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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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34(2025. 7. 24. 목요일).

시편 129:7-8.

찬송 50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왔누나. 온 곳을 모르면서, 나는 있누나. 누군지도 모르면서, 나는 가누나.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죽누나. 언제 죽을지 모르면서.”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1883-1969)의 시 <인생 수수께끼>의 전문/全文입니다. 철학의 임무는 문제들로 답답해하는 사람들에게 질문/質問이라는 돌멩이를 던져 희망을 품게 하지만, 딱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이 세상이 초월자의 암호로 가득 차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2. “누가 제일 높으냐?(24-27)”제자들이 받을 상(28-30)”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그리 많지는 않지만 성경에도 상/에 관한 말씀들이 있습니다(삼하 19:36, 2:18, 2:12, 11:18, 5:12, 6:1, 10:41, 요이 8, 11:18). 저의 친구 중 한 분은 옛날 왕에게서 받은 선조의 임명장을 신주/神主 모시듯 정성스럽게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상이란 모든 사람들이 흠모하는 삶의 결과물일 것입니다. 나라에 공을 세운 때문에, 부모를 지극정성으로 섬겼다 해서, 학업이 우수하다 모범이 돼서 등등 상을 줍니다. 상을 수여하는 취지는 다양하겠으나,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龜鑑이 되게 해서 본받도록 하려는 뜻일 것입니다. 요즘 초등학교 교사 중에는 전교생에게 학생의 생활에 적합한 이름을 붙여서 상을 주는 분이 있다고 해서 칭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받게 될 상이란, 주님께서 겪으신 많은 시련을 함께 나눈 제자들에 대해서 상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어떤 빼어난 실력이나 공로를 인정해 주는 상이 아니라, 주님의 고난을 묵묵히 함께 겪은 것에 대한 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고난에 오랫동안 어쩌면 끝까지 동참했다는 공로(?)로 상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제자들이 받게 될 상 역시 교육적인 의미를 가진 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의미에서는 가장 값진 상이라 칭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속한 루터교회에서는 매년 독일인 목사 요한 비헤른(Johann Hinrich Wichern, 1808~ 1881)이 시작한 교회와 사회를 연결하는 디아코니아 운동을 기념해서, <요한 비헤른 봉사상>을 수여하곤 합니다. 제가 목회했던 교회에서는 세 분이 이 상을 받게 되었는데, 한 분은 제가 개척한 교회의 권사님이, 그리고 다른 두 분은 제가 마지막으로 목회했던 교회의 장로님과 권사님이 수상의 영예를 누렸습니다. 그분들의 삶을 얘기하는 것은 자랑스럽고 아름답습니다. 25년간을 부산의 국군 보훈병원에서 환자들의 손과 발 노릇을 하신 권사님은, 말끝마다 감사합니다.”고 하셨는데, 오해도 많이 받으셨다 합니다. 온 몸에 통증으로 고통스러운 환자 앞에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 그들을 비웃듯 들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화를 내는 환자에게, 고통을 느끼지 못하면 손마디가 떨어져 나가고, 코가 떨어져 나가는 비극도 오는데, 고통을 느낄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고 대답했다 합니다. 다른 한분은 장로님이신데, 여러 해를 음성의 꽃동네를 섬기신 분으로 30-40명의 봉사자를 모집해서 전세 버스로 그곳을 방문, 필요한 봉사를 하시다, 나중에는 서울 대학병원 자원봉사자(당시 600여명)들의 대표(총회장)로 몇 년을 일하시다가 별세하셨습니다. 그분들은 봉사의 기쁨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당신들보다 더 힘없고 연약한 이들을 위해서 땀과 눈물을 쏟는 행복 말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하늘에서 상이 큼이라.”고 말입니다. 하늘의 상이란 무엇일까요? 기쁨과 감사로 가득한 행복한 삶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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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33(2025. 7. 23. 수요일).

시편 129:4-6.

찬송 16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큰 소리로 그는 다윗의 시편을 노래했다. 흑인 노예인 그는 이스라엘의 승리를 밝고 자유로운 시온을 노래했다. <중략>.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부활한 주 그리스도를 노래 불렀고, 지진의 강한 팔뚝이 한밤에 감옥 문을 부숴 놓았다. 하지만 아, 어떤 거룩한 천사가 이 노예에게 기쁜 복음을 가져다 줄 것인가? 어떤 지진의 강한 팔뚝이 한밤에 그의 감옥 문을 부숴 줄 것인가?” 롱펠로우의 시 <한밤에 노래하는 노예>를 소개드렸습니다. 감옥 안이든 밖이든 노예에게는 도긴개긴인 세상, 그러나 그들에게는 희망의 아침은 언제나 분명했던 것입니다.

 

2. “최후의 만찬(14-23)”을 읽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불후의 명작 <최후의 만찬>은 제가 목회를 시작하던 곳에서부터 마지막 목회지까지 늘 동행하였습니다. 1491-1498년까지 교황 율리오 2세의 명으로 그려졌다는 이 그림은, 가장 예수님답고, 가장 가룟인 유다 닮은 모델을 선정했던 일화는 지금까지 회자/膾炙되고 있습니다. 물론 전설처럼 혹은 신화처럼 내려오는 얘기입니다만, 많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식탁에 앉은 13분의 얼굴에 대해서 고민하던 다빈치는 그 모델을 찾아 나섰던 얘기는 많은 흥미를 더해 줍니다. 전해오는 내용은 이렇습니다. “1491년 교황 율리오 2세는, 새로 지어진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Santa Maria delle Grazie) 성당의 벽화를 그릴 화가로 당시 이태리에서 가장 명성이 높던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불러, 성서 속에 있는 예수의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 광경을 벽화로 그려줄 것을 부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엄선 끝에 1492년 예수의 모습을 상징할 수 있는 깨끗하고 선하게 생긴 19세의 젊은이를 찾은 뒤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6년 동안 예수의 11명 제자 그림을 모두 다 완성한 다빈치는 마지막으로 예수를 배반한 가룟인 유다의 모델을 찾아다니게 되었는데, 다빈치가 가룟인 유다의 모델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게 된 로마의 시장은, 로마의 지하 감옥 속에는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수백 명의 죄수들이 있으니 그곳에서 한번 모델을 찾아보라는 제안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제안을 승낙 한 다빈치는 로마에서 가장 잔인하고 악랄한 살인을 저지른 한 사형수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연행되자, 그는 갑자기 결박을 풀고 다빈치 앞에 무릎을 꿇고, 다빈치에게 계속 자신을 모르겠냐는 질문을 하면서, 재차 또 다시 묻자, 그러자 다빈치는 난 당신 같은 사람을 내 인생에서 만난 적이 없소.’라는 답변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다빈치가 완성한 최후의 만찬의 예수상을 가리키며 저기 저 그림 속에 그려진, 6년 전 예수의 모델이 바로 나였소. 그래도 나를 모르겠소.’ 라고. 했다고 합니다.”

    6년의 세월은 예수의 모델에서 가룟인 유다의 모델로 바뀌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시간은 6년으로 충분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가 사모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게 그려졌습니다. 우리나라 화가 운보 김기창 화백은 <예수의 생애>라는 제목의 30점의 연작화를 발표했는데, 완전히 한국식 복장을 한 예수님의 초상을 그린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만나게 될 예수님은 레오나르도의 예수님일까? 아니면 운보가 그린 구한말의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예수님일까? 그도 아니면 흑인의 모습을 한 아프리카인의 모습일까? 말입니다. 아무튼 이 한 장의 그림 <최후의 만찬>은 제자들의 삶과 신앙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화가의 신학적 해석을 돋보이게 합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좌우에 세 사람씩 2그룹이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양쪽 모두에서 각기 한 그룹씩 만 예수님을 주목하고 있는 반면에, 다른 한 그룹들은 자기들 얘기에 취해 주님은 안중에도 안 보입니다. 그 중요한 순간에도 제자들 중에 절반은 딴청을 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최후의 순간까지도 동상이몽/同床異夢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동상이몽을 주님은 밭에 있는 두 사람 중 하나는 데려감을, 다른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며, 맷돌질 하는 두 여인 중 하나는 데려감을, 다른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24:40-41)이라고 말입니다. 한 식탁애서 밥을 먹었다고, 한 형제자매로 살았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다른 평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마침내 한국 기독교회가 약자가 아니라, 강자들의 편에 서서 일해 왔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고 채수근 상병의 억울한 죽음을 아파하고 보듬는 대신, 흙탕물 속으로 덮으려 했던 시단장 등 지휘부를 편들고 변호했던 일로, 특검의 압색을 받게 된 부끄러운 일입니다. 전두환을 끝까지 각하로 모시며 살았던 김장환목사의 충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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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32(2025. 7. 22. 화요일).

시편 129:1-3.

찬송 41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석 사거리 도로변 한 귀퉁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노파, 오일장도 아닌데, 영하의 추위도 아랑곳없이 벌려놓은 좌판. 도라지, 시금치, 고사리, 마늘. <중략>. 오늘은 고사리가 좋으니 가져가요. 재바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거친 손, 찢기고 할퀸 모진 상흔의 더께. 고속도로 내리막길의 미끄럼 방지 주름 닮은 그 얼굴에, 활짝 피어나는 웃음이, 잣아 드는 석양보다 더 밝다.” 신을소 시인의 <세월>이란 시였습니다. 좌판의 노파가 자신의 모습으로 투영되는 것 같았습니다.

 

2. “예수를 잡아 죽일 음모(1-2)”, “유다의 배반(3-6)” 그리고 유월절 준비(7-13)”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배반/背叛 이라는 말을 사전에서는 신의를 저버리고 돌아섬”, 또는 등지고 나섬이라고 풀이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가룟인 유다가 자신의 스승인 예수님을 배반하고 돌아선 안타까운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룟인 유다라는 사람은 12제자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가장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사람으로 성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 일행의 생활을 맡았던 회계라는 점이 그렇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가장 미워했던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돈을 받고 넘겨줄 모의와 계략을 짜기까지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어떤 배신 혹은 배반을 해왔는지가 새삼스레 궁금해졌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까지 살펴본다면 셀 수 없이 많은 잘못들이 들춰질 것입니다. 그래서 30, 40년 전부터 지금까지 저지른 잘못을 살펴보았습니다. 신학대학원생은 목회 일선에 나갈 이론과 실제를 공부하는 과정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한 성실한 학생이 실습전도사로 제게 찾아 왔습니다. 성품도 지혜도 남다르게 반듯해서 마음을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게 저의 멘토로 배우고 싶습니다.”고 얘기를 해서, 그냥 웃음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저를 비웃고 헐뜯는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문제투성이인 제가 그런 말을 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시간이 해결하리라 생각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신학생이 그 가족과 아주 살뜰하게 지내는 장면을 여러 차례 목격하게 되었고, 그래서 제가 그 뒤론 마음을 접었습니다. 또 한 케이스도 역시 신대원 재학 중인 학생으로 실습을 받던 분이었는데, 훗날 저는 그 분의 목회를 도우며 마지막 여생을 맡기려 했습니다. 그런데 안수를 받고는 살갑게 경청하던 사람이 고집 센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경험 많은 내 의견을 좋아한다더니 무시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접었습니다. 저는 사람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구분 짓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날씨 얘기나 합시다.”

    어쩌면 우리들 인생살이는 배반의 역사로 이루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랑했던 사람을 내치고 돌아서기도 하고, 굳게 믿자던 우정도 헌신짝처럼 내다 버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처럼 마음이 불편하다고, 말이 통하지 않고 달라져버렸다고 날씨 얘기만 하는 사람으로 마음을 접어버립니다. 이런 현상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삶은 다양한 이해관계에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느 노년을 사는 지혜를 가르치는 분은, 세상 모든 사람을 친구로 둘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말했습니다. 친구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속앓이를 많이 하고 산다는 증표라고 합니다. 가끔 안부를 물어볼 사람으로 한 둘이면 충분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늘어놓기 잘하고, 허풍을 떠는 그런 목사들을 싹둑 잘라버렸습니다. 부산에서 서울로 목회지를 옮기고, 대학로에서 연극 한편을 보게 되었는데,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의 배반의 역사를 변호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짠했던 스토리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예수님의 제자가 된 유다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믿는 행동가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은 자신의 이상과 너무도 닮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연인인 막달레나 마리아를 예수님께 양보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를 척결하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당찬 꿈이 아니라, 보이지도 않는 천국을 선전하는 고리타분한 전도자에 불과했다고 말입니다. 배반할 필요충분조건을 갖췄다 확신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배반의 역사를 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야 숨을 쉬고 산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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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831(2025. 7. 21. 월요일).

시편 128:4-6.

찬송 44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항구를 향해 갈 것인지 생각하지도 않고 노를 젓는다면, 바람조차 도와주지 않는다.” 로마의 대표적인 철학자 루시우스 A. 세네카(B. C. 4-65 A. D.)가 남긴 말입니다. 인생이라는 항해를 떠나는 젊은이들이 반드시 귀담아 들어야 할 경구/警句입니다. 그러나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 말이 귀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2. “무화과나무의 비유(29-33)”깨어 기도하여라(34-36)”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세상 끝날에 대한 관심은 나이를 먹어봐야 알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젊은 시절에 힘까지 줘가며 천국이나 종말이니 하며 얘기하는 것들은 빈말이거나 허세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절박함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하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팔십이 되고 보니까 어떤 분이 신문을 읽으면 가장 먼저 찾아보는 곳이 부고란/訃告欗 이라던 얘기가 실감이 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순간순간 자신의 죽음을 여러 가지 각도에서 생각하게 된다는 말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하신 말씀, 무화과나무나 모든 나무들을 비유로 하신 말씀은 너무 평범하고 일상적이어서 거의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인데, 마치 나이 들어 신문의 부고 란을 챙겨보듯, 이 말씀에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봄이 되면 연초록 잎이 돋아나고 돌아서면 여름이 성큼 다가온 것을 알게 된다고 말입니다. 시간이 속절없이 다가섰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세월의 무상함이 우리들의 삶을 동여매고 제 멋대로 끌고 가는 것 같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 곧 젊은 날에는 뜻도 모르고 주절대던 그 마지막 날이 다가 서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분명히 말한다.”는 단서를 붙이시고, “이 세대가 없어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고 단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곤 이를 보증하듯, “하늘과 땅이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대가 없어지기 전에”, 개역개정판에서는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라고 조금 다른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종말 이해는 성경 안에서도 여러 가지 주장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임박한 종말론이 가장 유력하고 확실한 것으로, 우리들 각각의 인생이 그 삶을 마치는 날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삶이 끝이 나는 그 순간이 종말이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지당한 주장입니까? 세상을 생각하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강조하는 바로 그 사람이 죽게 된다면, 다른 모든 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가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은 후 수 억년이 흐른다 해도, 그게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각인이 세상 생활을 멈추는 날, 세상에서 일어날 모든 일들은 멈추게 마련입니다. 이런 주장은 마태복음서와 마가복음서에서 강조합니다(9:1). 두 번째는 미래적 종말론입니다. 온 세상이 언젠가는 다 멈추게 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우주적인 파국의 날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종말입니다. 이 미래적인 종말 후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서가 강조하는 종말론입니다(21:9). 세 번째는 실현된 종말론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임박한 종말도, 미래적 종말도 오기 전에, 진정한 삶의 의미와 목적에 눈을 뜨고 잠깐 씩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며 살아가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실존적인 삶의 의미와 목적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인데 주로 요한복음서의 강조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12:45). 무화과나무 비유가 암시하는 것은 미래적 종말론이었습니다.

 

3. 요즘 나눔의 기쁨이 채움보다 훨씬 큼을 배우고 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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