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839호(2025. 7. 29. 화요일).
시편 132:1-3.
찬송 9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텅 빈 방안에 있다. 여기서 텅 빈 방은 마음속을 말한다. 허실생백/虛室生白, 장자는 ‘텅 빈 방이 태양을 낳는다.’고 했고, 낙출허/樂出虛, ‘텅 빈 것에서 즐거움이 나온다.’고도 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예부터 청빈/淸貧의 삶을 으뜸으로 삼았다.” 윤재근, 살아가는 지혜는 가정에서 배운다, p.125.
2. “조롱당하신 예수(63-65절)”과 “의회 법정에 서신 예수(66-71절)”을 읽었습니다. 구치소에 수감된 피의자를 찾아가 면회하는 일이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장면을 방청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제 글을 읽고 계실 묵상식구들 중에는 평생 이런 일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 지인은 그 경험을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할 수 있게 제게 요청했습니다. 서울 중앙지검 법정에는 수많은 재판장/裁判場이 있었고, 하루 종일 재판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제가 방청석에 앉았을 때는 재판 시간 보다 10여분 앞선 때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 그 재판을 방청하게 된 것입니다. 탈북민들 사이에 벌어진 살인 사건에 대한 재판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비록 지인의 재판은 아니었지만, 재판장의 “징역 7년을 선고한다.”는 삼엄한 선고가 내려지는 순간에 온 장내는 소름끼치는 전율이 흐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제 자신의 재판이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느낌이 지금도 여전히 솟아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경험은 충분히 유익한 시간이었다 생각하곤 합니다. 죄를 지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각성의 시간이었고, 만인에게 평등한 법치주의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인식과 함께, 비록 재판이 강제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개과천선할 또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깨달음을 얻는 기회였으니 말입니다. 이런 재판장에 우리 주님께서 끌려가 서 계신 것입니다. 주님이 받으신 심문은 이랬습니다. “그대가 그리스도인가?”란 물음에 “내가 그렇다고 말해도 너희는 믿지 않을 것이며, 내가 물어보아도 너희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들에게 대답하자, 모든 심문은 급물살을 탔고 종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심문에서 드러난 진술, 그리스도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신 말씀 중, “내가 물어보아도 너희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는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피고로 잡혀온 주님께서 심문하는 유대종교 지도자들에게 되묻고 싶은 말씀이 있었다는 것이며, 주님은 그들이 그 질문에 대답을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주님께서 묻고 싶어 했던 말씀은 무엇일까요? 그들이 던졌던 질문, “네가 그리스도냐?”란 질문에서 힌트를 주고 있다 생각합니다. 그들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궁금해 하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하는 물음이 진실한 것이었느냐는 것일 수 있습니다. 혹자는 다윗과 같은 강력한 군주로 로마의 세력을 무찌를 수 있는 능력자인지 여부로 식별하려고 했다는 주장을 들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나 제나 하나님이 창조주요, 세상의 주인이시라는 기본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예수님의 행적에서 메시아 곧 그리스도 되심을 찾으려 했을 것이라는 점에 주목했어야 했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구원하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는 기본적으로 평화의 홀을 들고 있느냐를 살폈어야 했다고 말입니다. 갈릴리 호수 주변을 거니시며 산상수훈을 말씀하실 때, 배고프고 병든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며 돌보시던 그 인자한 모습을 바라보았을 때, 그리고 일시적인 왕권으로 힘자랑을 하는 게 아니라, 영원한 평화의 세상을 만들려 뚜벅 뚜벅 걸어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화육/化肉하신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궁금해 했어야 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물으셨을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를 아느냐?” 고 말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아본 사람은 니고데모와 자신의 무덤을 내어 준 아리마대 사람 요셉뿐이었다고 성경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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