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812호(2025. 7. 2. 수요일).
시편 120:4-7.
찬송 23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옛 제자들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행복하세요?” “어느 정도는.” “그 행복 리스트를 말씀해 주세요.” 그래서 그동안 느꼈던 생각들을 리스트화 해 보았습니다. 일어나서 커피 한 잔을 맛있게 마실 때, 거실 창밖이 환히 보이도록 블라인드를 당길 때, 채전에서 자라는 부추나 고추 등 작물들이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랐다 생각이 들 때, 잔디를 깎고 그것들을 햇볕에 말리려 그대로 남겨둘 때, 음식물 쓰레기를 마을 공동 쓰레기통에 얌전히 버릴 때, 힘들여 읽고 생각하고 기록한 오늘의 묵상자료를 맨 처음 읽어주는 이름들이 여전할 때 등 등. 셀 수 없이 많은 리스트들이었습니다.
2.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20-37절)”을 읽었습니다. 사람의 아들 곧 인자/人子라는 표현은 신약성서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일컫는 매우 독특한 표현입니다. 마침 <당당 뉴스>에 실린 최재석 칼럼에 “예수님은 왜 자신을 인자라고 하셨을까?” 라는 글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구약성서 에스겔서에서 처음 인자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에스겔서에 무려 90번 이상 나옵니다(겔 2:1). 이때의 인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상대를 향한 말이었습니다. 그 후 400년 동안 사용하지 않던 인자 칭호는 기원전 2세기에 기록된 다니엘서에 다시 등장하는데, 이때는 메시아를 “인자 같은 이”(단 7:13)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다니엘서의 인자 칭호를 채용합니다. 공관복음서에 69회, 요한복음서에 13회 나옵니다. 이렇듯 4복음서에 등장하는 인자칭호는 예수님만이 자신의 호칭하며 사용하였습니다. 4복음서 외에는 4번 등장하는 이 인자호칭은 스데반의 환상(행 7:56), 시편 8:4를 인용한 히 2:6, 단 7:1을 암시하는 계 1:13과 14:14으로, 이 모두에서 언급된 인자호칭은 분명히 메시아로서의 예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하나님의 아들이나 메시아란 칭호를 피하고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셨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에 대해서 저 유명한 윌리엄 브레데의 <메시아 비밀>/ 막 8:29-30, 1:44이 암시하는 것처럼, 신약시대의 유대인들은 현실정치에 참여해서 로마의 세력을 물리칠 다윗의 왕권을 계승할 메시야를 기대했는데, 정작 주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배고픈 사람들을 먹여주시는 등 진정한 의미에서 초역사적 구원자로써 메시아를 알리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브레데의 주장은 여전히 논쟁가운데 있습니다.
가끔 생각하는 것입니다만, 신학자들을 비롯해서 성경을 해석해서 전달해야 하는 일선 목사들은, 자신들의 이해의 범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진술하려고 힘씁니다. 마치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시계가 그의 주인 격인 인간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듯 말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접근해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고 또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을 만든 주인에 목적(?)에 충실한 일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그런 시각에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인자가 오시는 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혼란을 일으킬 말만 늘어놓고 있다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그 날을 번개가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번쩍 거리는 것과 같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노아의 때에 일어났던 사회 현상을 소환하십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집을 사고 고치는 일에 혼을 쏙 빼놓고 살던 그 때에, 홍수가 온 세상을 덮어 모든 사람들을 멸망시키듯, 그리고 롯이 소돔에서 경험했던 불과 유황이 쏟아져 모든 사람이 멸망하듯 말입니다. 그리고 경고하십니다. 그 날이 오면 지붕에 올라간 사람이나, 밭에 있던 사람들이 재물을 건지겠다고 집안으로 가지 말라시며, 침상에 누워있던 두 사람 중 하나는 데려가고 다른 하나는 남겨두며, 맷돌질 하는 두 여인 중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겨둘 것이라고 말입니다. 심판의 날이었던 것입니다. 누가 그 날을 피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 날에 대책을 세우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말씀입니다. 일찍부터 준비했어야 합니다. 마치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3. 엊그제는 복숭아를 20여개 수확하였는데 맛은 들었는데 크기도 꼴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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