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818(2025. 7. 8. 화요일).

시편 122:7-9.

찬송 21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너와 내가, 당신과 당신이, 마주봅니다. 파랑바람이 붑니다. 싹이 움틉니다. 피곤에 지친 눈을 들어, 사랑에 주린 눈을 들어, 너와 내가, 당신과 당신이 마주봅니다. 마술의 시작입니다.” 에리히 케스트너의 시 <마주보기> 1연과 4연을 옮겼습니다. 자신과 누군가를 마주보기만 해도 세상을 바꾸는 마술이 될 거라니, 오늘은 마술을 부려볼 때인 듯합니다.

 

2. “예수와 자케오(1-10)”을 읽었습니다. 자케오와 예수님의 조우/遭遇는 주일학생 시절에 듣고 또 들어서 익숙한 줄거리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키가 작고 배가 나온 부자가 엉금엉금 뽕나무/ 혹은 돌 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는 것과, 나뭇잎을 살짝 들어 올리고 주님을 내려다 보다 주님과 눈이 마주쳤는데, 주님은 그의 집에서 오늘 저녁을 묶으시겠다는 말씀을 듣고 엉겁결에 내려왔고, 자신도 모르게 고백했던 말이, 자신의 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행여 남을 속여먹은 게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 약속했는데, 주님은 그의 집이 구원받았다 말씀하시고, 주님 자신은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화 같은 얘기로 들릴 수 있지만, 당사자인 자케오에게 있어서는 식은땀을 흘리다가 기쁨으로 춤을 추게 된 극적인 반전/反轉이 이루어진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부자이면서 세상 많은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았던 세관장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아주 드문 얘기가 추억처럼 되살아났습니다. 부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회개를 말씀하는데, 자케오는 재산의 절반을 자발적으로 내놓았고, 이를 실천한 톨스토이는 자신의 재산 전부를 내놓으려 했던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부자는 물신숭배자/物神崇拜者란 카테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또 다른 시각으로 회개의 실제를 말씀하고 있다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회개의 방식이라는 다양한 차원을 말입니다. 성경에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8:1-11). 그녀는 즉결처벌 될 절체절명의 자리에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으로 위기를 넘기자, 그녀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리,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하였습니다. 실로암 망대의 붕괴로 죽은 18명의 사람들이 예루살렘 사람들 보다 죄가 더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일화로(13:1-5), 예루살렘 사람들의 죄과가 얼마나 큰가를 회개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그들이 회개할 죄목은 메시아이신 주님을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공관복음서가 모두 보도하고 있는 풍랑을 잔잔케 한 일화는(4:35-41, 8:23-27, 8:22-25)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통렬히 꾸짖는데, 이때의 회개는 자신들의 믿음 없음을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회개란 알고 짓고 모르고 지은 모든 죄라는 물타기식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당사자의 구체적인 잘못에 대한 진솔한 내용이 뒤따라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관장 자케오나 <전쟁과 평화>의 작가 톨스토이가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죄란 부유한 재물을 독점하고 있던 것에 대한 고백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을 다해 고백하고 회개할 죄란 무엇인지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3. 풍물시장에 멜빵을 사러갔다가, 독일 시인 에리히 케스트너(1899-1974)의 시집 <마주보기>2천원에 건졌습니다. 횡재한 날입니다. 생각은 천천히 하기로 하고, 단숨에 다 읽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817(2025. 7. 7. 월요일).

시편 122:4-6.

찬송 54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요람과 무덤 사이에는 고통이 있었다가 아니라 다만 기억이 있었을 뿐이다/ 고통의 기억일 수는 있겠지만 밀물처럼 다가왔다 썰물처럼 사라지는 고통/ 남는 것은 고통의 파도가 아니라 파도가 가라앉은 기억의 바다일 뿐이다/ 만약에 기억이 없다면 그까짓 고통이 무슨 대수랴/ 주삿바늘 들어갈 때의 따끔함과 다를 게 무엇이랴/ 살면서 기억나는 게 고통뿐인 사람은 불안한 밤이며/ 기쁨인 사람이라면 그는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이다/ 지난 뒤에 돌아보면 고통도 사랑이 되며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처럼/ 기쁨으로 물드는 황혼이 되자/ 깊게 익어가는 노을빛이 되고 웃음으로 빛나는 저녁이 되며/ 평안을 담아내는 어둠이 되어 아름다움을 꿈꾸는 밤이 되자독일의 에리히 케스트너의 <숙명>을 소개했습니다.

 

2. “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31-34)”여리고의 소경(35-43)”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40년도 더 넘은 옛날 얘기입니다. 부산 YWCA에서 시각장애인 대학생들을 위한 <등불회>활동을 할 때, 부산의 장애인들을 위해서 대외 창구 구실을 하는 장애인 대표 정 아무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훗날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는데, 그날 만남은 장애인을 돕는 자원봉사 프로그램을 앞두고 여러 가지 궁금한 점과 도움을 구하러 찾아간 것입니다. 당시의 시각장애인 대부분은 안마 봉사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우선 부산 지역에 있는 장애인이 얼마나 되는지를 물었을 때, 정 선생님은 그것을 잘 파악할 수 없다고 하시며 그게 큰 문제라고 했습니다. 많은 가족들이 집안에 숨겨두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시각 장애인을 보면 재수 없다고 해코지를 하니까 바깥으로 내보내지를 않아서 정확한 통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서 대략 약 10만 명쯤 될 것으로 추산하셨습니다. 당시 부산의 맹학교(초 중 고등학교)에 등록된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한 가정 출신이며, 대부분의 넉넉한 가정에서는 라이트 하우스(시각 장애인 숙소) 등 장애인 시설도 이용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장애인들이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조성이 절실하다는 얘기를 나누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등불회>가 자원봉사자 운동을 열심히 해달라는 주문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금부터 2천년도 훨씬 넘은 옛날 옛적 얘기이니까, 시각장애인들의 형편을 추정하기에 충분하겠다 생각합니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사람들 속에 살면서도 어울릴 수 없는 이방인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하루는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찾아가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따랐기 때문에 여리고의 거지 맹인 바디매오(평행귀 막 10:46-52)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주님이 오시는 방향을 향해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사람들이 구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바디매오는 더 큰 소리로 외쳤고, 들으신 주님께서 그를 불러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그는 선생님 보기를 원하나이다.”고 대답하자,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자, 그가 곧 보게 되어 주님을 따랐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디매오가 눈을 뜨게 된 놀라운 일은, 그가 가진 믿음 때문이었다는 것이 오늘 묵상의 중심점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오늘 우리들이 가지고 있다는 믿음은 어떤 것이 길래 바디매오의 믿음과는 다르게 생각될까요? 우리는 우리가 가진 믿음에 대해서 진솔하게 질문해야 하겠습니다. 내 뜻대로 내 생각하는 대로 될 것이라는 신념입니까? 제 생각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믿음을 인정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주어가 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고 있다할지라도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어가 주님으로 바뀌면 달라질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고, 주님의 뜻이시면 세상을 바꾸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믿음이란 주님의 은총과 능력을 의지하고 주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행동입니다. 내 소원대로 되든 아니 되든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주님께 맡기면서 기다리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당장일 수도, 기다릴 수도, 그리고 영영 아닐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816.

시편 122:1-3.

찬송 59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삶에 대한 가치관이 우뚝 서 있어도, 때로는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가슴에 품어온 이루고 싶은 소망들을, 때로는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긍정적이고 밝은 생각으로 하루를 살다가도, 때로는 모든 것들이 부정적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완벽을 추구하며 세심하게 살피는 나날 중에도, 때로는 건성으로 지나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정직함과 곧고 바름을 강조하면서도, 때로는 양심에 걸리는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포근한 햇살이 곳곳에 퍼져있는 어느 날에도, 마음에서는 심한 빗줄기가 내릴 때가 있습니다. 따스한 사람들 틈에서 호흡하고 있는 순간에도, 문득 심한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행복만이 가득 할 것 같은 특별한 날에도, 홀로 지내며 소리 없이 울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재미난 영화를 보며 소리 내어 웃다가도, 웃음 끝에 스며드는 허탈감에 우울해질 때가 있습니다. 자아도취에 빠져 스스로 만족감 중에도, 자신의 부족함이 한없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숨이 헐떡거릴 정도로 할 일이 쌓여 있는 날에도, 머리로 생각 할 뿐 가만히 보고만 있을 때가 있습니다. 내일의 할 일은 잊어버리고 오늘만 보며, 술에 취한 흔들리는 세상을 보고픈 날이 있습니다. 늘 한결 같기를 바라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변화에, 혼란스러운 때가 있습니다.” 롱펠로우의 <때로는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흔들릴 때가 없다면 인간이 아니겠지요. 그래서 신앙에 눈을 뜨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2. 성령강림절 후 넷째 주일의 복음서 눅 10:1-20을 본문으로 현대 교회가 깨우칠 전도생활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역사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움직이며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역사를 도전과 응전이라 했고, E. H. 카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습니다. 공통점은 미래를 향해 계속 진행 중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식 전도방법은 다양하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1-7, 1:42, 1:45).

제가 현직일 때 독특한 전도방식을 고집하는 선교단체가 있었습니다. 제게 와서 대전지역에 전도하러 가게 되었다며 소개해 줄 지인을 부탁하였습니다. 제가 소개한 지인의 집에 본부를 차리고 전도를 하는데, 돈주머니도 식량도 준비하지 않고, 소개한 지인을 혼쭐낸 것입니다. 성경이 소개하는 전도방식을 따른다 했다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가족과 친지를 전도했던 나다나엘의 전도방법도, 친구를 전도했던 빌립의 전도방식도 있습니다. 그들은 가까운 사람을 전도대상자로 삼았습니다. 한국기독교사에는 독특한 전도방식인 노방전도의 개척자로 최봉석(권능) 전도사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결국 불특정 다수를 향해 전도하는 것이 표준처럼 되었지만, 성경처럼 인격적이고, 진정성 있는 전도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전도자는 인격적이며 진정성있는 자세로 찾아나서야 하겠습니다(8-12).

불특정 다수를 향한 전도방식에 대해서 여전히 찬 반 양론이 현존합니다. 저의 신대원생이 서울역에서 목격한 삼성맨의 홍보를 보고, 우리 전도방식도 고쳐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삼성 제품을 홍보하고 판매도 하는데, 너무도 절실하고 간절했다고 합니다. 수단방법을 다해 판매하지 못하면 회사에서 낙오한다고 합니다. 이해관계에서는 그래야 옳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앙의 관계에서는 억지나 강압으로 목표를 달성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물질과 다양한 후원도 일시적인 호객술일 뿐입니다. 참된 전도란 진실한 사랑과 따뜻한 섬김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당의 의자 수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세상에서 소금의 맛과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도록 모범을 보이며 다가서야 하겠습니다.

 

전도자가 끝까지 기억할 사실은 생명책에 기록되게 하는 일입니다(17-20).

어느 부흥사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천국에 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하실까요?” 학력이나 재력을 물으실까, 아니면 책을 몇 권이나 썼는지를 물으실까, 그도 아니면 몇 사람이나 전도하였고, 지금도 그들이 향기 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 라고 말입니다. 전도는 앵무새처럼 예수는 나의 구주이십니다.”라고 외치는 것만이 아닐 것입니다. 교회당의 큰 자리를 채우는 것만도 아닐 것입니다. 참된 전도란 하나님 나라에서 살 생명책에 기록될 사람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나님나라 생활을 배우는 현장실습장입니다. 미국이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아프리카 빈민국에 기독교적 가치관을 심어주어 복음화에 크게 공헌했는데, 지금은 아메리카 퍼스트를 꿈꾸는 교만의 극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814(2025. 7. 4. 금요일).

시편 121:3-5.

찬송 32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엊그제 감상했던 미국 영화 <The Blind Side>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어느 초겨울 비를 맞고 걸어가는 남자 주인공 한 거구의 흑인 소년 마이크 오어를, 지나가던 여자 주인공 리 앤 투오이는 그를 차에 태워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을 재워 줍니다. 이튿날 그 흑인 소년이 도둑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여주인공은 그를 돌보는 것은 당연한 크리스천 정신으로 가족들(남편 션, 딸 콜린스 막내 제이 해드)의 동의를 받습니다. 여자 주인공 리 앤은 마이크를 뒷조사하는데, 12 명의 아이를 낳은 매춘부인 그의 생모를 어렵게 만나, 자신이 마이크를 입양해서 돌보겠다고 허락을 받습니다. 가정이 생겨 다시 학교에 가게 되는데,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합니다. 아는 게 없으니 선생의 강의를 알아듣지 못하고, 시험지를 백지로 내기 일쑤여서 교사들 사이에서 가르칠 수 있겠는지를 토의합니다. 다행히 한 교사의 배려로 겨우 학교생활을 버티고 있는데, 그의 유일한 취미는 운동이라는 것과, 그가 특별히 잘 할 수 있는 것이란 다른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상담사의 조언을 듣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미식 축구 선수가 됩니다. 인상적인 장면은, 도서관에 들어서는 마이크를 쳐다본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그를 험담하는데, 입양 가정의 누이 콜린스가 비난하는 여자 애들의 테이블에서 일어나 혼자 큰 테이블에 외롭게 앉아 공부하는 마이크 옆으로 가서 책을 펴는 장면과, 새 어머니 리 앤이 생모를 만났을 때도, 그녀의 곁에 다가가서 앉아 얘기하는 장면은, 누군가의 옆 자리에 앉아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라 암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미국의 여류 시인 매리 스티븐슨의 <모래위의 발자국/Footprints in the Sand>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2.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9-14)”을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본래 자화자찬하며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을 고치기 위해 하신 비유였는데, 표제어처럼 교만한 사람의 대표 격인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와 그의 상대역인 세리의 기도를 비교하는 기도 대결쯤으로 변해버린 것에 대해서 아쉬움을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쨌든 이 두 사람의 기도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차이와 삶의 태도에 대해서 얼마나 편차가 큰 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선 두 사람의 기도는 태도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는데,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는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며 기도하는 점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자리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드렸고, 그리고 틀림없이 큰 소리로 기도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에 비해서 세리의 기도는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구석진 자리에서 기도할 뿐 아니라, 감히 하늘을 올려보지도 못한 채, 다른 누구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작은 소리로 기도드렸습니다. 두 번째 이 두 사람의 기도는 내용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내용은 자기 자랑으로 시종 일관하고 있습니다. 한 주간에 두 번씩이나 금식을 했다던 지, 십일조를 떼먹지 않고 드렸다던 지, 욕심이나 부정직하게 살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세리는 자랑거리나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오직 불쌍히 여겨주실 것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두 사람의 기도의 태도와 내용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신 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세리라고 하시며,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높아지는 진리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진지하게 묵상해야 할 것은,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나 우리가 사는 21세기에도 여전히 바리새파 사람들과 같이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으시고 지적하시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잘못된 신앙생활을 고치려 하기는커녕, 하나도 다를 바 없이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전 아무개 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는 자신이야말로 한경직 목사님과 김준곤 목사님 등등을 한국교회의 전통을 계승하는 인물이라고 만천하에 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1970년대 빌리 그래이험 목사가 여의도 광장에서 100만 명이 넘는 대형 집회를 여러 날 인도하고 있을 때, 그 집회에서 1부 설교를 맡았던 신 아무개 목사는 나는 5천명 앞에서 설교하신 예수님보다 200배가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한 일이 있었다.”, 부산 연합집회에서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전 아무개 목사가 제대로 배운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그로부터 30년도 채 되지 않아서 한국 개신교회가 하향곡선을 긋게 된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올바른 신앙의 사람이라 인정한 사람은 철부지 같은 바리새파가 아니라, 세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점을 아직도 깨우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그런 신앙인이 되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815.

시편 121:6-8.

찬송 52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 대공황시절, 하루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기자가 그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각하께선 걱정스럽다거나 초조할 때 어떻게 마음을 가라앉히십니까?” 대통령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습니다. “휘파람을 붑니다.” 기자는 의외라는 듯 다시 질문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대통령께서 휘파람 부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없는데요?” 그러자 대통령은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당연하죠. 난 아직 휘파람을 불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경기침체로 불안에 떠는 국민에게 아직 미국은 끄떡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차동엽, 잊혀진 질문, p.44.

 

2. “어린이를 축복하신 예수(15-17)”, “부자 청년-낙타와 바늘귀(18-27)” 그리고 여러 갑절의 상(28-30)”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십여 년 전에 중국 청도에 있는 삼자교회/三自敎會(自治-自養-自傳)에서 젊은 목회자들을 위해 성경 강좌를 부탁을 받았습니다. 이십 여명 남짓한 교회 지도자들이 모였습니다. 첫날 강의를 마치고 쉬고 있었는데, 한 목사님이 찾아왔습니다. 자신은 500여명이 넘는 교회를 맡아서 목회를 하고 있다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장로님들의 파워로 생활고를 하고 있다 하소연을 하였습니다. 목회자 가족이 굶지 않을 정도로 박봉/薄俸을 받는다 했습니다. 목회자가 가난해야 기도에도 열심이고 목회에도 충실하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런가하면 한 때 서울의 대형교회를 사임하고 숭의여학교 강당을 빌려 개척교회를 했던 김동호목사는, <깨끗한 부자>라는 책을 써서 지금도 여전히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습니다. 청빈/淸貧이 아니라 청부/淸富의 길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4부의 목차는 이렇습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부자가 되라. 세상의 불평등을 치유하는 부자가 되라. 하나님을 위하는 부자가 되라. 하나님이 믿고 맡길 수 있는 부자가 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한 유대 지도자가 주님께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고, 주님은 율법을 잘 지켰느냐 되물으셨을 때, 그는 잘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에게 자신이 가진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부자가 크게 근심하는 것을 보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쉬울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영국의 <크리스천 투데이>의 마크 우드는 다음과 같이 칼럼을 썼습니다. "성경은 부/에 대해 매우 현실적으로 말하고 있다. 성경은 부에 대해 폄하하지 않는다. 구약을 보면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는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 최소한 걱정에서 벗어나게 한다. 면서,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부자/富者가 되라고 격려하지 않는다. 물론 부에 따른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고 말했습니다. 우드는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이 부자가 되기 원한다고 설교하는 '번영 설교자'들은 성경을 주의 깊게 읽지 않으며, 사람들을 매우 타락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부자로 만드시지 않으셨다. 성경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부를 좇지 말며, 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하나님을 의지하며 책임을 다하라고 말하고 있다" 고 강조합니다. 성경은 자신의 독자들에게 부와 부자 되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으며, 예수님에 이르러서는 냉담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경을 읽고 따르는 교인들은 부자가 되고 싶어 안달을 하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상반된 현실 앞에서 당황하게 됩니다. 주님 말씀의 깊은 뜻을 추론하면, 부자 됨의 문제는 그 부를 축적하려는데 있었습니다. 부의 축적은 타락에 이르고, 자만심을 배가하고, 주변의 약자에 대한 냉담함과, 결국 하늘 시민답지 않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엄청난 농지를 가진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고 산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전에 자신의 농지를 소작농들에게 분배했고, 인세까지 빈자들에게 나누려고 하자 아내와 크게 다투고 그 길로 가출/家出, 한 작은 간이역에서 동사/凍死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근거할 때, 성실히 일해서 얻은 부라면 잘못이 없겠습니다만, 문제는 그 부/때문에 화를 당할 것이 분명하니 그게 큰 잘못이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813(2025. 7. 3. 목요일).

시편 121:1-2.

찬송 43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허공으로 화살을 쏘았네, 어딘지 모르지만 땅에 떨어졌네. 너무도 빨리 날아갔기에 눈은 그것을 따라갈 수 없었네. 나는 허공에다 노래를 불렀네. 어딘지 모르지만 땅에 떨어졌네. 날아가는 노래를 따라갈 만큼 누군들 날쌘 눈을 지닐 수 있을까? 먼먼 훗날 참나무에 박힌 부러지지 않은 그 화살을 찾았네. 한 친구의 가슴속에 처음부터 끝까지 남아 있는 나의 노래도.” H. W. 롱펠로우의 <화살과 노래>를 옮겨보았습니다. 우리들 삶이란 헛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 “과부와 재판관(1-8)”을 읽었습니다. 그동안 미국 대법원의 재판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는데, 헌법과 법률에 의해서 재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재판을 한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법관들의 정치 성향에 따라서 재판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법은 공정성을 잃고 사법부의 위상은 크게 흔들릴 수 밖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재판관이 있었던 것입니다. 올바른 판결이 아니라 굽은 판결을 내리는 그런 재판관 말입니다. 왜 이런 위인들이 존재할까요? 악은 왜 존재할까요? 하나님께서 눈을 감고 계시는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잘못을 하는 사람을 학교 선생님이나 아버지가 즉결처분을 내리듯 그러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든 지금은 즉결처분이란 재수 없는 사람이 비둘기의 똥을 맞듯 매우 드문 일이라는 것을 터득했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세상에 가득한 죄인들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청문회에 나오면 곧 바로 죄인이 됩니다. 털고 또 털고 파고 또 파기 때문이 아닙니다. 청문회를 피한 사람들이 의인노릇을 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한 과부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억울한 일로 견딜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예나 제나 과부는 사회적 약자의 대명사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문제의 핵심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밤낮없이 재판관의 대문 앞에 앉아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달라고, 그리고 바른 판단을 내려줄 때까지 탄원하겠다고 말입니다. 밤낮 부르짖는 과부의 소원은 고약한 재판관까지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점을 파고들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간절함과 절실함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하고 4가지 결심을 한 것을 저의 스크랩북에서 찾아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절심함으로 살자였습니다. 오늘 <과부와 재판관 비유>는 이런 간절함과 절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중심점을 가지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우리의 간절함과 절실함을 고할 수 있느냐 입니다. 대학에 입학하고 한 학기를 마쳤을 때, 나름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다 생각했지만, 장학생이 되고 말고는 교수님들의 평가에 달려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교수실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들어와요! 라는 소리에 문을 열고 보니 교수님들이 회의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다음에 오겠습니다 라고 하자, 들어왔으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세요.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학교에서 장학금을 주시지 않으면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교수님들의 선처를 구합니다. 라는 두 마디 말을 하고 도망치듯 문을 닫았습니다. 그 당시에 저의 형편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저를 도와줄 길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수실을 찾았고, 제 얼굴에는 간절함과 절실함이 가득 배어있었다고 훗날 지도 교수님이 귀띔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과부는 자신을 절망에서 구해 줄 사람은 재판관 밖에 없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간절함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모델이 되었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기도를 듣고 기뻐하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812(2025. 7. 2. 수요일).

시편 120:4-7.

찬송 23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옛 제자들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행복하세요?” “어느 정도는.” “그 행복 리스트를 말씀해 주세요.” 그래서 그동안 느꼈던 생각들을 리스트화 해 보았습니다. 일어나서 커피 한 잔을 맛있게 마실 때, 거실 창밖이 환히 보이도록 블라인드를 당길 때, 채전에서 자라는 부추나 고추 등 작물들이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랐다 생각이 들 때, 잔디를 깎고 그것들을 햇볕에 말리려 그대로 남겨둘 때, 음식물 쓰레기를 마을 공동 쓰레기통에 얌전히 버릴 때, 힘들여 읽고 생각하고 기록한 오늘의 묵상자료를 맨 처음 읽어주는 이름들이 여전할 때 등 등. 셀 수 없이 많은 리스트들이었습니다.

 

2.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20-37)”을 읽었습니다. 사람의 아들 곧 인자/人子라는 표현은 신약성서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일컫는 매우 독특한 표현입니다. 마침 <당당 뉴스>에 실린 최재석 칼럼에 예수님은 왜 자신을 인자라고 하셨을까?” 라는 글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구약성서 에스겔서에서 처음 인자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에스겔서에 무려 90번 이상 나옵니다(2:1). 이때의 인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상대를 향한 말이었습니다. 그 후 400년 동안 사용하지 않던 인자 칭호는 기원전 2세기에 기록된 다니엘서에 다시 등장하는데, 이때는 메시아를 인자 같은 이”(7:13)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다니엘서의 인자 칭호를 채용합니다. 공관복음서에 69, 요한복음서에 13회 나옵니다. 이렇듯 4복음서에 등장하는 인자칭호는 예수님만이 자신의 호칭하며 사용하였습니다. 4복음서 외에는 4번 등장하는 이 인자호칭은 스데반의 환상(7:56), 시편 8:4를 인용한 히 2:6, 7:1을 암시하는 계 1:1314:14으로, 이 모두에서 언급된 인자호칭은 분명히 메시아로서의 예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하나님의 아들이나 메시아란 칭호를 피하고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셨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저 유명한 윌리엄 브레데의 <메시아 비밀>/ 8:29-30, 1:44이 암시하는 것처럼, 신약시대의 유대인들은 현실정치에 참여해서 로마의 세력을 물리칠 다윗의 왕권을 계승할 메시야를 기대했는데, 정작 주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여주시는 등 진정한 의미에서 초역사적 구원자로써 메시아를 알리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브레데의 주장은 여전히 논쟁가운데 있습니다.

    가끔 생각하는 것입니다만, 신학자들을 비롯해서 성경을 해석해서 전달해야 하는 일선 목사들은, 자신들의 이해의 범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술하려고 힘씁니다. 마치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시계가 그의 주인 격인 인간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듯 말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접근해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고 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을 만든 주인에 목적(?)에 충실한 일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그런 시각에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인자가 오시는 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혼란을 일으킬 말만 늘어놓고 있다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그 날을 번개가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번쩍 거리는 것과 같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노아의 때에 일어났던 사회 현상을 소환하십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집을 사고 고치는 일에 혼을 쏙 빼놓고 살던 그 때에, 홍수가 온 세상을 덮어 모든 사람들을 멸망시키듯, 그리고 롯이 소돔에서 경험했던 불과 유황이 쏟아져 모든 사람이 멸망하듯 말입니다. 그리고 경고하십니다. 그 날이 오면 지붕에 올라간 사람이나, 밭에 있던 사람들이 재물을 건지겠다고 집안으로 가지 말라시며, 침상에 누워있던 두 사람 중 하나는 데려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두며, 맷돌질 하는 두 여인 중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겨둘 것이라고 말입니다. 심판의 날이었던 것입니다. 누가 그 날을 피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 날에 대책을 세우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말씀입니다. 일찍부터 준비했어야 합니다. 마치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3. 엊그제는 복숭아를 20여개 수확하였는데 맛은 들었는데 크기도 꼴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811(2025. 7. 1. 화요일).

시편 120:1-3.

찬송 30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많은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크게는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형성되기도 하고, 작게는 독특한 습관이나 성격이 생기게도 됩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생긴 못된 성격이 있는데, 생각없이 말을 하는 사람을 아주 싫어합니다. 진담을 농담처럼 하는 사람이며, 상대방의 호의를 아주 가벼운 농담으로 받아넘겨 상처를 받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존중은 고사하고 함부로 대한다 생각할 때는, 그 사람이 싫어지고, 고쳐지지 않고 계속 반복될 때는 날씨 얘기만 하는 사람으로 분류하게 됩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속내를 주고받을 좋은 친구란 한두 명으로 충분하다는 말이 마음에 듭니다. 그럼에도 좋은 친구가 많다 자랑하는 것은 헛소리라고 말입니다.

 

2. “나병환자 열 사람(11-19)”을 읽었습니다. 제겐 나병환자 하면 떠오르는 두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장마비가 퍼붓던 어느 여름 밤, 저의 앞집 엄씨네 집에서 슬피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머니는 이튿날 그 집 작은 아들이 어딘가로 떠났다고 했습니다. 나병에 걸린 아들을 더는 숨길 수가 없어서 가족들이 마지막 밤을 그렇게 울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한 장면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경남 거창 외곽의 한 작은 마을에서 성탄절 예배를 드린다고 교감 선생님이 학생 몇을 데리고 가셨는데, 따라 가서 보니까 나환자 촌이었습니다. 코가 없는 분들과 손목이 없는 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많이 불편했던 기억이 납니다. 돼지와 닭을 키우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나 중심의 세상이 아니라, 상대 중심의 세상을 바라볼 눈을 뜨게 되었고, 목사의 삶이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다짐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목회 초기부터 시각 장애우를 위한 봉사단체를 만들고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고, 은퇴 후에는 장애인 교회에서 자비량 설교 목사로 10년째 일하고 있지만, 마음처럼 큰 도움을 드리지 못해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천형/天刑처럼 무거운 멍에를 매고 살아가는 그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난 길로 예루살렘을 올라가시던 주님은 한 나환자 촌을 지나가시게 되었고, 그곳에서 멀리 떨어져서 큰 소리로 외치는 나환자 열 명을 만나셨는데,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명하시자 그들이 떠나갔는데, 가는 도중에 병이 나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한사람은 주님께 되돌아와서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 나환자는 이방인이었다 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화는 난치병으로 알려진 나환자를 주님께서 고치셨다는 치유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은총을 입은 사람 열 명이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엄청난 은총에 감사하지 않았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 일화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다를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은총을 입었다고 하면 평생을 그 은혜 갚기에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되돌아보면 제게도 참 고마운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대학 등록금은 가족과 친지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 납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 돈 10,000원으로 대학 4년을 졸업하기로 어머니와 약속하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하루 이틀 여관신세를 지고 밥을 사먹다 보니까 일주일이면 그 돈을 다 쓸 것 같았습니다. 그 절박한 시점에 저를 도와준 분이 신촌 로터리에서 노고산으로 올라가는 언덕에 있던 신촌감리교회의 허 목사님이셨습니다. 목사님은 저를 위해서 평소에 사이가 안 좋으신 북아현동에 있는 <인우학사>의 사감께 머리를 숙이고서 힘든 부탁을 하신 것입니다. 제가 가졌던 돈으로 2달치 식비를 낼 수가 있었고, 그 뒤에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공부할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교회를 열심히 섬겨 은혜를 갚겠다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 학기만 교회학교 교사로 섬겼을 뿐, 루터교회를 알게 되면서부터 바쁘다는 핑계로 오랫동안 그 목사님과 교회를 잊고 살았습니다. 무정하고 비정하게 말입니다. 여러 해가 지나서 그 분의 아드님이 중앙대 교목실장으로 계셨을 때, 옥수동교회에 설교자로 한 번 모신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를 많이 도와 주셨는데, 한 두 번 찾아뵙는 것이 전부였으니,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를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뉘우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 들었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너도 받은 은혜를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갚으라.”고 말입니다.

 

3. 여름 한 복판에 들어섰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