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390(2024. 5. 6. 월요일).

시편 시 64:1-4.

찬송 1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세상 사람들 중에서 유독 복이라는 말을 많이 그리고 자주 사용하는 민족은 중국인과 한국인이 아닌가 합니다. 제가 중국 선교를 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선물 둘은 복/자를 천에 수를 놓은 글귀였습니다. 복이란 밖으로부터 우리의 삶으로 들어오는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별의 별 모양의 복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되다거나(5:3),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6:20)에 관심을 쏟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내적이고 인격적인 상황을, 가난하다는 말은 삶의 외적 형편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서가 말하고자 하는 심령이 가난하라는 의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사람, 곧 하나님의 도움이나 은총이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교만한 사람을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그런 대표적인 이야기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라는 유명한 예수님의 비유입니다(18:9-14). 바리새인과 세리는 모두 자기 자신을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자신의 장점들을 자랑스럽게 남김없이 열거합니다. 그런데 세리는 자신의 단점을 부끄럽게 여기며 기도드립니다. 대부분의 자랑쟁이에게서 발견하는 내용은 자기 자랑이 넘쳐 남을 무시하고 경멸하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 금물들입니다. 그러나 세리는 숨을 죽이고 작은 소리로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고해하듯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더 사랑하시고 복을 주실까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박성완, 24.5.5.

    ‘천국은 영광스러운 복지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로, 사람들은 그분의 자녀답게 처신하는 그런 영역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이며, 그 나라의 참된 시민이다. 그보다 더 큰 축복이란 있을 수 없다. 그 축복이 지금 그들의 것이다. 다음 세상에서 만이 아니고, 여기에서 지금 사람의 마음이 바쳐진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한다.’ 로버트 슐러, [현대인을 위한 팔복과 십계명], p.45.

 

2. “희년에 관한 법(35-55)”을 읽었습니다. 희년이란 히브리어로 요벨(Yobel)로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50년마다 돌아오는 해인데, 이 해가 되면 유대인들은 유일신 야훼가 가나안 땅에서 나누어 준 자기 가족의 땅으로 돌아가고 땅은 쉬게 한다. 희년은 710일 속죄일에 선포되었습니다(레위기, 25:8-10). 오늘 본문에 나타난 희년의 정신은 가난하게 살게 된 자기 민족을 구제하고 자립을 도울 수 있는 사회제도로, 돈이나 양식을 빌릴 경우에 세나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하고, 양식도 장리로 꾸어주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근본정신은 그들이 남의 나라 이집트에서 종살이 했던 과거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렵게 된 동족을 종이나 노예처럼 부리지 못하고 식객처럼 살게 하고 일을 시키다가 희년이 되면 그의 자식들과 함께 자기 지파를 찾아가도록 도와주는 제도였습니다. 지금도 유대인 공동체는 해외에서 이민을 오거나 다른 지방에서 실패하고 찾아온 유대인이 있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유대인 공동체가 그들의 재기/再起를 돕기 위해서 발 벗고 나선다고 하니, 우리 크리스천 공동체도 연구해 볼 과제라고 생각됩니다.

    차제/次第에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희년을 정신을 잘 연구해서 우리들의 실생활에 적용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성경이 지적하는 희년의 구체적인 정신은 집과 노예와 부채면제로 분류해서 살필 수 있습니다. 예나 제나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자신의 집에서 살고 있느냐 여부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재산은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집을 한번 팔면 되물릴 수가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소위 부동산 투기물이 된다는 점에서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일반인의 집은 1년 안이면 무를 수 있고, 레위인의 집은 언제든지 무를 수가 있도록 하였습니다(25:9-34). 그리고 희년이 되면 유대인이 부리던 노예들에게 다 자유를 준다는 것입니다(29:39-41). 마지막으로 삶을 무겁게 하던 부채도 안식년에는 면제해 주도록 하였습니다(15:1-3). 이런 희년의 정신의 밑바탕에는 그들도 무려 430년이라는 이집트에서의 종살이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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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88(2024. 5. 4. 토요일).

시편 시 63:4-7.

찬송 29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거꾸로 보는 것은 마음이 아픈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희망을 떠올리는 방법인지 모른다. 이것을 가르쳐주신 분은 개척교회를 시작하면서 도움을 청했던 부산 개금동의 한 노인정의 회장님이셨다. 첫 번째로 신문을 거꾸로 읽으라 하셨다. 그리고 선생님을 비롯하여 정치가들의 얘기도 거꾸로 읽어보라 하셨다. 그러다 55년도 훌쩍 지난 어느 날 또 한 번 그런 선생님을 만난 것이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의 저자 김 누리 교수다. 왠지 엇박자 놓기를 즐기는 듯한 화법인 그 분의 책은 계속 도발적 언어를 사용하는데도 책을 놓지 않았던 건 다행이었다. 그 책의 여는 주제는 <병든 사회에서 거울보기>라는 주제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198911월 독일에 유학중이던 김 교수는 그 장면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린 거의 유일한 사람으로 자신을 말하며, 그 때 독일이라는 낯선 거울을 마주하게 되었다 합니다. 냉정한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인데, 그때 우리 사회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한다. 살인적인 경쟁, 승자 독식의 정글 속에서, “그동안 정상이라고 생각해 온 많은 것들이 혹시 비정상은 아닌가 하는 회의를 갖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독일이라는 낯선 거울로 본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에 대한 왜곡현상을 꼽고 있고, 다음 하나는 통일에 관한 이해가 우리 한국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진단이었다.                      박 성완, 24. 5. 3.

 

2. “축절들 2(23-44)”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명절들 가운데는 흥미로운 명절도 소개되는데, ‘새해맞이(23-25)’죄 벗는 날(26-32)’ 그리고 초막절(33-44)’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묵상은 세 번째 단락인 초막절입니다.

히브리어로 숙곳(sukkot)이라고 불리는 초막절은 유대인들의 절기 중 가장 기쁜 절기로 속죄일(Day of Atonement) 이후 5일이 지나서 시작된다. 초막절은 일주일 동안 진행되며, 전 세계의 유대인들은 초막을 짓고 그 안에 살면서 광야에서 떠돌던 이스라엘의 역사와 자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한량없는 섭리를 기념한다. 레위기 2334~4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추수의 마지막에 절기를 정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 첫째 날과 마지막 날에 일상적인 업무를 쉬는데, 그 일주일간을 초막에서 지내며 음식으로 제사를 드린다. 절기를 정하신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급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이스라엘 자손대대로 알게 하려하심이다. 고대에 행해졌던 3가지 의식은 물 긷고 따르기, 등 밝히기, 장막 짓기 등이다. 처음 2가지는 성전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성전이 무너진 후 이러한 전통들은 더 이상 관찰되지 않는다. 많은 유대인들이 여전히 초막을 짓고, 최소한 그 안에서 식사를 하면서 숙곳을 기념하고 있다. 나뭇가지나 과일, 예술품 등으로 이곳을 꾸미는 것도 유대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전통 중 하나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초막절의 이면에 놓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숙곳은 기쁨의 절기이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떠돌 때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보다 더 큰 기쁨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안에 있는 그분의 궁극적인 섭리를 받아들인 자들이기 때문이다. 카리스마뉴스에 따르면, 2017106일부터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초막절에는 약 6,000명의 기독교인들이 함께 동참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독일보>, 20171012일자 기사 발췌.

    저는 3.1 절이나, 광복절 그리고 한글날과 개천절 등을 지낼 때마다, 많은 아쉬움을 갖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가다간 그냥 창밖에 태극기를 내다 거는 날 정도로 생각하게 될 우리 후세들을 위해서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 말입니다. 3.1절에는 아이들과 함께 태극기도 만들어 보고, 백범 선생 등 독립 운동을 한 선열들의 얘기를 들려줘야 하며, 광복절에는 가슴이 터지도록 만세를 부르며 얼싸안고 뛰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글날에는 한글 시낭송회를 개최해 보거나 한글을 배우러 외국에서 온 분들을 초대해서 한글 얘기를 나눌 수도 있을 것이고, 개천절에는 단군 신화에 얽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발췌하도록 숙제를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함은 우리의 명절이 우리의 현재의 삶과 무관하지 않음을 일깨우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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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87(2024. 5. 3. 금요일).

시편 시 63:1-3.

찬송 36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마천루 속에 파묻혀 겨우 머리만 내밀고 있는 교회당 종탑을 볼 때면, 겨울엔 너무 춥게 보이고, 봄과 가을엔 너무 헐벗어 보이고, 여름엔 너무 불쌍해 보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골 길을 지나가다가 교회당을 보면 한번 들릴까? 요즘 어떤 기도를 많이 하시냐고 물어볼까? 궁금하기도 했었는데, 요즘엔 왜 우리 교회가 이렇게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을까? 한숨만 나온다. 전국 명소에 낀다는 아산 은행나무 길 옆에는 오래 전에 폐가가 된 교회당이 하나 덜렁 서 있다.

    ‘마을 한쪽에 처음으로 세워졌던 작은 천막교회/ 예수쟁이는 몰아내야 한다면서/ 그 비방/祕方으로 팥죽을 쑤어 예배당 주변을 물들였던 마을 사람들/ 전도사는 며칠을 굶은 채/ 그 안에서 기도만 드리고 있다며 조잘조잘 전해주는/ 내 열 살 또래친구들/ 돈을 주든지 밥을 주라고 졸라대어/ 밥에 돈까지 챙겨 엄마와 함께 찾아갔던 그 예배당/ 몇십 년이 지난 지금/ 화려한 외양을 자랑하는 장엄한 건물/ 자리를 꽉 채운 교인들/ 그런데 정작 우리 믿음의 양식은 어디쯤 와 있을까

    신학을 공부하고 시를 쓰시는 신을소 교수님의 눈가에는 감개무량이 아니라, 화난 무서운 모습으로 보인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은 천막교회도, 장엄한 교회당도 아닐 것이다. 메마른 영혼들의 타는 가슴을 시원하게 적셔줄 믿음의 양식을 찾을 수 없는 까닭이리라.              신을소 시집, [외출, 믿음의 양식], p.56. 박성완, 24.5.2.

 

2. “축절들(1-3)”, “과월절과 무교절(4-8)”, “햇곡식을 바치는 축절(9-14)” 그리고 추수절(15-22)”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햇곡식을 바치는 축절, 오순절에 대해서 묵상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은 유목생활을 하던 분들이었습니다. 적어도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 때까지는 그래왔습니다. 그러니까 일정한 장소에서 생활하는 농경문화와는 달리 풀을 따라 계절을 따라 짐승들을 먹일 풀을 찾아서 이리저리 움직여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바야흐로 가나안 생활을 하게 되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을 것이며, 자신들의 신앙생활에서도 많은 오해와 곡해를 경험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농경생활에 대한 많은 실패와 그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가나안 땅 현지에 살고 있는 토착민들의 생활방식을 답습하게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농경문화를 배운다는 처지에서 관용을 하였지만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그것이 우상숭배인 것을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가령 우리나라에서 전해오는 농경문화가 있는데, 유월 유두라는 행사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선 초기의 성현成俔유두날 수단병水團餠을 마시면서[流頭日 飮水團餠]’라는 작품을 지은 바 있는데, 시간이 흘러 농사짓는 일에 수고하는 머슴과 같은 일꾼들에게 햇보리나 감자로 잔치를 열어 쉬게 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배경은 신앙적인 바탕이 중요하였기에, 첫 곡식을 거둔 후 첫 곡식단을 사제에게 바치게 하였고, 사제는 그 첫 곡식을 야훼 앞에서 좌우, 상하로 흔들어 바치게 하였는데 이를 요제/搖祭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해에 태어난 양 한 마리를 번제/燔祭로 바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제물을 불에 태워서 그 향기를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그리고 제주/祭酒로 포도주 1/4힌을 바치게 했습니다. 참고로 유대인의 제사방법으로는 번제와 요제이외에도 거제/擧祭와 전제/奠祭가 더 있는데, 거제란 제물을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는 의식을 행하는데, 이는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을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되돌려받는 의식으로 제사장 몫으로 드리는 제물을 말하고, 전제란 제물에 피를 뿌리는 의식, 혹은 포도주를 뿌리는 의식을 의미합니다. 이런 복잡하면서도 까다로운 절차의 제사를 드린 것은, 절차 하나 하나에 대한 의미가 있었을 것이며, 이를 부모가 자녀에게 잘 가르쳐 그 의미를 이해하도록 했을 것이나, 그 근본목적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물을 향해 가리키고 있다 하겠습니다. 예수는 모든 율법을 만족시키기 위해 최후의 제물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86(2024. 5. 2. 목요일).

시편 시 62:9-12.

찬송 25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부터 사람들은 넉넉하게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뭔가 부족하고 조금은 약한 삶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조선조에 김종국(1485-1541)10세와 12세에 부모를 다 여의고, 이모부인 조유형(趙有亨)에게서 양육되었다. 1509(중종 4)에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이조정랑·사간·승지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다음 해 기묘사화로 삭탈관직 되어 고양(高陽)에 내려가 팔여거사(八餘居士)라 칭하고, 학문을 닦으며 저술과 후진교육에 전심, 많은 선비들이 문하에 모여들었다. 1540년 병으로 관직을 사퇴하였다가 뒤에 예조·병조·형조의 참판을 지냈다. 조실부모하고 이모부 밑에서 자랐으나, 힘써 학문을 이뤄 대성한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말하길 세상 사람 중에 집을 크고 화려하게 짓고, 거처가 사치스러워 분수에 넘치는 자는 머잖아 화를 당하지 않음이 없다. 작은 집에 거친 옷으로 검소하게 사는 사람이라야 마침내 이름과 지위를 누린다.’ 그 자리에 있던 종실 이종/李鍾이 이렇게 답했다. ‘내 들으니 큰 집을 옥/이라고 하고 작은 집을 사/라 한답니다. /이란 글자를 파자/破字하면 시지/尸至 즉 송장이 이른다는 뜻이 되고요, /자는 쪼개서 읽으면 인길/人吉 곧 사람이 길하다는 뜻이 되지요. 큰 집에 사는 자가 화를 받고, 작은 집에 사는 자가 복을 받는 것이야 괴이할 일이 없습니다.’1).

    부자가 일생의 심력을 다 쏟아 자신 재물을 자손에게 물려주지만 그 재물은 마침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고 마니 안타깝다. 시지인길/尸至 人吉 큰 집에는 시체가 이르고, 작은 집에 살면 사람이 길하다. 부족해야 넉넉하고, 분수에 넘치면 제 몸을 망친다.” 1). 정민 [옛 사람이 건넨 네 글자], p. 24, 26. 박성완, 24.5.1.

 

2.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2(26-37)” 모든 종교는 도덕적인 바탕이 있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부도덕한 종교 비윤리적인 종교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전자는 고등 종교라고 부르고 후자를 하등종교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고등종교는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밝히고, 건강하고 풍성한 삶을 위해서 도덕적이고 건강한 삶을 추구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러나 하등종교는 사람들의 삶을 병들게 하고 피폐하게 만들며, 결국은 불행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대체로 도덕적인 내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술수를 써서 점을 치지 말고, 관자놀이의 머리를 둥글게 깎지 말고, 구레나룻을 밀지 말라. 몸에 먹물로 새기지 말고 등인데, 유대인의 613가지 속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성소를 소중히 여기고 무당이나 점쟁이에게 가서 물어보지 말라는 등 신앙적인 내용도 있습니다. 그 밖에 함께 사는 외국인을 괴롭히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자기 백성처럼 사랑하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은 신앙인으로 거듭나기 전에 한 인간으로써 함께 살아가는 사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으로 지켜야 할 윤리가 필요한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다행스럽게도 신앙인에 대한 높은 도덕적 가치와 태도를 인정해 준다는 점에서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삶이란 그 실제에 대한 평가도 따라야 하겠지만, 소위 죄로부터 자유 하는 일에 있어서는 매우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을 눈떠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경계하는 613가지의 율법을 제대로 지킨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런 형식적인 도덕적 울타리보다도 그것을 지키고 있다는 인간의 내면세계는 그 어떤 율법으로도 규제할 수 없고, 또 그런 율법으로 인간을 고양/高揚 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를 예시하는 것이 로마 가톨릭이 가르치는 이른바 고행성사입니다.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없는 죄가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엄청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백성이 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더 죄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게 진실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현상적인 죄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짓는 은밀한 죄로부터도 해방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할까? 우리 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7:24-45).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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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85(2024. 5. 1. 수요일).

시편 시 63:1-3.

찬송 50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우화에서 많은 깨우침을 받는다. 범브란트 목사는 이런 우화들을 알고 있어서 그 힘든 옥살이를 잘 견뎠는지 모른다. 한번은 해와 달이 싸웠다. 해가 나뭇잎은 초록색이야.’ 라고 말하니까, 달은 아니 은색이야.’ 라고 고집했다. 달이 사람들은 주로 잠만 자지.’ 라고 말하니까, 해가 아니, 사람들은 주로 움직이지.’ 라고 주장했다. 달이 그럼 왜 지구가 이렇게 조용하니?’ 라고 물으니까, 해는 누구한데 그런 소리를 들었니? 지구는 늘 시끄럽단다.’ 라고 말했다. 그렇게 그들이 싸우고 있으려니까, 바람이 나타났다. 그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웃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들 싸우니? 나는 해가 하늘에 떠 있을 때에도 불고, 달이 하늘에 떠 있을 때에도 분단다. 낮에 해가 하늘에 떠 있을 때는 바로 해가 말한 대로야. 지구는 시끄럽고 사람들은 모두들 움직이고, 나뭇잎들은 초록색이야. 그러나 밤이 되어 달이 떠 있을 때에는 모든 게 달라진단다. 사람들은 잠을 자고, 고요함이 온 누리를 다스리고, 잎들은 은빛을 띄게 된단다. 그러다가 구름이 달을 가리게 되면 잎들은 검은 색이 되지. 해 너도, 달 너도 사실을 다 알지는 못하는 구나.” 1).

적어도 50년 전에 유행하던 노래 가운데,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란 노래가 있었습니다.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Before you call him a man?

How many seas must a white dove sail Before she sleeps in the sand?

Yes, and how many times must the cannon balls fly Before they're forever banned?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 in the wind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노래 가사는 매우 평범한 인생얘기인데, 당시에는 젊은 데모대들에 의해 불려서 마치 저항 노래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앞에 소개한 범브란트 목사님의 우화와 이렇게 잘 매치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2).

                                                                1). 범브란트, [새장을 벗어난 새의 이야기], pp.78-79. 2). 박성완, 24. 4. 29.

 

2.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1-18)”을 읽었습니다. 신약학자 알 멘이 엮은 [성서어휘사전/Vocabulary of the Bible] 에 의하면 거룩이라는 낱말은 구약에서 히브리어로 kadosh라고 쓰는데, 가나안에서 기원한 것으로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었다 말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를 구약 학자들은 희랍어로 hagios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kadosh란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는데, 하나는 일반적인 것에서의 분리, 혹은 구별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힘이라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표제어에 대입해 본다면, “거룩한 백성이란 구별된 백성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동안 우리 동양권에서의 거룩이란 의미는 성스럽고 위대하다는 의미로 알려져 왔는데, 성서 언어인 거룩은 이와 사뭇 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서 언어인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에 대해서 묵상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구별된 백성이 되는 길이 되겠습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거룩한 백성의 길을 얘기하는 대목마다, 이 주장과 다른 것들은 정반대의 의미를 부여하면 맞겠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주제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은 야훼께서 모세에게 친히 말씀하는 것들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첫째는 야훼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자기 부모를 경외하는 일이며,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며, 우상에게 절하지도 말고 신상을 만들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까를 먼저 생각해야 하고, 재물을 다 먹지 못했다면 다음 날까지 먹고 사흘째 날에는 불살라버리라 합니다.

둘째는 밭에서 나는 수확이나 과일 등은 가난한 자와 이주 외국인들 위해 적당히 남겨두고 거두어들이는 일이라 합니다.

셋째는 남의 물건을 훔치지도 말고, 동족끼리 속이지도 말로, 야훼의 이름으로 맹세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약한 이웃을 억눌러 빼앗지도 말고, 품삯은 다음 날 아침까지 미루지 말라 하십니다. 장애인들에게 못된 짓을 하지 말라 하십니다.

넷째는 재판할 때는 공평무사하게 해야 하는데, 영세민이라고 두둔하지도 말고, 세력가라고 봐주지 말라 하십니다.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그들의 잘못을 타일러 주어라. 원수를 갚지 말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십니다.

이런 말씀들은 당시나 지금이나 세상과 구별되는 가르침이없습니다. 세상과 다른 세상 속에 사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84(2024. 4. 30. 화요일).

시편 시 62:5-8

찬송 20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바뀔 수 있을까? 나는 말한다. ‘바뀔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바뀔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다 치자. 어린아이 적부터 나가 놀지 않고, 망령된 짓을 하지 않고, 성실하고 단아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사람들이 그에게 너는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니 세상이 너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야.’라고 유혹하였다. 그럴 법한 말이라고 여긴 그가 드디어 입으로는 야비하고 상스러운 말을 내 뱉고, 몸으로는 경박한 행동을 자행하였다. 그와 같이 사흘을 보내고 난 뒤에 그는 기분이 나빠져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 마음은 바꿀 수 없어. 사흘 전에는 내 마음이 무언가로 충만했는데, 사흘 뒤에는 내 마음이 텅 비어버렸어.’ 그러고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익과 욕망을 말하면 기가 꺾이지만, 산림(山林)을 말하면 정신이 맑아지고, 문장을 말하면 마음이 즐거워지며, 도학을 말하면 뜻이 차분해진다. 완산(완산, 전주) 이 씨는 옛 것에 뜻을 두어 물정에 어둡다. 산림과 문장, 도학에 관한 말을 듣거나 좋아할 뿐, 그 나머지 것들은 들으려는 마음이 없다. 설사 듣는다 해도,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는다. 제 타고난 바탕을 오로지 지키고자 애쓰는 사람이리라. 이러한 까닭으로 매미와 귤을 좋아한다. 그의 마음이 드러난 말은 고요하고도 담백하였다.” 1).

    조선 정조 시절의 학자이자 시인이며 산문가인 이덕무(1741-1793)의 소품문의 하나입니다. 이 글은 20, 30대의 자신을 말한 짧은 산문입니다. 젊은 학자 이덕무는 사람은 바뀔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사람은 바꿀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거기다가 요지경을 부리는 것이 사람마음으라고 토로합니다. 마음이 충만했다가 사흘 뒤에는 텅 비어버리는 그런 존재라고 말입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을 매미와 귤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평합니다. 2).

                                               1). 안 대희, 고전산문 산책, pp.164-165. 2). 박 성완, 24. 4. 29.

 

2. “전 국민이 죄를 벗는 날(20-34)”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제사제도를 공부하면서, 죄는 쉽게 짓고 용서받은 것은 매우 힘든 과정을 보고 있습니다.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과 어리석은 생각으로 죄의 수렁에 빠지는 경우는 너무도 비일비재해서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죄에 대해서 너무 무딘 삶을 살고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부터 3,000년 전의 얘기를 읽고 있는 것 또한 얼마나 황당하고 미친 짓인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선배들이 겪었던 삶의 수고로움을 생각한다면, 캄캄한 밤중에 팔을 휘둘러 길을 찾기 보다는 성경말씀이 전해 주고자 하는 의미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 인간에게 걸고 계시는 뜻과 희망에 눈을 뜨는 기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죄악의 힘이 얼마나 가공할 세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말씀과 그 상황에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속죄제를 마친 제사장은 살아 있는 염소를 제물로 바치는 예식이 있는데(20-22). 제사장은 두 손으로 염소의 머리에 안수한 후, 이스라엘 자손을 모든 불의와 범죄를 아뢴 후에 그 염소로 하여금 모든 인간의 불의를 짊어지고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땅으로 내 보내는 것입니다. 모든 제물은 그 자신이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저지른 죄를 대신해서 속죄의 의미로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먹고 마실 것도 없는 광야 한복판으로 내몰려 죽어 쓰러질 때가 온갖 배고픔과 고통을 맛보게 한 것입니다.

    성경이 이런 제사제도를 우리에게 역설하는 것은 죄의 가공할 위력을 일깨워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와 동거하며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죄란 반드시 그 책임과 응분의 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유대인의 성전 행사는 죄로부터 자유하기 위한 제사가 이루어지는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식적이고 형식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행하는 모든 의식과 절차는 큰 의미를 갖지 않은 형식적인 의식이라고 할 수 있으나, 사실은 이런 외형적인 의식의 중요성은 그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광야로 염소를 보낸 후, 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갈 때 입었던 모든 옷을 벗어 버리고, 목욕을 한 다음 다시 옷을 입고 나와 자신과 백성의 번제물을 바치게 됩니다. 제물의 기름기는 제단에서 불사르고 불사른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자기 몸을 씻은 후 진영에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이런저런 유대인의 제사는 죄의 가공할 위력에 맞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훈련시키는 일이면서, 죄 가운데 살면서도 그 죄에 싸워가는 우리들 인생을 주목하게 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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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83(2024. 4. 29. 월요일).

시편 시 62:1-4

찬송 18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섞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놀부같이 사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흥부 같은 사람, 그리고 이도 저도 속내를 알 수 없는 무미무취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끔 저는 제 품에 안겨 저를 올려다보는 강아지의 눈빛에서 감동을 받습니다. ‘왜 이렇게 날 사랑하세요? 정말 감사합니다.’는 눈빛 말입니다. 저는 제 강아지에게 충실합니다. 배고픔과 목마름을 늘 생각해서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고 언제든 밖에 나가 잔디밭에 볼 일을 보겠다면, 추운 한 밤중에도 일어나 문을 열고 닫아 줍니다. 손과 발이 닿지 않는 등과 오금쟁이를 시원하게 긁어주기도 합니다. 아무튼 말 못하는 강아지에게라도 사랑을 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혼자지내는 아산생활에서는 유일한 말벗이니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아무런 대가나 공치사를 기대치 않고 다른 사람들, 특히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참 신기하고 참 별종이다 싶은 사람들입니다. 시간과 돈 그리고 자신의 모든 재능까지 다 털어서 섬기는 사람들을 보면, , 그래도 세상을 아직 괜찮구나! 싶기도 합니다. 그 얘기 한 토막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묻습니다. 당신이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한다고 하는데, 결국은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냐? 세상에 완벽하게 타인을 위한 행동은 없는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다는 얘기죠? 제가 만족스럽고 행복해지면 안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안디와의 만남을 통해서, 캘커타의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이제 저는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 일을 하면서 나는 행복했어! 내가 행복한 걸 왜 부끄러워해야 하는 거지? 일단 내가 행복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내 행복의 분량만큼 내가 사는 세상의 행복이 불어납니다. 인연이 닿아 내 행복이 다른 사람의 행복과 연결될 때면, 그때부터 행복의 합이 달라집니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아니라, 하나 더하기 하나는 셋이 되는 겁니다.’(조병준, [제 친구들과 얘기하실래요?], pp.81-82). 박성완, 24.4.28.

 

2. “전 국민이 죄를 씻는 날(1-19)”을 읽었습니다. 내용을 읽지 않고 표제어만 보고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전 국민이 함께 죄를 씻는 날이라니! 저는 여러분보다는 죄가 많아서 흥분을 넘어 까무러치게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습니다. 어떤 분은 기독교는 죄인이라는 굴레에 씌워서 평생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복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최근 우리는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의 죄에 대한 불감증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급기야는 국민을 대상으로 청력테스트를 하기도 하고, 뻔한 거짓말을 눈 하나 껌뻑하지 않고 저지르고 있습니다. 아마 잘 모르긴 해도 교회의 부패 타락상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서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지 않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경제적으로는 선진국 대열에 올랐다고 기고만장들입니다. 우리는 창 11:1-9의 바벨탑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늘 끝에 닿는 마천루가 바벨탑이었는데, 그게 무너져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죄의 결과는 멸망인 때문입니다.

    전 국민이 죄를 씻는 데에는 지켜야 할 절차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교회 지도자들이 먼저 회개하고 죗값을 치르는 일입니다. 아론의 네 아들 중 엘르아살과 아비후가 야훼가 명하지 않은 향로의 불을 가져온 죄로 죽음을 당한 후에 야훼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론에게 평일에는 지성소에 있는 속죄판 앞으로 나아가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성소에 들어가려면 황소 한 마리를 속죄 제물로, 수양 한 마리를 번제물로 바치라 하십니다. 맨살에 모시 잠방이를 걸치고 모시로 만든 거룩한 옷을 입도록 명하십니다. 그 밖에도 목욕을 한 후 옷을 입어야 하고, 수 염소 두 마리 중 제비뽑아서 한 마리는 야훼를 위해서,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들 귀신)을 위하여 광야로 보내라 명하십니다. 이렇듯 제사장 아론과 그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백성을 위해서, 마지막으로 온 이스라엘 회중을 위해서 속죄제를 절차대로 드릴 것을 명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모든 속죄제는 제사장 자신과 그 가족을 위한 것으로 출발한다는 점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교회 지도자들의 죄가 결코 가볍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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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81(2024. 4. 27. 토요일).

시편 시 61:1-4.

찬송 5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996년도 여름 저의 교회 청년 한 분이 인도의 캘커타 <사랑의 선교회>에서 2주간의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왔다 얘기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음성 꽃동네에서 봉사하는 장로님이 계셔서 신경이 쓰였고, 용미리 시립묘지에 들어서는 야트막한 산자락에 무의탁 노인을 위한 <정원노인 요양원>에서, 목욕봉사를 요청해 와서 10여명의 선한 사마리아 회원들이 9년여 간을 봉사하는 중이어서, 인도엘 봉사활동을 하러 간다고 해서 조금은 사치스러운 여행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조병준의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를 읽으면서, <사랑의 선교회>에 세계 도처에서 모여와 봉사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름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책은 세 번에 걸쳐 약 12개월간 자원봉사를 했던 조병준씨가 만났던 사람들이었으니까 제한된 사람들일 수밖에 없지만 말입니다.

    <사랑의 선교회>를 창립하고 평생 이곳에서 빈민과 죽음에 이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안아 주는 일을 하신 마더 테레사는(1910.8-1997.5) “살아있는 성자라는 호칭을 들었음에도 그의 내면은 번민과 갈등으로 가득했음을 마이클 반 데어 피트 신부에게 털어놓은 자신의 심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 커서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당신이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시사주간 <타임>은 테레사 수녀가 생전에 가까웠던 피트 신부와 주고받은 편지 등을 실은 [마더 테레사-내게 빛이 되어주소서]라는 책이 출간돼 신의 부재를 고민했던 테레사 수녀의 내면세계를 알 수 있게 됐다고 보도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48년 하반기에 쓴 편지에서 외로움을 얘기하면서 제가 얼마나 이 고통을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488월 인도 콜카타 (당시 캘커타) 빈민가에 들어가 봉사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천국과 신의 존재까지도 의심한 테레사 수녀는 그녀의 신앙의 위기를 빈민가에 들어가 봉사함으로 이겨내려고 힘썼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향기 나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이 보여주신 섬김의 삶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나라 열심당 크리스천의 믿음이 얼마나 허세로 뭉쳐있는 것인지 가늠하게 합니다. 박성완. 4.26.

 

2. “야훼 성막을 세워 바치다(18-38)”을 읽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짓도록 오랜 시간 모세로 하여금 준비하게 하였습니다(35-39). 성막은 회막 그리고 성소라고도 불리고 훗날 가나안에 정착하고는 솔로몬에 의해 건축되었을 때는 성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성막을 짓는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주시는 곳으로 인간의 죄로 인해 드려지는 제사를 받으셨던 곳이며, 궁극적으로는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9:23-26). 그래서 성막을 구성하는 여러 기물 중 등대와 등잔은 성막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곧 성막의 등잔에 불이 비치는 동안은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도 로마 가톨릭교회나 정교회 그리고 루터교회와 성공회 등에서는 지켜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고 계시다는 의미는 우리가 드릴 예배가 엄숙하고 장중해야 할 이유를 제공한다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모세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성막을 지었다고 밝힙니다(16).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것은 야훼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대로 되었다.”고 하는 말이 7번 반복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제 마음대로 제 생각대로가 아니라, 야훼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신 대로 순종함으로 성막을 완성했다는 내용입니다.

    예배학을 공부하면서 저는 새로운 많은 것에 눈을 떴습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된 것이 첫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깨닫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기도를 배우고 훈련을 받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예배를 통해서 친교를 배우게 되고 예배를 통해서 기독교 신학을 배우고, 봉사를 배우게 됩니다. 예배는 이렇게 많은 과제들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성도들을 가르치는 목사는 예배의 형식적 의미와 함께 내용에 대해 확실한 이해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부흥회나 전도 집회는 교회 밖에 있는 이들을 교회로 연결지어주는 활동이기 때문에 세속적인 방법이 요구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서는 코미디처럼 가볍거나 열광주의자처럼 광란에 빠지거나 신비주의자처럼 뜬구름 잡는 일체를 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배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때야 하는지를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가르치는 주제처럼 야훼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성막인 우리의 교회를 섬겨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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