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746(2025. 4. 27. 부활절 둘째 주일).

시편 118:16-18.

찬송 22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한 눈먼 사람이 소리쳤네. 한 눈먼 사람이 소리쳤네. 한 눈먼 사람이 소리쳤네. 어디가 길이냐 말해다오. 예수님 그에게 대답했네. 예수님 그에게 대답했네. 예수님 그에게 대답했네. 내가 곧 길이오. 내게 오라.” 복음가의 한 구절입니다. 쉽게 부를 찬양이 아니라, 오히려 깊은 사색과 결단이 필요한 가사입니다.

 

2. 부활절 둘째주일의 사도서간은 계 1:1-8세상 모든 성도들이 들어야 할 경고.”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요한 사도는 성령님을 통해서 세상 모든 교회가 반드시 들어야 할 경고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계시록의 줄거리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들어야 할 하나님의 경고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감춰져 있던 하나님의 비밀을 밝히는 까닭에 대해서 묵상해야 합니다(1-3).

계시/啓示 혹은 天啓/란 오랫동안 감춰져 있던 비밀을 밖으로 드러낸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계시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계시하셨고, 그 다음에는 제자인 요한에게 계시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계시의 정통성과 진정성을 밝히는 내용입니다. 그 까닭은 세상에는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까지도 너무나 오염되었고, 가짜 정보가 판을 치고 있는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시의 전달자가 된 요한은 이 계시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과 자신이 본 것들에 대해서 증언하겠다고 언급합니다. 그러니까 요한 자신의 계시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에 관해서만 밝히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증언하려는 내용은 자신의 창작물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것만을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시의 증언을 듣고 삶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강조합니다. 행복의 비결이 예 있다고 말입니다.

 

세상 모든 교회가 들어야 할 계시의 중심주제는 경고의 말씀입니다(4-5).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등장하는데, 이는 특정한 그 역사적 교회를 지칭/指稱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교회를 분류한 말씀입니다. 교회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는 하나님의 백성들/εκκλνσι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속 좁은 인간들처럼 세계 최고의 교회를 지향/指向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내가 속한 교회는 어떤 부류에 해당되는가에 주목하면 충분합니다. 첫 번째 에베소 교회는 첫 사랑을 잃은 교회들을 경고합니다. 둘째 서머나 교회는 환란을 겪고 있으나 죽기까지 충성하는 교회가 되라 하십니다. 세 번째 버가모 교회는 사람들을 죄짓게 하고 잘못 인도하는 것을 돌이키라 명령하십니다. 네 번째 두아디라 교회는 우상숭배로 썩어가는 것을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섯 번째 사데 교회는 무력한 채 죽어가는 교회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섯 번째 빌라델피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 면류관을 끝까지 사수하라 격려합니다. 일곱 번째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청산하고 분명한 자세를 요구하십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심판주께서 곧 오실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6-8).

성경의 종말/終末에 관한 말씀을 오해하거나 곡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에는 3가지 종말을 말씀하는데, 임박한 종말(-), 실현된 종말() 그리고 미래적 종말()입니다. 3가지 종말은 다 옳습니다. 그 중 임박한 종말이 가장 오해와 곡해에 빠졌다 하겠습니다. 곧 심판의 날이 온다는 가르침은, 온 세상의 파국을 가리키는 미래적 종말이 아니라, 우리 각 개인의 죽음으로 인한 종말을 뜻합니다. 모든 사람은 죽어야 하고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죽음의 요단강을 건너야합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강은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 순간을 마지막 날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날까지 주님과 동행하기를 기도하고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길 외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오 주여, 나를 도우소서 !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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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39.

시편 117:1-2.

찬송 2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배려(配慮)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 건 현실은 반대라는 뜻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는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거나 도와줌.”인데, 역지사지/易地思之가 딱 어울리는 대안입니다. 1세기의 크리스천들은 가난하고 병들고 억눌린 사람들을 감싸주었습니다. 세상 풍조와는 아주 다른 공동체였습니다. 21세기의 기독교회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자기중심적인 인간들의 모임이 되고 말았습니다.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했던 선한 사마리안을(10:29-37) 다시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2. 오늘 주님의 부활절의 구약성경 이사야 65:17-25을 본문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이신 야훼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부활절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꿈을 꾸게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세계를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소개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곳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곳이라 말씀합니다(17-20).

요즘 제가 사는 마을엔 집을 고치는 일로 야단법석입니다. 저도 17년째 살고 있으니까 손봐야 할 곳이 너무 많아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마음만 분주합니다. 그런데 낡은 것들을 고치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훗날 부활해서 살게 될 세상이 낡고 부서진 것이라면 걱정이 태산 같을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들이 들어가게 될 세상이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예루살렘도, 함께 어울려 살아갈 사람들도, 다 새로운 사람들이라 말씀합니다. 그뿐 아니라 더 이상 슬퍼 우는 일도 없고, 어린 아이든 청년이든 그리고 백세 노인이든 죽는 일이 없다 하십니다. 죽음이 없으니 영원한 삶이 보장된 곳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을 믿음으로 기대해야 하겠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헛수고를 하지 않는 곳이라 말씀합니다(21-23).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짓게 될 것이고, 자기 손으로 가꾼 과일 나무의 열매를 따 먹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새 하늘과 새 땅은 할 일이 없어서 무미건조한 삶이라 얘기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 아주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손으로 집을 짓고, 자신이 심고 돌본 과일과 채소를 거두어 먹을 수 있는 곳이라 말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새 하늘과 새 땅은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곳이 아니라, 부지런히 일하고 땀 흘리는 세상이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제게 물었습니다. 편히 쉴 나이에 어찌하여 힘든 농촌생활을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답했습니다. 억지로라도 일할 수 있는 곳이라서 일부러 찾아온 농촌이라고 말입니다. 일한 보상이 없는 헛 수고에 실망한 때문일 것입니다. 엿새 일하고 하루 쉼으로 충분한데 말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평화로운 곳이라 말씀합니다(24-25).

우리가 부활한 후에 만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는 곳이라 말씀합니다. 우리의 중심을 훤히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부르기도 전에 대답하시고, 우리가 청을 하기도 전에 들어주시는 참된 소통이 되는 세상이라고 말입니다. 그 뿐 아니라 늑대와 어린 양이, 사자가 소들과, 뱀이 흙을 먹는 평화의 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황금과 보석이 가득한 나라니, 고대광실 높은 빌딩이 즐비한 곳으로 생각하지만, 크게 빗나간 얘기입니다. 제가 성경을 가르친 학생 중에 시각장애를 가진 분이 있는데, 중도실명자로 대구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그가 쓴 석사 논문의 제목은 배려가 있는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을, 가진 사람이 덜 가진 사람을 배려하자는 주제입니다. 그런 나라가 천국에 가깝다고 암시하고 있습니다.

 

3.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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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32.

시편 115:16-18.

찬송 51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영화 <모감보>의 작가 프랭크 클라크(1915)는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막을 수는 없지만, 보살펴주면 슬픔이 줄어들 것이다.” 우리가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거나 도울 순 없지만, 한 사람만이라도 그의 슬픔을 덜어줄 수만 있어도 헛된 삶이 아니다. 그리도 또 다른 명언은 우리는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통해 위로받고,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통해 성장하게 된다.” 그러니 생각이 같던 다르던 함께 살면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다.

 

2. 오늘은 주님의 종려주일로 복음서 요한복음 12:20-36을 본문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를 바라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종려주일이란 주님께서 어느 해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을 때, 많은 예루살렘 시민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환영했던 것을 기념해서 이름붙인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주님은 십자가를 향하는데, 사람들은 주님을 왕으로 섬기게 될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왕을 환영하듯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찾았던 그리스인들 역시 유명인사가 되신 주님을 만나고 싶어 하였습니다(20-26).

요즘은 한국의 BTS나 블랙핑크 등은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어 그들의 자취를 찾아서 난리가 났다 합니다. 신사동의 한 식당은 BTS가 종종 식사를 하던 곳인데, 이곳엔 미국에서 단체로 관광단이 꾸려져서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2천 년 전에도 그런 모습이 이스라엘에서 일어났던 것을 알고 있습니까? 그리스에서 온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서 예수님의 제자 빌립보와 안드레에게 청을 놓았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주님은 맞장구를 치십니다. 인자가 큰 영광을 받을 때가 왔구나 하시며, 저 유명한 한 알의 밀알이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는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깝게 여기지 않고 희생하면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명하셨습니다. 나를 섬기면 나와 같이 있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그를 높이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주님의 설교는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말씀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27-33).

오늘 주님의 설교에는 주님께서 독백처럼 하시는 말씀도 있고(27), 하늘의 음성이 천둥처럼 들리기도 하였고(28-29), 이에 대한 주님의 해석의 말씀도 있었습니다(30-33). 십자가를 앞에 두신 주님의 심경을 살필 수 있는 말씀들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진 존재로써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죽음의 신호가 오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럴 경우 흔들리게 되고 심각한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우리 주님의 독백에서도 그런 것을 감지하게 됩니다. “마음이 걷잡을 수 없다.”는 말씀이 그렇고, “이 시간을 면하게 해 달라.”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그때 하늘의 음성이 들려왔고 주님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심판 때이며,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고 말입니다.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구원의 길이었습니다(34-36).

민수기 21:4-10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경험했던 한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광야에서 굶어죽을까 봐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뱀에 물려죽게 되는 일이 벌어졌을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긴 장대위에 놋 뱀을 매달게 하고 누구든지 뱀에 물려 죽게 된 자는 그 놋 뱀을 바라보면 살리라 하였습니다. 이 놀라운 놋 뱀 사건은 많은 백성을 살렸고, 훗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3:14). 놋 뱀 사건과 십자가 사건의 공통점은 구원하시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뱀에 물린 사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뿐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이 죄와 죽음에서 살아날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우리들이 가진 믿음의 근거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포기할 때만 가능한 것이 순종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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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25.

시편 114:4-6.

찬송 28. 383, 39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선행/善行이란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남이 보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이다. 선을 행할 의지가 있으면, 선을 행할 기회가 주어진다. 선행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또 다른 선행으로 선행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윤문원, 지혜와 평정, pp.156-157.

 

2. 사순절 다섯째 주일 사도서간 빌 3:8-14을 본문으로 목표가 분명한 인생을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오늘 저는 거창한 주제를 가지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내 인생의 목표는 무엇이며, 그 목표를 향해서 살아가고 있는가? 라는 주제입니다. 그리고 이에 큰 도움을 주고 있는 바울 사도의 간증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우선 목표란 무엇이며, 어찌하여 목표를 가져야 하는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19:21).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할 꿈을 품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사도의 꿈이었습니다. 꿈을 품는 것은 삶에 의미를 채우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꿈을 품도록 가르칠 책임이 어른들에게 있습니다. 제가 200011월부터 20157월까지 중국 등에서 목회자 세미나를 39주간 가졌는데, 인상적인 한 장면을 기억합니다. 하얼빈에서 목적지인 치치하얼로 가는 열차에서 현지 중학교 교사와 같이 가게 되었는데, 중국 학생들이 꾸는 꿈에 대해 물었는데, 놀랍게도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꿈에 대해서 희망에 대해서 묻지도 가르치지도 않는다는 얘기였습니다. 꿈을 꿔야하고 희망을 품어야 할 중요한 시절에 말입니다. 저의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부>에는 장래희망이 목사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목사의 꿈은 저의 어머님의 영향이었는데, 당시 제가 다니던 교회엔 여자 전도사님이 계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달려가는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12-14).

사람들은 저마다의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소박한 꿈도, 원대한 꿈도 꿀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꿈들이 한 개인이나 집안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위한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고 섬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바울 사도의 꿈은 개인적이면서도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꿈을 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달려가는 꿈이란 매우 소박한 신앙적인 꿈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려고 힘쓰셨던 꿈, 곧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하는 그 꿈을 따르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고 붙들어 주셨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대로 개인적인 구원이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특히 절망과 슬픔과 고통 속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드시 이루어야 할 영원한 구원을 이루려는 목표였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하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을 따르는 꿈을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 했습니다(8-11).

요즘 저는 청운의 꿈을 안고 동문수학했던 친구들을 자주 만나는 편입니다. 그들 중에는 나라를 구해보겠다는 애국심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던 사람들로부터, 가난과 질병에 찌든 이웃들을 위해 헌신 봉사하는 삶을 살아보겠다고 주경야독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이웃들이었습니다. 저도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낮에는 학교에 다녔고 시간을 쪼개어 두 그룹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야학에까지 참여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친구들의 모습은 제 각각이었습니다. 세파에 시달리느라 너무도 많이 달라져버린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았다고도 하였고, 그 빛나고 아름답던 꿈들을 헌신짝처럼 버린 것을 아쉽다 하였습니다. 사도는 우리와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하셨듯이, 처음 가졌던 그 꿈을 좇아서 달려가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다 던져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아낌없이 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따르는 자랑스러운 삶을 살아갔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모습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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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18(2025. 3. 30. 사순절 넷째 주일).

시편 112:4-6.

찬송 30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시인이자 작가였던 빌 코플랜드/Bill Copeland단 한 번의 인생이니까 함부로 산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변명이다.” 고 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은 당신만의 독특한 이야기를 만드는 시간이다. 당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라. 감동이 있고, 웃음이 있고, 눈물이 있고, 행복한 마무리가 있는 이야기로. 희망씨, 가슴에 새기는 한 줄 명언, p.5.

 

2. 사순절 넷째 주일의 구약성경 사 12:1-6을 본문으로 야훼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감사할 이유들을 많이 가진 사람인지, 아니면 원망과 불평거리를 많이 가진 사람인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삶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과 삶에 대해서, 사람과 하나님에 대해서 말입니다.

 

첫 번째 야훼를 향한 감사의 노래는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 때문이었습니다(1-3).

제가 개척했던 부산의 S교회에는 <감사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말끝마다 감사합니다.”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호스피스 봉사자로 부산과 서울에서 활동하셨는데, 무엇이 감사하느냐고 물었을 때, 권사님은 모든 일이 감사한 일 뿐이라 하셨습니다. 어느 날인가 깨달음을 가졌는데, 형통할 때든 힘들고 어려울 때든, 무조건 감사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 후로 놀랍게도 모든 일들이 감사로 바뀌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감사의 은총을 받으신 거라며 축하해드렸습니다. 이사야는 감사의 노래를 불렀는데, 하나님께 받은 용서와 구원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용서는 죄의 공포와 두려움에서 깨끗이 해방된 것을 말합니다. 지우개로 모든 허물을 지워버리는 것이 용서입니다. 용서의 기쁨은 죄인만이 깨닫는 축복입니다. 그리고 죄와 죽음의 질곡에서 구원받은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야훼를 향한 감사의 노래는 하나님께서 하신 큰 일 때문이었습니다(4-6).

봄이 오자 제가 사는 마을에는 집고치는 일들로 야단법석입니다. 저도 많은 일을 했습니다. 심야보일러를 기름보일러로 바꾸고, 테라스와 그 위에 놓인 야외 식탁을 수리하고 페인트칠을 했습니다. 그리고 펜스도 칠을 하고, 채전도 정리하고, 정원수도 가지치기를 하였습니다. 이웃들 외에는 누구도 칭찬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가족들에게 사진을 보냈습니다. 해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에도 보람과 기쁨이 넘치는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은 바보짓 같았습니다. 목련꽃이 하얗게 피어나고 있고, 산수유도 활짝 피었습니다. 산새들의 날갯짓도 가볍고 노랫소리는 경쾌합니다. 심지어 바람소리까지도 맑고 청아하기까지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린 아이들부터 모든 사람들이 밝은 색의 옷을 입고 자랑하듯 지나갑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마음속에 기쁨과 행복을 넣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할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살전 5:18).

누구나 감사할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마음을 읽으려 힘쓰다 발견한 것이, “범사에 감사하라.”는 경구/警句였습니다. 억지소리와 같은 경구인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감사의 마술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들은 많은 반응은, 감사할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감사하느냐는 볼멘 소리였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역설의 진리를 책으로 펴낸 켄트 케이스의 <그래도/Anyway>그래도 감사하라.”는 항목이 없습니다. 까닭은 10가지 주제 모두가 감사하라는 말에 연결되는 때문입니다. 사랑과 정직 그리고 도움과 헌신 등은 모두 감사를 바탕에 두고 있는 내용인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간절히 바라신 것 중에는 범사/凡事에 감사하는 일이 들어가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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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11(2025. 3. 23. 사순절 셋째 주일).

시편 109:29-31.

찬송 30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최소한 농촌아이들이라면 산에 들에 피어나는 꽃 이름이나 새 이름은 알아야 할 텐데, 이 아이들은 골목길에 돋아나는 풀이름도 모른다. 산에 가서 나무하는 아이는 물론 소를 뜯기면서 꼴을 베는 아이도 없다. 바구니를 끼고 들판에 나가 나물을 캐는 아이도 없고, 시냇물에 다슬기를 줍고 통발로 고기를 잡는 아이도 없다.” 권정생, 우리들의 하나님, p.128.

 

2. 사순절 셋째 주일의 복음서 누가복음 15:1-3, 11-32을 본문으로 잃어버린 것들을 찾으시는 우리 주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누가복음서의 특징을 정리한 신약개론을 보면, 누가복음서는 인도주의 사상과 보편주의 사상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와 세리 그리고 죄인들과 어린이 등 약자에 대한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1-7).

요즘은 깜빡 깜빡하는 일들이 자주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모자를 쓰고 나왔는데 어디다 두었는지 도무지 찾지를 못했는데, 한 사날이 지난 다음에 빨래더미에서 찾았습니다. 이렇듯 모자 하나도 여러 날 신경이 쓰였거든,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는 잠을 설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루는 주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인 자리에 설교를 하셨는데, 이를 지켜본 바리세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야단법석을 떠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고매한 선생이 하찮은 무지랭이들과 어울릴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저 유명한 <잃어버린 양의 비유>가 탄생한 것입니다. 100마리의 양을 치는 목자에게는 한 마리 한 마리 양이 모두 소중한 재산이었습니다. 하루에도 수 십 수백 번을 헤아리고 확인했던 양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는 우리들 인생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절대로 잃어버린 체 둘 수 없는 존재입니다.

 

잃어버린 아들 비유는 하나님 사랑의 백미입니다(11-32).

스펄전 이후 가장 유명한 설교자로 헐무트 틸리케를 거명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의 설교집 중 하나는 <기다리는 아버지>라는 게 있습니다. 성경의 초점은 망나니로 부친을 속 썩였던 둘째 아들이 아니라, 그런 아들을 기다리는 하나님께 맞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식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은 눈물로 키운다는 말이 생겨났는지 모릅니다. 어느 집의 둘째 아들은 망나니였습니다. 제 멋대로 살고 싶어 했고, 마침내 부모께 물려받을 재산을 가불받아 집을 떠나 허랑방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상거지가 되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집을 향했는데,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다음 날부터 매일 그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야말로 탕자와 같은 우리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이십니다. 언제 어디서든 아버지는 두 팔 벌여 우리를 환영하시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이런 철부지들을 사랑으로 기다리시는 것입니까?(3:16).

한 젊은 전도사님이 저의 교회에서 목회 실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아주 똑똑한 분이었는데, 제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바로 오늘 셋째 단락의 표제어와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철부지들을 사랑으로 기다리시는 것입니까?” 요즘 말로하면 애당초 우성인자를 가진 자식을 중점적으로 돌봐야지 열성인자를 폐기처분해야 당연하지 않느냐는 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을 쏟는 아버지로써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그들의 잠재력을 꽃피우도록 인내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문제의 답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존재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때문입니다. 링컨이 남긴 말 중에 하나님께서 수많은 보통 사람들을 살게 하신 것은, 그들을 사랑하시는 때문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어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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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04(2025. 3. 16. 사순절 둘째 주일).

시편 109:7-10.

찬송 58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저의 막내가 캐나다 시민권을 신청할 서류를 부탁해 왔습니다. 손자들이 공부를 하는 동안에 필요해서라 합니다. 그런데 미국의 시민권제도는 지난 160년간 수정헌법 제14조에 의해, 미국에서 출생하였거나, 미국인에 의해 출생한 경우 출생과 동시에 미국 시민권과 이전의 국적을 포함 복수 국적자가 되었는데, 이런 시민권제도가 폐기될 것이라 합니다. 세상의 시민권은 여러 가지 이해관계에 따라서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불확실한 제도임이 확실해졌습니다.

 

2. 사순절 둘째 주일의 사도 서간문 빌 3:17-4:1을 본문으로 우리가 가진 시민권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나라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시민권이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희망하는 시민권이란 어느 나라에 속한 것입니까? 그리고 그 시민권은 안전합니까?

 

사도 바울은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자기 자신을 모델로 삼고 따르라 말씀하십니다(17).

요즘 우리가 사는 지구촌은 엄청난 폭풍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지사 덕 포드/ Doug Ford의 말처럼, 단 한 사람 트럼프가 일으킨 폭풍입니다. 적어도 지난 70여 년 동안 이른바 미국에 의한 평화/ Pax Americana를 당연시 생각하는 세계인들에게, 엄청난 화를 내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의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군사적 희생에 대해서 알아주지 않는 데서 오는 피로감은 물론 미국의 경제가 아직도 세계 1위임에도 불구하고, 무역에서 적자를 내는 것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듯합니다. 그런데 걱정스러운 것은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으로 양분돼 있는 체제까지도 부정하듯,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는 선을 넘나드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완전히 다른 말씀으로 우리를 충고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만을 의지하는 사람인 자기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세상 중심 자기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18-19).

신앙생활이란 매우 독특한 특징들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사랑하는 삶이 그것입니다. 의미 있는 고난을 자원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제가 자주 언급하는 인물들이 그랬습니다. 풀무원의 원경선 선생님이나 YMCA 총무 현동완 선생님, 전영창 교장선생님과 장기려 박사님 같은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일부러 힘들고 어려운 삶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더 힘들어하는 약자와 조국의 미래를 위해서 말입니다. 물론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와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 중에서 삶의 의미를 택하는 것은 순전히 선택자의 권리입니다. 사도는 십자가의 길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세상 영화는 일장춘몽과 같으나, 십자가의 열매는 영원무궁한 행복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평화롭고 행복하다면, 누군가 이런 세상을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 시민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위대한 삶을 향해 걷는 것입니다(20-21).

미국에 처음 유학 갔을 때 저의 멘토이신 교수님 댁에서 한 학기 내내 주말이면 식사를 대접받았습니다. 그때 사모님께서 미국에 살면 미국사람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곳이 세상인데 세상 사람처럼 살아야 맞지 않나 싶은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우리들 신앙인들의 어려움이 예 있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세상살이는 영원하지 않고 머지않아 떠나갈 나그네살이 라는 게 맞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세상에서 살고 있는 한은 세상살이에 충실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살이는 하늘나라 시민으로 완성되어 가는 훈련과정이라고 말입니다. 마치 가나안에 정착하기 위해 광야생활 40년의 훈련이 필요했듯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절실해 지는 이유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기를 원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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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97(2025. 3. 9. 사순절 첫째 주일).

시편 107:41-43.

찬송 49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잘 사는 거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요즘 많이 쓰는 말입니다. 한 인간으로 서건 한 신앙인으로 서건, 의미가 없는 삶이라면 헛된 것일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의미 있는 삶을 살려고 힘을 씁니다. 자신에겐 박/하게, 그러나 남에게는 후/하게 살았던 현동완 YMCA 총무나 원경선 풀무원 원장, 그리고 <강아지 똥>을 쓴 권정생 안동 일직교회의 종지기처럼 말입니다.

 

2. 사순절 첫째주일의 구약성경 신 26:1-11을 본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해서 탐구하려는 자세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대신 남들과 비교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곤 합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엇을 주셨는지에 대해서 묵상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아갈 터전을 주신 것을 감사하며 기억하게 하십니다(1-4).

17년 전 2008년 은퇴를 7년 앞두고 내 집을 하나 마련하겠다고 아산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너른 잔디밭이 있는 집을 희망해서 그런 집을 골라 구입했는데, 2년 된 새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1년에 서너 번 오더니 몇 년 전부터는 한두 번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채전과 꽃밭 그리고 잔디밭에 쉼 없이 돋아나는 잡풀을 뽑는데 죽을 맛이라고 말입니다. 은퇴 후 10년을 혼자 살다시피 하는데 제게는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20여 년간 고향집에서 지낸 것을 제외하면, 평생을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등을 기댈 곳이 그리웠고, 텃밭을 일구고 잔디를 깎는 소일거리 등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내 이름으로 등록된 터전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과 즐거움인지 모릅니다. 하물며 남의 땅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이야 훨씬 더했겠지요. 그러나 현실에 적응하느라 감사와 기쁨은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감사제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도록 하는 장치였습니다(5-8).

우리 인간의 삶에는 통과의례라는 것이 있는데, 태어남과 어른이 됨, 그리고 결혼과 장례가 그것들입니다. 이런 통과의례의 중심점은 변화하는 인생의 의미를 감사로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태어남은 부모의 은덕을, 어른이 되는 것은 스승과 사회의 보호를, 결혼은 가정의 신성함을, 그리고 장례는 자연으로의 순환을 기억하는 의식입니다. 이를 이스라엘 신앙에서는 감사제를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햇곡식을 거둔 후에 드리는 첫 추수절로 초실절과 유월절에서 50일이 되는 오순절이 그런 절기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념하는 생일이나 성인식과 결혼식과 장례식 등도 감사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본래의 의미나 정신은 퇴색해 버리고, 부모나 스승 사회나 국가에 대한 감사보다는 자기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잘못된 풍조가 불어 닥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이기적인 개인주의가 판을 치는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살게 하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9-11).

가나안 땅을 밟았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의 실체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말씀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막과 다름없는 불모지/不毛地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말할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에 배신감마저 들었습니다. 제가 묵었던 옛 예루살렘 성내의 루터란 게스트 하우스의 관목/灌木과 잔디는 바닥에 비닐류를 깔고 흙을 부어 심었다 했습니다. 이런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소개한 첫 성경 구절은 출 3:8이었고,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예레미아와 에스겔에 언급되었습니다. 오랜 번민 끝에 깨우쳤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 실재적인 묘사가 아니라 신앙적인 묘사라고 말입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 만 바라볼 수 밖이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실재와는 다른 이 세상에서 가장 척박한 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외엔 다른 어떤 것에도 눈을 돌릴 수 없는 땅이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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