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811호(2025. 7. 1. 화요일).
시편 120:1-3.
찬송 305장(통).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많은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크게는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형성되기도 하고, 작게는 독특한 습관이나 성격이 생기게도 됩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생긴 못된 성격이 있는데, 생각없이 말을 하는 사람을 아주 싫어합니다. 진담을 농담처럼 하는 사람이며, 상대방의 호의를 아주 가벼운 농담으로 받아넘겨 상처를 받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존중은 고사하고 함부로 대한다 생각할 때는, 그 사람이 싫어지고, 고쳐지지 않고 계속 반복될 때는 날씨 얘기만 하는 사람으로 분류하게 됩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속내를 주고받을 좋은 친구란 한두 명으로 충분하다는 말이 마음에 듭니다. 그럼에도 좋은 친구가 많다 자랑하는 것은 헛소리라고 말입니다.
2. “나병환자 열 사람(11-19절)”을 읽었습니다. 제겐 나병환자 하면 떠오르는 두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장마비가 퍼붓던 어느 여름 밤, 저의 앞집 엄씨네 집에서 슬피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머니는 이튿날 그 집 작은 아들이 어딘가로 떠났다고 했습니다. 나병에 걸린 아들을 더는 숨길 수가 없어서 가족들이 마지막 밤을 그렇게 울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한 장면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경남 거창 외곽의 한 작은 마을에서 성탄절 예배를 드린다고 교감 선생님이 학생 몇을 데리고 가셨는데, 따라 가서 보니까 나환자 촌이었습니다. 코가 없는 분들과 손목이 없는 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많이 불편했던 기억이 납니다. 돼지와 닭을 키우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나 중심의 세상이 아니라, 상대 중심의 세상을 바라볼 눈을 뜨게 되었고, 목사의 삶이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다짐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목회 초기부터 시각 장애우를 위한 봉사단체를 만들고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고, 은퇴 후에는 장애인 교회에서 자비량 설교 목사로 10년째 일하고 있지만, 마음처럼 큰 도움을 드리지 못해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천형/天刑처럼 무거운 멍에를 매고 살아가는 그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난 길로 예루살렘을 올라가시던 주님은 한 나환자 촌을 지나가시게 되었고, 그곳에서 멀리 떨어져서 큰 소리로 외치는 나환자 열 명을 만나셨는데,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명하시자 그들이 떠나갔는데, 가는 도중에 병이 나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한사람은 주님께 되돌아와서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 나환자는 이방인이었다 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화는 난치병으로 알려진 나환자를 주님께서 고치셨다는 치유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은총을 입은 사람 열 명이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 엄청난 은총에 감사하지 않았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 일화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다를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은총을 입었다고 하면 평생을 그 은혜 갚기에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되돌아보면 제게도 참 고마운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대학 등록금은 가족과 친지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 납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 돈 10,000원으로 대학 4년을 졸업하기로 어머니와 약속하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하루 이틀 여관신세를 지고 밥을 사먹다 보니까 일주일이면 그 돈을 다 쓸 것 같았습니다. 그 절박한 시점에 저를 도와준 분이 신촌 로터리에서 노고산으로 올라가는 언덕에 있던 신촌감리교회의 허 목사님이셨습니다. 목사님은 저를 위해서 평소에 사이가 안 좋으신 북아현동에 있는 <인우학사>의 사감께 머리를 숙이고서 힘든 부탁을 하신 것입니다. 제가 가졌던 돈으로 2달치 식비를 낼 수가 있었고, 그 뒤에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공부할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교회를 열심히 섬겨 은혜를 갚겠다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 학기만 교회학교 교사로 섬겼을 뿐, 루터교회를 알게 되면서부터 바쁘다는 핑계로 오랫동안 그 목사님과 교회를 잊고 살았습니다. 무정하고 비정하게 말입니다. 여러 해가 지나서 그 분의 아드님이 중앙대 교목실장으로 계셨을 때, 옥수동교회에 설교자로 한 번 모신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를 많이 도와 주셨는데, 한 두 번 찾아뵙는 것이 전부였으니,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를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뉘우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 들었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너도 받은 은혜를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갚으라.”고 말입니다.
3. 여름 한 복판에 들어섰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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