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403.

시편 시 66:16-17.

찬송 30, 169, 20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글은 글쓴이의 삶의 배경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것입니다. 보에시우스의 다음 시를 감상해 보시지요.

어떠한 운명에도 의연한 사람은, 거만한 운명을 발밑에 깔고, 행운과 불운을 올바르게 쳐다보며, 그 얼굴 태연하게 보존할 수 있네. 태풍 휘몰아치는 바다의 광포도, 큰 입으로 화염을 뿜어서 흑연/黑煙에 뒤덮인 활화의 베시우스 산도, 드높이 솟은 저 탑 때려치는 천둥 번개와 벼락도, 그 마음 혼란시킬 수는 없네. 가련한 사람들아, 어찌하여 너희는 하잘 것 없이 횡포스럽기만 한 폭군들을 무서워 떤단 말이냐보에시우스, 정의채 역, 철학의 위안, pp.30-31.

 

2. 성령강림절 주일의 구약 성경 에스겔 37:1-14을 본문으로 마른 뼈들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인간의 삶의 현장을 직관하려고 합니다. 까닭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만이 우리의 힘겹고 절망스러운 삶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절망 한 복판으로 에스겔 선지자를 인도하셨습니다(1-3).

설교에 앞서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던지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망가트리는 가장 치명적인 문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밖으로부터 던져진 실패와 질병 등입니까? 아니면 우리 안에 있는 무관심, 무의미, 무감정, 무기력과 같은 것입니까? 밖에서 오는 외적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무기력과 무의미라는 내적 문제가 우리 인간을 서서히 절망으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께서 이런 우리들을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에게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로 들어가는 입구에 커다란 묘지가 있었는데 소홀한 관리로, 무덤에서 뼈들이 솟아날 것 같이 황량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몽골의 정신적 힘이었던 무당들의 사당 주변에는 동물들의 뼈들이 뒹굴고 있었습니다. 음산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땅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성령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꾼을 인도하신 것은 무슨 뜻이 있을까요? 그것은 절망과 죽음의 땅을 생명으로 바꾸시겠다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절망은 희망과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4-10).

마른 뼈들아, 야훼의 말을 들으라. 내가 너희 속에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리라. 너희에게 힘줄을 이어놓고 살을 붙이고 가죽을 씌우고 숨을 불어넣어 너희를 살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그러자 뼈들이 움직이며 서로 붙는 소리가 났고, 뼈에 힘줄이 이어졌고, 살이 붙었으며, 가죽이 씌워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에스겔에게 명하시기를 너 사람아, 주 야훼가 말한다. 숨아, 사방에서 불어와서 죽은 자들을 스쳐 살아나게 하여라.” 그러자 모든 시체들이 제 발로 일어서서 큰 무리를 이루었다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흙으로 빚은 우리 인간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자 생령이 된 것처럼, 절망과 죽음의 골짜기에 하나님의 숨, 곧 성령의 기운을 불어넣자 새로운 생명들로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마른 뼈들에게 성령의 기운을 불어넣을 때, 죽어 백골이 되었던 뼈들에게서 힘줄이 돋고, 살이 붙고, 가죽이 씌워지고, 생기를 불어넣자 생명이 재탄생한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11-14).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마른 뼈들, 절망의 골자기를 뒹굴고 있던 뼈들은 하나님께서 뽑아 세우신 이스라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얼마든지 마른 뼈들로 절망 한 복판에서 뒹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눈 앞에는 마른 뼈들이 뒹굴고 있고, 캄캄한 절망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슬픈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눈에 보이는 현상이 전부라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느냐 계시지 않느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새힘을 얻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그 옛날 에스겔 골짜기를 가득 채우고 있던 마른 뼈와 같은 이스라엘을 다시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오늘날도 절망과 슬픔 그리고 무기력과 무의미를 안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을 의미 있는 삶으로, 감격으로 가득 찬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계시는 말씀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96.

시편 시 65:9-10.

찬송 4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학생시절에는 강의실을 지키고 도서관을 지킨다는 갸륵한(?) 생각에, 거의 매일 치러지는 학생시위에 참여하지 못했다. 김누리 교수는 이런 나 같은 사람들을 향해서 일침을 놓는다. “한국인들은 정치의 광장에서는 부당한 국가 권력에 맞서 자기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지만, 일상의 공간에서는 공개적으로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정치의 민주화는 어느 정도 이루었지만, 일상의 민주화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까 군중이라는 거대한 물결에는 내맡길 수 있지만, 독립적인 자신은 꼭꼭 숨긴다는 말입니다. 김누리,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p.34.

 

2.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과 온 세상의 크리스천들을 향해서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셨는데, 그 하나 됨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하나 됨과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 됨에는 많은 간극이 있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 됨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하나 됨에 나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하나 됨의 의미를 찾아야 하겠습니다(18:34, 5:29).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하나 됨이란 통일된 하나(unification)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 처럼, 이념적인 동조 내지는 일치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주장은 엉터리입니다. 민주주의에도 공산주의에도 수백 수천가지의 다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통일된 민주주의나 공산주의가 있는 줄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말씀으로 이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몸처럼 백체를 가진 인간의 신체에서 하나를 뽑아냈을 때를 말씀하십니다. 이때의 하나는 동일한 백가지 물건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삶을 온통 흔들어놓을 정도의 혼란을 가져다 줄 수 있는 하나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궁극적인 진리를 이해하고 신뢰하기 위해서 접근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 하나의 가치와 중요성을 말씀하십니다. 가령 하나님의 뜻을 하나도 깨닫지 못할 때 말입니다.

 

두 번째는 다양성의 일치를 말씀하고 있었습니다(11-14).

주님을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다는 배경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살펴야 합니다.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하지 않고 복잡다단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양한 관심사를 추구하고 있다는 말도 되고, 삶의 내용도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졸업 후 50년 만에 모교를 방문했는데, 학교 책임자들이 학교운영이 어렵다며 아이디어를 부탁하였습니다. 신학 훈련은 목회자가 되는 것만이 아닐 것입니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지도자는 목회자만이 아닌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학생들의 요구를 다 들어줄 형편도 능력도 되지 않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의 기본이 되는 신앙훈련을 잘 길러줄 수 있다면, 어떤 분야에서 어떤 역할을 하든 그 정신으로 세상을 위해 귀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신은 바탕이 되고 다양한 능력으로 필요를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융합적인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15-19).

한때 머리가 좋은 S대학 출신들을 기피하는 기업체가 제법 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문제를 날카롭게 분석은 잘하는데, 종합하거나 아우르게 하지를 못한다는 약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에 남아서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부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편 가르기하고, 대립하게 하며, 싸우게 하는 악마들이 하는 역할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하나 됨이란 진리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서로 고물 없는 떡덩이처럼 되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부산에서 목회할 때, 독일인 로마 가톨릭 신부님이 계셨는데, 그분은 성주간 금요일(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에는 우리 모든 기독교회들을 떡메로 내려쳐서 한 덩어리로 만들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저도 감동을 받아서 함께 성주간에 강단교류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을 위해서 다름을 선용한 거대한 힘으로 섬김을 실천한다면, 세상은 분명 감동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쉽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89.

시편 시 63:8-11.

찬송 39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언제나 여러 종류의 신들을 섬겨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주()신이었던 바커스를 오늘까지도 추종하고 있으며, 사랑의 여신이었던 비너스는 성 도착증에 걸린 20세기에 와서 널리 부활되고 있다. 지혜의 여신인 아테네는 다시 한 번 영광의 지위에 올라 있음을 본다. <중략> 당신의 신은 누구인가? 나름의 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신 지향적인데, 그것은 인간이 가진 공통적인 불안감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런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거짓 신을 만들어냈는데, 그 첫 번째가 자기 자신이라는 신이다.’             로버트 슐러, <현대인을 위한 팔복과 십계명>, pp.134-135.

 

2. 부활절 여섯째 주일의 사도서간 요일 5:1-8을 본문으로 세상을 사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주제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강한 힘을 찾아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학교나 직업을 선택하는 것도 자신이 추구할 수 있는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선택하고 도전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힘이 찾아 노력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믿음에 대한 오해/誤解와 곡해/曲解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4-5).

신앙인이건 아니건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밖에는 믿을 것이 없다는 사람들이 가장 많습니다. 믿음 때문에 많이 속았거나 낭패를 본 사람들의 경험적 주장이지만, 오해입니다. 자신의 우상을 믿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일반 종교인과 나름 자신의 아이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곡해입니다. 창조주요 심판주이신 유일무이하신 야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올바른 이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일이며,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순종이라는 말은 자기 자신의 뜻이나 생각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의지나 생각을 포기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역동성을 믿는다는 것입니다(1-3).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믿습니다. 라는 말을 하지만, 그들이 믿는다는 말이 모호하게 들릴 때가 많습니다. 첫째는 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면 믿음이 되는 줄 생각하는 경향입니다. 흔히 부흥회에서 성도들이 주문처럼 외우는 믿습니다. 아멘.” “믿습니다. 아멘이런 말들은 믿음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지 않은 것으로 들립니다. 둘째는 기도자의 능력이나 노력 또는 의지에 따라서 믿음이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듯 생각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은 그 출발점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2:8)이라고 밝히는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고 싶어 하시는 자에게 믿음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믿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룰 것이라는 확신이며, 하나님은 말씀대로 역동성을 발휘하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6-8).

우리는 남을 누르고 짓밟는 행위가 승리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마치 갈멜산 정상에 돌로 만들어 놓은 엘리야가 사탄들을 밟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세속적인 승리와는 많이 다른 승리가 있는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입니다. 사람들 눈에는 실패한 역사처럼 보이지만, 십자가는 이 세상을 이긴 최초의 승리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상대를 넘어트리고 죽이는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몰매를 맞고 죽임을 당하는 십자가 사건이 참된 승리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이나, 자신을 거룩한 성찬의 제물로 사람들의 가슴에 새긴 십자가 사건은 세상이 깨우쳐야 할 참된 승리입니다. 성경과는 다르게 지난 2천년동안 우리 기독교회는 세상 사람들처럼 정복과 수탈에 의한 승리를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랑과 섬김의 승리의 본을 따를 때입니다.

 

3. 오늘은 주성농인교회(우슬초목사님 시무)에서 설교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82.

시편 시 61:5-8

찬송 25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름답고 멋진 글을 만나는 것은 행운인 듯합니다. 가령 이런 말입니다. “사랑은 다수와 공존할 수 없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한 영혼이고 한 마음이다. 남편과 아내가 하나이고, 그리스도와 아버지가 하나이다. 믿는 자와 그리스도도 그러하다. 사랑 안에서 <><>의 구별은 불가능하다.” 솔로몬의 아가는 이를 잘 노래하고 있다. (6:8). 범브란트, 전덕애 역, <새장을 벗어난 새의 이야기>, p. 20. 박성완, 24.4.27.

 

2. 부활절 다섯째 주일의 구약을 대신한 사도행전 8:26-40을 본문으로 빌립 집사가 가르친 전도방식을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요즘 교회의 위기를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이는 전도의 위기라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심각한 위기 앞에서도 성경의 말씀보다는 세속적인 목적과 방법을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주 4일 전도하는 교회 얘기가 국민일보에 실렸는데 억지를 부려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냉장고를 경품으로 내걸더니 요즘은 옥수수와 와플로 품목이 달라졌습니다. 지금이라도 우리 교회가 살 길을 말씀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전도 방식도 그렇습니다.

 

성경말씀은 인격적 변화를 기대하는 전도방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26-33).

성경에는 3가지의 전도방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안드레의 전도방식으로 가족과 친족을 이끌어내는 전도입니다(1:40-42). 두 번째는 사도 빌립의 전도방식인데, 그것은 자신의 친구를 이끌어내는 전도방식입니다(1:40-46). 마지막으로는 집사 빌립의 전도방식으로 진리에 굶주리는 사람을 찾아 전도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어떤 전도방식을 택하든지 모두 다 가능합니다. 다만 첫 번째와 두 번째 전도방식은 기본으로 해야 합니다. 그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으니 말입니다. 성령을 오해한 사람들에 의해서 진행된 땅밟기 전도(2010.10.24. 봉은사) 방식은 인터콥의 최목사를 비롯해서 유명 선교단체(Y)에서도 흔하게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모두 신명기 11:24-25, 여호수아 1:3, 4:18-19를 근거로 합니다. 이들은 결과 중심주의에서 나온 세속적 방법으로 인격적인 변화를 기대하는 전도방식으로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진리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눈길을 돌려야 합니다(34).

놀랍게도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목마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특히 그들 중에는 불교의 유명 강사도 있었습니다. 그는 저의 고향 친구이기도 합니다. 대학까지는 미션 스쿨을 다녔고, 저와 교회도 출석했습니다. 그러다 승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독실한 불교 스님이 되었고, 지금은 환속해서 불법을 가르치는 강사로 전국 사찰들을 순회강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에티오피아의 내시는 자기 왕국의 재정을 관장하는 고관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와 이스라엘 간의 뿌리 깊은 관계는 주전 10세기, 솔로몬 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자 멀리서 찾아온 시바 여왕 이야기(열왕기상 10)는 자연스러우며, 그 뿌리에서 태어난 친 이스라엘 에티오피아 왕국은 매년 이스라엘 절기(유월절)마다 이스라엘에 공식 사신을 파견해 왔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돌아가는 길에 성경을(이사야 53)을 읽고 있었고, 궁금해 하는 것들에 대해서 전도자 빌립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전도자는 구원에 관한 물음에 대답할 말을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35-40).

중학생 시절에 통일교 전도자들이 제가 사는 시골에 왔습니다. 교회 전도사님은 경계령을 내렸지만, 우리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한 대학생 전도자가 물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주제가 무엇이냐고요. 생전 처음 듣는 질문이었습니다. 구약은 율법을 지켜 구원받으라는 말씀이고, 신약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으라는 말씀이라 자답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시대에 할 일이 무어냐고 물었습니다. 묵묵부답이던 제게 고전 13:12을 펴서 읽어주었습니다. 지금은 눈으로 확실하게 보고 믿을 메시야가 왔다며 문선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깨우쳤습니다. 우리의 소망을 묻는 자에게 대답할 말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입니다(벧전 3:15). 전도자는 예수천당, 불신지옥만을 외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를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빌립집사는 오늘 우리에게 제대로 전도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75.

시편 시 59:10-11.

찬송 15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작곡가들이 곡을 쓸 때 자주하는 고민 중 하나가, 클라이맥스를 어디에 둘지에 관한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곡의 성격이나 작곡의 개성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가장 이상적인 방법 중 하나는, 황금 분할에 따르는 것이라고 하지요. 건축에서도 미술에서도 통용되는 이 법칙이, 음악을 구성할 때도 중요하게 쓰이고 있는 건데요. 하루라는 시간을 여러 가지 사건 일로 채워가는 우리의 삶도 어쩌면 창작과 비슷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하루 주어진 시간을 소중하고 유익한 새로운 일들로 채워 가시기 바랍니다.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9422일 방송>

 

2. 부활절 넷째주일의 복음서 눅 24:36-49을 본문으로 부활 신앙이란 무엇인가?”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후, 예루살렘에 들렸을 때 그들 무리 가운데 나타나셔서, 구운 생선을 드시고 부활신앙을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우리는 다시 묻습니다. 부활신앙이란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여전히 부활신앙을 증명하려는 헛된 노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36-40).

이틀 전 국민일보는 서울신대 교수진에서 중대한 발표를 하였는데, 이른바 창조론과 유신진화론 중에서 창조론을 지지한다는 발표였습니다. 서울신대 박영식교수가 쓴 책들에서 유신진화론을 옹호한 때문이었습니다. 창조론은 창세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과학적으로도 사실임을 변증하는 학문으로 한국 창조과학회를 중심으로 이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데 반해, 유신진화론은 진화를 과학적 사실로 인정하되, 이를 하나님이 행하신 창조의 방법으로 해석하려는 관점입니다. 저는 이런 주장은 지금까지 수없이 되풀이해 온 소모전쟁에 불과하다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부활신앙에 이르는 길을 말씀합니다. 첫째는 귀와 눈을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하셨다는 깨달음을 얻자는 것입니다. 부활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눈으로 주님을 만났던 증인들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이란 애찬을 통해서 친교를 나누신 주님에 관해 증언을 했습니다(41-43).

또 다른 부활신앙이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만찬에서 주님께서 떡을 떼어주시자 믿음의 눈이 떠진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엠마오로 내려간 것은 주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상실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나눈 애찬에서 다시 주님을 찾았고, 죽었던 믿음이 살아나고 희망도 살아난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 공동체와 애찬을 나눌 때 그곳에 찾아오신 주님의 음성을 다시 듣고, 어리둥절하기만 할 뿐 믿으려 하지 않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그들이 먹고 있던 애찬을 나누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친히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잡수신 것입니다. 그들 제자들은 이 식탁 공동체의 경험을 잊을 수가 없었고, 주님이 생각날 때마다 구운 생선을 메뉴로 가졌던 즐겁고 반가운 식탁공동체를 기억하며 담대하게 부활을 증언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신앙이란 주님과의 식탁 교제를 통해서 마음을 열어주신 것입니다(44-49).

성경을 읽는 것은 신앙의 증언들을 받아들이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고, 설교를 풀어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성만찬을 우리들 몸으로 주님의 약속을 체험하는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눈으로 읽을 수 있는 말씀, 귀로 듣는 말씀 그리고 오감으로 체득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행운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중세교회를 그린 역사나 그런 신앙소설들은, 성만찬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구구절절 묘사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성만찬을 나눌 수 없는 성도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선교여행을 다닌 생생한 기록들에서 큰 감동을 받게 됩니다. 창조신앙이나 부활신앙은 과학적인 도구에 약간의 도움만 받을 뿐,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열어주시기 전에는 전혀 무력한 것임을 깨닫고, 성만찬을 통해 강력한 신앙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3. 묵상식구 엥글러목사님(미국 위스컨신루터교회)께서 한국 방문중, 양국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68.

시편 시 58:4-5.

찬송 49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벚꽃이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할 즈음에는, 언제쯤 가장 아름다울까? 언제쯤이 그 절정기일까를 무의식적으로 헤아려 보곤 했던 것 같은데요. 그렇게 아직은 절정기가 아니라고 조금씩 조금씩 미루는 동안 어느새 절정기를 지나쳐서 조금씩 벚꽃들은 질 준비를 하고 있지요. 긴 기다림에 비해 너무 짧은 절정기 때문에 해마다 매번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벚꽃을 즐기는 마음속에는 너무 빠르고 갑작스러운 이별의 여운까지가 한데 섞여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9413일 방송>

 

2. 부활절 셋째 주일의 사도서간 요일 1:1-10을 본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말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학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은 깊은 이해 없이 중요한 낱말을 가벼운 마음으로 사용합니다. 상식적인 말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낱말들은 상식적이어서도 안 되지만, 사전적이어서도 안 됩니다. 매우 중요한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성경 언어를 흉내만 내는 경우가 넘쳐나고 있습니다(1-2).

신조어를 즐겨 쓰는 예능프로에서 자주 쓰는 말 가운데는 할렐루야!’ ‘아멘!’ 같은 말은 물론, ‘거듭났다는 말이나, ‘섬김’ ‘봉사라는 말은 아주 자주 사용하는 용어들입니다. 한편으로는 반갑고 고맙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귀중한 말이 쓰레기처럼 추하고 가벼운 말이 될 때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실업축구 구단인 <할렐루야 축구단> 선수들 예배에서 설교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설교를 끝내고 어려운 점들을 들었는데, 프로축구에서는 볼 수 없는 추한 모습이 일상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몇 년 후배인 상대팀 선수가 가래침을 뱉으며 할렐루야, 개새끼들아!”라고 욕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이 욕설로 둔갑해서 사용된 것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에게 맞대응하지 않고 정중하게 대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변절자 노릇을 거듭남이라고 해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용어는 바른 의미로 사용되어야 하겠습니다(3-7).

요한서신의 저자는 복음을 선포하는 목적을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와 사귀는 친교에 참여하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이를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서 기자는 참 포도나무인 예수께 붙어 있는 가지로써 우리 인생을 정의하였습니다(15:5).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안과 밖으로 자기 마음대로 옮겨 다닐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말해 왔습니다. 특별히 정치가들은 표를 얻겠다는 얄팍한 속임수로 교회당과 법당을 오가면서 자신들의 정치생명을 지키려는 까말레온적 신앙세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일이란 자신의 지혜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야 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빛이신 주님과 함께 빛가운데서 말하고 생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크리스천은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나 아직은 죄인입니다(8-10).

한때 예수께서 모든 믿는 자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10:4)을 근거로 영지주의자들은 구약 폐기론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구원파를 따르던 저의 친척 하나는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기에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힘쓸 일도 없다 하였습니다. 이런 주장들은 모두 잘못된 주장으로 성경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오는 잘못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모두가 죄인에서 의인으로 새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의인입니다.’ 라고 하거나 나는 더 이상 지옥권세가 힘을 쓰지 못합니다.’ 고 떠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최후의 변론을 끝낼 때까지는 두려움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 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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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61.

시편 시 56:122-13.

찬송 37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은 남의 말을 하는 것이 너무나 쉬워서, 내일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하는 것도 듣는 것도 농담처럼 가볍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느 하루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경우도 있지요. 세상의 이야기가 담긴 도서관도 대부분 월요일에 쉬는 것처럼, 우리도 오늘 만큼은 남의 이야기를 쉬고, 오직 나만의 이야기로 가득 채워서 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씨앗같이 가장 단위에서부터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처럼, 가장 가까이 있는 자신의 이야기에서부터, 보다 나은 내일이 시작될 테니까요. <KBS FM 1, 가정음악, 200946일 방송>

 

2. 부활절 둘째 주일의 행 4:32-35의 말씀으로 이상사회/理想社會의 모습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부활절 기간의 주일 성경본문은 구약을 대신해서 사도행전을 읽습니다. 이유는 구약성경에는 부활절 주간에 적절한 말씀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은 우리들 모두가 꿈꾸는 이상사회란 어떤 곳일까에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는 이상사회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32).

요즘 선거철이어서 더욱 더 행복한 삶이랄지, 잘 사는 것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요즘은 행복지수라든지 대학평가라든지를 할 때 데이터로 비교 가능한 평가방법을 시도하곤 합니다. 여기에는 주로 두 가지 데이터를 요구하는데, 하나는 양적/量的인 객관성, 성취도, 시험점수 등을 따지는 정량평가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질적/質的인 주관성, 인성, 적합성, 가능성 등의 정성평가라는 게 있습니다. 초대 기독교는 개인보다는 공동체적인 삶을 강조함으로 마음과 뜻을 하나로 묶을 뿐 아니라, 소유에 있어서도 서로 나누고 협력하는 공동체적인 삶을 지향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문동환의 <새벽의 집>이나, 원경선의 <풀무원 공동체>가 그 모델이 되었는데, 10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당시에 풀무원 공동체에는 욕심 뽑기라는 작은 벽보가 기둥마다 붙여있었습니다.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이 바로 욕심이었던 것입니다.

 

재물과 재능은 모두 내 것이 아니라는 정신이 중심에 있었습니다(33-35).

천국의 모형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10:25-37) 들려주셨습니다. 이 비유는 영생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인데, 팔을 안으로 굽히는 이기적인 사람과 팔을 밖으로 뻗는 이타적인 사람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세계 10대 부자 중의 한 사람인 워렌 버핏(94)이 있습니다. 그는 투자의 귀재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재산의 85%370억불을 5개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세 명의 자식은 대학도 졸업하지 못했다 합니다. 그는 55년 전에 구입한 집에서 살고 있고, 20년 이상 차를 타다가 최근에는 중고차를 구입했다 합니다. 재능이나 재물은 필요한 사람에게 써져야 합니다. 영원한 삶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비유는 함께 사는 세상이었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온갖 욕심으로 추하게 살다가 천국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기자는 구부로의 레위 사람 바나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36-37).

우리들 역사에는 빛나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지중해 가운데 있는 섬 구부로의 레위 사람 요셉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레위 혈통을 받은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별칭이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인 바나바가 되었습니다. 그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 곁에서 손을 잡아주고, 눈물을 같이 흘려주고, 음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자신의 밭을 팔아 사도들이 잘 사용하도록 그들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1980년대 풀무원 공동체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을 때, 부산 YWCA에 세워놓았던 시각장인인 자원봉사클럽 <등불회>가 봉사자들이 줄어들어 문들 닿게 생겼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4년의 각고 끝에 대구대학에서 공부하는 10명의 시각장애우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저는 무심코 자원봉사자 교육비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한 노인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3. 오늘 저는 주성농인교회(우슬초 목사 시무)에서 설교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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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54.

시편 시 55:15-17.

찬송 155, 15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노래책을 꺼내 좀이 기어 다니는 책장을 넘기며 노래를 부른다. 햇빛을 향해 뻗던 화초들 줄기가 내가 매일 노래 부르는 쪽으로 휜다.” 양 선희 시인의 <음악 요법>이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하는데요. 음악 요법은 절박한 마음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지요. 덤으로 화초들 줄기까지 노래가 들리는 쪽으로 휜다고 했습니다. 화초들이 노래를 더 잘 들어보려고 귀를 쫑긋 세우는 모습, 상상만으로도 참 어여쁘게 느껴지는데요. 이제부터는 우리도 노래 쪽으로 몸이 슬며시 기울어지는 그런 시간이겠지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9330일 방송>

 

2. 우리 주님의 부활절 복음서는 막 16:1-8, “부활신앙은 최상의 축복이다.”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주변의 목사들은 부활주일 설교가 가장 어렵다고 말하곤 합니다. 부활을 증명하려고 힘쓰는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신앙이란 증명할 수 있을 때만 빛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은 성령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주신대로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세 여인은 향유를 들고 주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1-4).

제가 목회 4년 차인 어느 초겨울에 부산의대 기독학생회의 수련회 강사로 3일간 양산 통도사 부근의 한 기도원에서 진땀을 흘린 일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확신이라는 주제로 부탁을 해 왔었습니다. 그때 저는 파스칼의 노름이라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이며 신학자인 파스칼이 신앙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는 잘 알려진 공식을 소개했습니다. 유대민족을 광야 40년 동안이나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게 하면서 신앙을 훈련했음에도 실패했던 신앙을, 확실하게 공식 하나로 증명함으로 믿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시도는 진행 중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석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유대인의 관습대로 죽은 지 사흘된 시신에 향유를 바르려 무덤을 찾았는데, 무덤 문을 막고 있던 큰 돌을 어떻게 굴릴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을 모를 때의 모습입니다.

 

흰옷 입은 젊은이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5-6).

태산 같은 걱정은 사라졌습니다. 큰 돌은 굴려져 무덤은 열려 있었고 한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여인들에게 주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난데없는 청년을 훗날 사람들은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그 단어 외에 다른 말을 찾을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 천사는 여인들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말들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많은 말들이 생략되어 있지만 다른 복음서들로 보완을 하면,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28:6, 24:6-7). 여자들은 그곳에 머물러 서성거릴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어디로 그리고 누구에게 가서 어떤 말을 해야 할 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신앙은 증거자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참된 신앙이란 주님의 말씀을 회상하거나 기억함으로 출발하고 완성되는 것이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을 기억할 때만 창조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24:8) 부활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를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5).

 

부활신앙은 거룩한 두려움 앞에서 초라한 자신을 직시하게 만들었습니다(7-8).

두려움이란 말은 헬라어로 포베오(φοβεω 두려워하다)는 동사로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무려 75%이상 사용되는 수동태 동사입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란 존경한다, 경외한다는 의미로도 자주 쓰입니다. 그럼으로 부활신앙이란 우리 자신이 능동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밖으로부터 우리를 움직이는 강력한 힘에 의해서 작동하는 능력이었다는 말입니다. 무덤을 찾은 여자들은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을 때, 발이 땅에 얼어붙는 것처럼 떨렸고, 이어서 환희의 전율을 느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거룩한 두려움을 체험한 많은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엘리야, 막달라 마리아,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 바울과 디모데 등입니다.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게 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크고 작은 거룩한 두려움을 우리들에게 주십니다.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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