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786(2025. 6. 6. 금요일).

시편 119:103-105.

찬송 9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팔방미인이 되려 하지 말라. 탁월함의 결함은 자신을 과용한 결과 오용한 데에 있다. 팔방미인이 되려는 노력은 역겨움을 산다.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은 커다란 불행이지만, 매사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는 것은 더 큰 불행을 낳는다. 그런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얻은 결과 잃게 되고, 처음에 그를 원하던 모든 이의 미움을 사게 된다. 팔방미인은 드문 사람이라고 존경받지 못한다.”

윤문원, 지혜와 평정, p.26.

 

2. “내가 너희의 목자가 되리라(17-31)”을 읽었습니다. 건대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는 곳에 <알 라딘>이 있어서 가끔씩 들리는데, 두 권의 책을 골랐습니다. 하나는 <채근담>이고, 다른 하나는 <죽기 전에 논어를 읽으며, 장자를 꿈꾸며, 맹자를 버려라>는 고전이었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자주 합니다.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길(倫理)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과 순종하는 것은 참 이해하기도 어렵고 실천하기는 더욱 더 힘든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신앙의 삶이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이며, 억지로 실천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길인 윤리의 삶이란 이와는 많이 다른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이해가 되는 일이며, 몸으로 따라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어쩌면 억지로라도 실행에 옮기려고 기를 써야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게 사람으로서 마땅히 그래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얼마나 감사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너희는 나의 양떼이다.”라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 “내가 한 목자를 세워주겠다. 그는 나의 종 다윗이다. 나 야훼가 몸소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나의 종 다윗이 그들의 영도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때문입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살다가 길을 잃을 때는 우리에게 보내신 목자에게 길을 묻고, 힘들고 괴로우면 우리의 하나님께 맡기면 되니까 말입니다. 더 이상 불안과 두려움에 갇혀 떨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다만 그날그날, 그날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나 둘 하며 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엊그제는 앞집의 내외분이 장대 톱을 들고 작업 모자와 장갑을 끼고 찾아오셨습니다. 저의 집과 당신들의 집 경계에 심어놓은 보리수나무가 가지가 찢어질 정도로 열매를 맺었는데 그게 빨갛게 익으면 하나 둘 자기 집으로 떨어지는데, 제가 방치하고 있어서 뒷 마당이 붉게 물들어 치우는 게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며칠 전에 가지치기를 해 주고 싶다 제안을 해 왔습니다. 요즘은 제가 채전과 나무 돌보기에 힘들어 하는 것을 알고 그리한 것입니다. 두 내외가 열심히 땀 흘려서 시원하게 잘라버렸습니다. 우리는 일을 마친 후 테라스의 탁자에 앉아 살아가는 얘기를 나눴습니다. 제가 17년째 살고 있다 말하니까, 자신들도 이곳에 오래 살고 싶다며 그래서 태양광 시설을 설치했다 말해 주었습니다. 그 날의 차담/茶啖은 좋은 이웃들 속에서 살아가는 행복한 삶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가끔은 앞뒷집이 서로 안부를 물어보는 것이고, 오늘처럼 사과 몇 알들고 찾아와 주는 일이며, 소소한 일상이나 걱정거리를 나누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교회나 절 등을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서도, 제가 목사라고 가끔씩 찾아와 인생 상담도 청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등 말동무를 해 주는 분들입니다. 좋은 이웃은 작은 관심과 배려만으로도 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로버트 브라우닝은 <피파의 노래>에서 마지막 구절에서 행복을 아침 중에서도 일곱 시, 언덕엔 이슬방울 진주처럼 맺히고, 종달새는 높이 날고, 달팽이는 가시나무 위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니, 세상은 평화롭구나!”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자연과 함께 제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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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85(2025. 6. 5. 목요일).

시편 119:100-102.

찬송 48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채근담/ 菜根譚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일이 조금이라도 뜻에 어긋날 때는, 곧 나만 못한 사람을 생각하라. 그러면 원망이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마음이 조금이라도 게을러질 때는, 곧 나보다 나은 사람을 생각하라. 그러면 정신이 저절로 분발하게 된다.”

 

2. “책임은 개인에게(1-4)”을 읽었습니다. 어느 교파 신학교에 박사학위를 취득하려고 여러 외국 신학교를 전전했던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분과 가까운 지인에 의하면, 그분은 성품도 온순하고 학식도 풍부했는데, 한 가지 결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자신을 지도하는 지도교수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 분의 제자로 공부하고 학위 논문이 통과되기까지는 지도교수의 뜻을 따라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동양에는 연좌제라는 무서운 벌이 있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진()나라 문공(文公) 20(주전 230년 경)에 처음으로 삼족(三族)에게 연좌 형을 행하고, 그 뒤 한나라 초에도 이삼족법(夷三族法)’이 있었는데, 삼족은 부모·처자·형제를 뜻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보다는 약 360년 전인 에스겔 시대에도 이미 아비가 설익은 포도를 먹으면 아이들의 이가 시큼해진다.”는 속담이 널리 회자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동서양이 잘못의 책임을 한 가족에게 3족까지 묻는 잔인한 법이 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예언자는 이런 잘못된 법에 맞서는 하나님의 법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잘못이 자녀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책임은 해당되는 개인이 짊어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은 다시는 이런 속담을 말하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며,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분명히 밝히며, 아들의 목숨이나 아비의 목숨도 하나님께 달려 있으며, 죄 지은 장본인 외에는 아무도 죽을 까닭이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잘못을 남의 탓인 양 전가하는 것은 어떨까요? 가령 소위 조상 탓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말입니다. 이 또한 어리석은 일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해서 죄책감과 죄 값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차제에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느 선배 목사님의 얘기였습니다. 봄 대심방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권사님이 자신의 집을 꼭 방문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늘 바쁘게 산다는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도회를 마친 후 다과를 들면서 그 남편에게 교회에 나오실 것을 권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남편은 자신은 매 주일 교회에 갔었다고 하더랍니다. 이 선배 목사님은 주일 예배에서 뵌 적이 없었다며 어느 쪽에 앉으셨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머리를 긁으면서 사실은 교회당에는 들어가지 않고, 골프장에 가면서 아내를 교회 정문에서 내려주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교회에 나오신 것이 아니라고 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이 세상에서 제가 아내를 가장 사랑하는 줄 아내도 알고 있는데, 날 두고서 혼자서 천국에 가겠습니까? 아내의 옷자락을 잡고서라도 함께 갈 생각입니다.” 라고 너스레를 떨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말했다 합니다. “천국에는 아내의 치맛자락을 잡고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선생님의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교회에 오셔야 배울 수 있습니다.”고 대답했다 합니다. 그렇습니다. 부모의 잘못에 대해서 자녀가 죗값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해당자가 받는 것이며, 다른 누구의 손목을 잡고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으로 갈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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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84(2025. 6. 4. 수요일).

시편 119:97-99.

찬송 7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범선의 <오발탄>에 나오는 한 구절. “양심이요? 양심이란 손끝의 가시입니다. 빼어버리면 아무렇지도 않는데, 공연히 그냥 두고 건드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거야요. 윤리요? 그건 나이롱 빤쯔같은 것이죠. 입으나 마나 불알이 덜렁 비쳐 보이기는 매한가지요. 관습이요? 그건 소녀의 머리에 달린 리봉이라고 할까요? 있으면 예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없대서 뭐 별일도 없어요. 벌률? 그건 마치 허수아비 같은 것입니다. 허수아비. 덜 굳은 바가지에 다 되는대로 눈과 코를 그리고 수염만 크게 그린 허수아비. 누더기를 걸치고 팔을 쩍 벌리고 서 있는 허수아비. 참새들을 향해서는 그것이 제법 공갈이 되지요. 그러나 까마귀쯤만 돼도 벌써 무서워하지 않아요.” 자신을 조물주의 오발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2. “심판과 회복(14-25)”을 읽었습니다. 어리석은 우리 인간들은 보통이라든지 보편적이 라든지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주 오래 전부터 성골과 진골을 가리려고 발가락을 세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리석은 도토리 키 재기는 지금도 변함없다는 것이 마음 아픈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전체적인 바탕에 참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진짜 이스라엘은 누군지 따져보자는 흐름이 깔려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잡혀간 사람들보다는 끌려가지 않고 예루살렘과 유다 땅에 남아 있는 자들이 참 이스라엘이라는 이른바 정신 승리감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8-11장의 내용은 예레미야 3324절 이하의 말씀과 너무 닮았음을 지적하는데, 그 중심점에는 유다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간 동족들과 빨리 절연하고 있는 점을 들고 있는데, 결국은 그들이 남기고 간의 주인은 자신들이라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다 망해가는 판국에도 어리석은 인간들은 땅의 소유권을 두고 열불을 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15절에는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그 땅의 적법한 소유자임을 자처하면서, 끌려간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자라는 씻을 수 없는 자만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이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라 하더라도,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란 더러운 이방인의 땅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람들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야훼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서 회복의 약속을 하고 계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마치 하나님과 약속의 땅을 통째로 잃어버린 사람들이 옛 소유를 다시 찾게 될 것이며, 하나님과 맺는 완전한 계약 공동체가 회복도리라고 말입니다(17-18). 훗날 이사야 56-66장에서 포로민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을 때, 이 하나님의 결정을 관철시키려는 투쟁은 바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삶에서 자주 경험하는 여러 종류의 실패와 고난인 하나님의 심판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서 깊은 성찰과 반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욕심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마음을 바꾸어 새 마음이 일어나도록, 그리고 몸에 박혀 있는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피가 통하는 마음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죽은 자나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마음을 건강한 생명이 살아 움직이는 본래의 생명체가 되도록 바꾸기 위함이었다고 말입니다. 이를 가장 확실한 말로 회개라 할 수 있는데, 회개는 완전히 정반대의 방향으로 삶을 돌이키는 것을 의미하는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분명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들이나, 본토에 남아 있는 자들이나 할 것 없이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대신해서 헛된 우상에 미쳐 날뛰던 옛 생활을 청산해야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느 대선 후보로 나올 뻔 한 후보의 부인이 인터뷰한 내용이 오늘의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처럼 보여서 아연실색하였습니다. “답답하고 괴로울 때는 점쟁이나 무당들을 찾을 수밖에 다른 길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역술도 배우고, 손금도 배우고, 필요하다는 모든 것들을 배웠습니다.”고 말입니다. ! 그랬었구나! 어찌하여 장로나 목사 중에서도 점쟁이를 많이 찾아가는 이들이 있다는 그 답답한 심정들을 말입니다. 어제 정기 검진일이어서 건대병원을 다녀오는데, 놀랍게도 대학가에 가장 많은 것이 점술사와 타투 집들이었습니다. 장래운, 애정운, 사업운 등 등 궁금증이 수도 없이 많은데, 누구도 귀띔조차 해 주지 않으니, 얼마나 괴로울 것입니까? 그래서 도서관 보다는 그런 한 평짜리 점술사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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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83(2025. 6. 3. 화요일).

시편 119:94-96.

찬송 48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종종 하나님을 대신해서 심판자 역할을 하곤 합니다. 참으로 바보 같은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는 게 옳습니다. 총신대학교의 교훈이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라고 하는데, 저는 학자가 되라. 신자가 되라. 인간이 되라.”로 고치는 게 좋겠다 싶습니다. 인간이 되는 게 우리가 힘쓸 일인 때문입니다.

 

2. “끝이 가까이 왔다(10-15)”을 읽었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끝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기도 하고, 아쉬움을 갖기도 합니다. 기대 밖의 결과를 거둘까 두렵고 아쉬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마지막 날, 그 끝날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보아라. 그날이 왔다. 이제 될 대로 되었다.”고 말입니다. 유명한 스페인 노래 <케세라세라>가 생각났습니다. Que Será, Será는 스페인어로, “될 대로 될 것이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자조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로가 아니라, 처음부터 되기로 한 대로 될 것이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로마서 주석이 끝나는 날 책거리로 이 노래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곤 했습니다. “When I was just a little girl, I asked my mother, What will I be? Will I be pretty? Will I be rich? Here's what she said to me.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The future's not ours to see. Que sera, sera, Whatever will be, will be.” 부정부패가 기승을 부리고, 거만한 자들이 활개를 치며, 폭력배가 학정을 펴고 있으니 망할 때가 되고야 만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뿐이라고 말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제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절망과 슬픔은 오래 전에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너무 억울하다거나,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기로 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중적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현세적인 심판입니다. 우리가 땅 위에서 살면서 겪게 되는 심판인데, 그것은 염병과 같은 무서운 질병이며, 기근과 같은 재난이며, 나라 안에서 그리고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으로 많은 생명들이 쓰러져 죽게 되는 일들입니다. 그밖에도 지진과 가뭄 그리고 기후 위기 등이 차례차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고대 이탈리아의 도시 폼페이를 잿더미로 만든 서기 79년의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 현장을 찾았던 적이 있습니다. 갑작스런 화산의 폭발로 사람들은 뜨거운 화산재에 묻혀서 산채로 화석이 되어 있었습니다.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도 화석으로 죽어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폼페이는 포장된 길로 마차가 다니는 현대 도시였고, 상수도관이 집집마다 연결되어 있었고 현대식 사우나 목욕탕도 있었습니다. 문명화된 도시였으나, 많은 집들의 벽에는 넘쳐도 한참 넘친 춘화/春畫들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주후 79년에는 아직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되지 않아서, 교회당 건물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서 맞이하게 될 영원한 심판입니다. 노아의 홍수가 온 세상을 물바다를 만들어 엄청난 생명을 죽인 것과 같이, 앞으로 우리 인류가 마주할 재난을 성경은 불에 의한 재앙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지옥을 상징하는 것이 불구덩이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 저주의 날에 누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변호해 주신 하나님의 어린 양 우리 주님을 앞세우고 그 뒤에 서 있는 성도들뿐일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자랑스러운 신앙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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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82(2025. 6. 2. 월요일).

시편 119:91-93.

찬송 6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나태주 시인의 <가족사진>이란 시가 있다. 군대에 갈 아들, 서울로 공부하러 갈 딸,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 가족사진을 찍었다는 얘기. 잔뜩 준비를 해서 웃는 사진을 기대했지만, 찡그린 사진이 되었다. 마지막 연, “떫은 땡감을 씹은 듯, 걸쩍지근한 아내의 얼굴, 가면을 뒤집어 쓴 듯한 나의 얼굴, 그것은 25년 만에 우리가 만든 첫 번째 세상이었다.”

 

2. “예루살렘은 적에게 포위되리라(1-17)”을 읽었습니다. 옛 어른들은 인생의 고개는 끝없이 나타나는 때문에 실망과 좌절에 빠지기도 하지만, 걱정과 근심을 덜어내면서 살면 그런대로 살만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아침에 눈을 뜨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당신 품안에 있습니다.” 뭔가 구체적으로 기도를 드리면, 기도드리지 않은 다른 많은 문제들이 새롭게 걱정거리로 남게 됩니다. 주님 품에 있는 그것으로 모든 문제는 단번에 해결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께서 알아서 다 해결해 주실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순간순간 부딪히는 문제들은 제가 가진 상식과 양심으로 최선을 다해서 결정하고 추진하면서 살아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걱정이란 대부분이 쓸데없는 생각들이고, 근심이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을 미리 끌어당겨서 어두운 소굴에 갇혀 버리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1-3, 4-8, 9-17), 첫째 단락은 예루살렘 성읍의 단면도를 그리게 하는 신탁을 이야기 하고, 둘째 단락에서는 왼쪽으로 누워 북왕국 이스라엘이 190일 동안 죄를 짊어지는 내용을 이야기 하고, 그 수가 차면 오른 쪽으로 누워 남왕국 유다가 40일 동안 죄를 짊어지게 하는데, 그들을 사슬로 묶어 놓아서 이쪽이나 저쪽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밀과 보리 콩 등 여러 가지 곡물을 빻아 빵을 굽게 하는데, 인분/人糞(사람의 똥)으로 구우라 명하는데, 에스겔이 자신이 부정한 일도 하지 않았고, 부정한 짐승을 먹은 적도, 더럽혀진 희생제물을 먹은 적이 없다 항의하자, 하나님께서 인분 대신 쇠똥으로 빵을 굽게 허락하시고, 그 빵을 매일 20세겔씩 물도 매일 육분의 일 힌씩 마시게 명합니다. 세겔은 무게를 측정하는 기본 단위로, 1세겔은 11.5g 정도이며, 힌은 용량을 측정하는 단위로 1힌은 약 3.6L 정도가 됩니다.

    <국제주석>에 소개된 W. 아이히로트의 해석에 의하면, 첫 단락(1-3)은 포위/包圍의 연기/演技 라고 표제어를 붙였고, 둘째 단락(4-8)은 얽매임이라는 표제어를, 셋째 단락(9-17)은 포위의 연기를 표제어로 붙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신탁을 받은 예언자 에스겔은 자기 백성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려고 힘썼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현대 설교가들은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 크게 고민을 하지 않는 듯합니다. 천편일률적으로 대화체나 연설체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벽을 그림으로 그려 보여주고, 그리고 성벽을 허무는데 필요한 쇳덩이의 역할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벽이 원수들에 의해서 포위되는 절박한 운명을 말합니다. 둘째 단락에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190년을, 남왕국 유다가 40년을 형벌의 멍에를 메게 된 것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 본문에는 390년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후대의 편집으로 에집트 노예생활 430년을 연상하게 하는 상징어라는 해석입니다. 390년에 40년을 더하면 430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하려고 하는 주제는 오랜 시간동안 죄의 멍에를 매야 한다는 점입니다. 셋째 단락에서는 성안에 비축한 양식이 부족할 때가 되면, 여러 가지 곡식들을 혼합해서 빵을 만들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이런 혼합물을 금지하는 율법에 의해서(22:9이하, 19:19) 더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빵을 만들게 됨으로 더러움을 가중시키게 됩니다. 이 모든 말씀들을 종합하면,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고생을 하기 전에 그들은 생명의 보루로 굳게 믿고 있었던 예루살렘 성벽이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져 내릴 것인지를 깨닫게 되고,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먹어서는 안 될 더러운 빵을 더러운 방법으로 구워먹게 될 것을 깨닫게 된다는 메시지를 듣게 된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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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80(2025. 5. 31. 토요일).

시편 119:85-87.

찬송 34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 독립기념일에 태어난 미국 제 30대 대통령 캘빈 쿨리지(1872.7-1933.1)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어느 누구든 자신이 받은 것으로 인해 존경받지 않는다. 존경은 자신이 베푼 것에 대한 보답이다.” 여기저기서 받은 각종 상이든, 높은 지위를 받았다고 으스대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역사에 등장시키신 것이다.

 

2.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시다(4-17)”을 읽었습니다. 선지자들의 역할이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요나와 같이 이방인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매우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향해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선지자들의 외침은 대체로 시급하고 절박한 것이었고, 중요한 내용이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들은 백성들의 태도에 상당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점에서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처럼 오늘의 현대 크리스천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얼마나 발버둥을 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미국 교회에서는 설교단에 오르는 목사에게 사탕 하나를 입에 물린다고 합니다. 그 사탕이 다 녹기 전에 설교를 끝내라고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이 보다 더 합니다. 외부 설교자로 가게 되면, 담임목사님이 우리 교회는 설교를 20-30분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참고하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아예 어느 교회에서는 설교가 25분이 되면 조용한 찬송이 반주됩니다. 그러면 목사는 서둘러 마무리를 지어야 합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이 하루 종일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는 것은 고사하고, 설교 시간으로 배정된(?) 30분도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쁘고 중요한 일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장애인 교회 중에서도 청각장애인 교회는 설교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모든 일들을 다 접어둔 분들처럼 느긋하게 여유로운 청강 자세를 가집니다. 제가 항상 우렁찬 박수를 받는 설교단은 청각 장애인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솔직담백하게 에스겔 선지자를 파송하는 이유와 목적을 밝힙니다. 첫째는 귀에 생소/生疏하게 들리는 듯 멀뚱한 사람들이나 외국인에게가 아니라, 들을 마음이 없어서 멋쩍어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보낸다고 말입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황소고집을 뒤집어 쓴 사람들이어서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셋째는 그들은 얼굴이 두꺼운 자들로 반항하는 일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넷째는 포로로 잡혀온 자신의 백성들에게 듣든 말든 이렇게 전하라고 콕 찍어서 말씀합니다. “주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말입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만나를 먹으며 40년을 살았으면서도, 빵으로 대체할 수 없는 생명의 양식을 거부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정신이 번쩍 들 만한 시련의 때 포로가 되어 비참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때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생각과 삶에 감동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납득도 이해도 안 되는 일입니다. 아주 오래 전 풀무원 원경선 원장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욕심을 뽑아내는 일은 하나님조차도 버거워하시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습니다. 10계명을 분류한 희랍정교회 등 기독교회는 9째와 10째 계명으로 탐욕을 꼽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여종을 탐내지 말라.” 그랬습니다. 듣고 싶은 말은 하나님만 바라보라.”가 아니라,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리라.”였던 것입니다. 나이 들어도 여전히 물질의 욕망에서 그리고 권력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노욕/老慾에 찬 사람들이 추한 이유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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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79(2025. 5. 30. 금요일).

시편 119:82-84.

찬송 35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 고든 리빙스턴(1938-2016)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뒤에야 깨닫게 된다. 이 깨달음이 모여 인생의 지도를 만들어 간다.” 존스 홉킨스 의대를 졸업한 후 베트남 전쟁에 군의관으로 참전 후, 미국으로 돌아와 정신과 의사로 33년간 일하는 동안에, 사랑하는 아내와 이혼, 큰 아들의 자살, 둘째 아들은 백혈병으로 자신의 골수이식을 받았으나 1년 만에 죽었다. <너무 빨리 지나가버린,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 책을 출간했다.

 

2.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시다(2:1-3:3)”을 읽었습니다. 신학 대학생이나 신학 대학원생을 입학사정을 할 때, 매우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인터뷰(면접)입니다. 그런데 지원 동기를 묻게 되는데, 많은 학생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다 했습니다. 그 인도함 중에는 여기 저기 다 실패를 경험한 후의 깨달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길로 몰고 가셨다고 말입니다. 이런 학생들의 나중은 대체로 참혹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중에는 매우 극적인 삶을 희망하곤 합니다. 선명한 기도의 응답으로부터, 극적인 반전, 기적 같은 치유경험 등등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런 극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고 대부분이 허세를 부리는 경우들입니다. 한때 종로 2가의 대형서점을 운영했던 한 지인은 우연히 어느 일간지의 <무슨 열매>에 간증기를 연재하게 되었는데, 내놓을 게 없어서 난감해 할 때, 글 쓰는 작가가 한 두 마디 운을 떼시라 해서, “거지 신세가 되었던 적도 있었다.”고 하니까, 한 편의 길고 긴 소설이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제게 남긴 말은 제 얘기는 짜가들이 많습니다.”였습니다. 어려움이 계속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산삼 21뿌리를 보여주셔서 그곳에 가서 캐다가 문제를 해결했다는 일화를 소개하시는 목사님은, 걸핏하면 산삼 환상 얘기를 꺼내십니다. 그래서 제게 그 설교의 모니터링을 부탁받은 저는 그러지 마시라.”고 완곡하게 충고를 드렸습니다. 에스겔은 또렷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목숨을 걸고 예언자의 길을 걸을 수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성경의 인물과 자신을 일체화시키고 싶은 욕망이 낳은 큰 불상사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진위를 가릴 기준이 있습니다. 그걸 에스겔에게서 찾아보고 싶어졌습니다. 에스겔의 경우입니다. 첫째는 성령의 기운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2). 둘째는 하나님께 반항하는 역적의 무리들에게로 파송하신 것입니다(3-5). 셋째로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말씀하셨습니다(6-7). 넷째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만을 들으라 하십니다(8-10). 다섯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먹으라 해서 받아먹자 꿀처럼 달았다. 했습니다(3:1-4). 에스겔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자신에 의한 의지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하심을 밝히고 있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대상들을 향해서 임무를 받았으며, 현실적인 두려움이 있었다는 것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들고 나아갈 때, 놀라운 은총()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꿈꾸는 야망이나 출세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가 되는 시련과 고통 그리고 죽을 수도 있다는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오해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 안에 있으면 만사형통이 정상적이라는 사람들 말입니다. 세상에서 크리스천의 삶의 양식/樣式은 소금과 빛이 되는 일로, 자기희생이 전제된다는 말씀입니다.

 

3. 오늘 서울 주성 청각장애인교회 지도자들을 아산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장애인들을 섬기는 일이 힘든 것은 소통의 문제와 경제적인 열악함이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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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78(2025. 5. 29. 목요일).

시편 119:79-81.

찬송 3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네덜란드 격언에는 이런 말이 있다. “비에 젖은 자는 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비가 내리면 젖지 않으려고 비를 피한다. 그러나 막상 피할 곳도 없고 이미 온 몸이 젖고 나면 비가 전혀 두렵지 않게 된다. 비에 젖듯 우리 삶도 막상 젖으면 두렵지 않게 된다. 고통이나 시련도 마찬가지이다. 처음 한동안은 못 견디게 힘들지만, 그 과정을 겪은 후에는 더 이상 두려움도 아픔도 느끼지 않게 되고 담대하게 맞서게 된다.    희망씨, 가슴에 새기는 한 줄 명언, p.262.

 

2. “에스겔이 활동한 시대와 장소(1-4)”환상을 본 에스겔(5-14)”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에스겔은 남왕국 유다의 요시야 왕 때 태어나 주전597년 왕과 다른 관리들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후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만나는 하류에 위치한 그발강 가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다고 증언합니다. 이런 환상들을 해석하거나 설명하려는 것 자체가 무리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해를 하자고 한다면, 그 환상은 모두 사람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는데, 네 생물이 각각 얼굴과 두 날개를 가졌는데, 그 얼굴들은 사람과 사자와 소와 독수리의 얼굴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보좌를 섬기는 이 네 생물들은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요, 사자는 짐승들의 왕이고, 소는 가축들의 왕이며, 독수리는 새들의 왕입니다.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이 땅과 하늘의 왕이신 만왕의 왕이시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비록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지만,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이 땅과 하늘의 왕이시라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그 생물들 한 가운데 활활 타는 숯불 같은 모양이 보였는데, 마치 횃불처럼 그 생물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그 불은 번쩍번쩍 빛났고, 번개처럼 이리 저리 번쩍거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진노가 머지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에스겔이 보았던 것은 하나님께서 환상을 통해서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전히 당신이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은 무서운 심판을 통해서 일하실 것을 말씀한다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심판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던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셨던 과거적 심판도 있고, 바벨론 포로와 같은 현세적인 심판도 있으며, 요한 계시록에서 말씀하는 미래적 심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심판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심판은 그 역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점이 그것입니다. 영원한 멸망을 알리는 심판이라고 한다면, 이는 아무 소용없는 시간 낭비에 불과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심판을 통해서 의도하는 목적은 정신을 차리고 회개하게 하는 것이며, 마침내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 살아가는 축복의 삶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들 부모님이나 어른들이 자녀들이나 젊은이를 꾸짖는 것은 그들을 화나게 하고 더욱 더 멀리 떠나도록 하려함이 아니라, 본래의 자신/proto type으로 돌아와 정상적인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역설적인 방법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채찍이나 심판의 진정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악감정을 품고 더욱 더 빗나가는 길로 치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제가 고등학생일 때, 하루는 선생님에게서 호된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같은 반 친구들이 다 보는 앞에서 세워두시고는 가슴을 후벼파는듯한 꾸중을 하신 것입니다. 그 따위로 무슨 대학엘 가겠다고 하느냐는 등의 말씀도 있었습니다. 아주 훗날 그 선생님은 제가 목회하는 부산의 교회 예배에 참석하셨고, 그 때의 서운함을 제가 말씀드렸을 때, 그게 선생이 할 수 있는 마지막 훈계였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채찍이 아플수록, 심판이 무서울수록, 하나님의 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3.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승천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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