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810호(2025. 6. 30. 월요일).
시편 119:174-176.
찬송 342장(통).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세상을 구경만 할 수 있다면 고통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생이란 남의 것을 구경하면서 동시에 내 인생도 남에게 보여줘야 한다. 따로따로 떨어져서 구경하고 구경시키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함께 부딪히며 밀치며 뒤얽혀서 연기를 해야 한다. 배우로서 연기를 한다는 의식도 없이 우리는 어쨌든 슬프거나 즐겁거나 쉴 새 없이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이 세상에서 누구는 선한 배역을 맡고, 누구는 악역을 하면서 남의 미움을 받는 배우가 되어야 한다면, 우리가 진정 동정하거나 우러러봐야 할 인간은 누구여야 할까?” 권정생, 우리들의 하나님, p.36.
2. “죄의 유혹과 용서(1-4절)”, “믿음의 힘(5-6절)” 그리고 “종의 의무(7-10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믿음의 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성경에는 매우 드문 얘기이지만, 본문에는 큰 믿음에 대한 실화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고쳐보려고 예수님을 찾았던 한 가나안 여인이, 우여곡절 끝에 많은 장벽을 무릅쓰고 주님 앞에 나아갔는데, 큰 믿음을 가졌다는 칭찬을 들을 뿐 아니라, 딸의 병을 고친 것입니다(마 15:21-28). 믿음이란 자/秭로 재거나 저울로 달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믿음이 크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매우 의례적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나는 어떤 믿음을 가진 것일까 하는 물음말입니다.
먼저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믿음이란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을 알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인정해 드리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의 은총은 무한해서 셈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고 넘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런 말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만이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믿음을 두고 도박하는 심정에 비유했습니다. 저 유명한 <파스칼의 도박>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믿음을 신비한 것이라 풀이했습니다. 믿음은 이성의 영역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신앙의 영역에서만 사용되는 언어라고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한 말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이 세상을 사랑으로 돌보고 계신다는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니 말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좌우로 흔듭니다. 믿음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매우 위험한 말이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마치 미친 사람들이 하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해명합니다(엡 2:8). 이제 적용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그대로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말도 안 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될 것입니다. 라고 응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결론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 사람들만이 붙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행하실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그 말씀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문제는 우리 인간들 뜻대로 될 것이라 잘못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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