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809.

시편 119:171-173.

찬송 53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복잡한 완행열차 안에서 자리 양보를 받은 권정생은 양보한 여인에게 혹시 교회 다니느냐 물었고, 반색하는 그 여인은 시골교회 집사라고 했다. 어느 날 바쁘게 농사일에 정신이 없는데, 거지 한 사람이 구걸하러 와서 퉁명스럽게 내쫓았다고 한다. 그런데 대문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이 꼭 예수님을 닮아서 쌀 한 바가지를 퍼들고 나가보니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대성 통곡을 했다 한다. 그 뒤로는 거지는 물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보이게 되었다 한다.     권정생, 우리들의 하나님, pp.116-117.

 

2. 성령강림절 후 셋째 주일의 사도서간문 갈 5:1, 13-15을 본문으로 그리스도인이 누릴 자유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자유란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능력이며(Freedom), 동시에 억압하는 제한이 없는 상태를(Liberty) 말합니다. 이를 기독교에서는 원죄/原罪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 해석합니다. 이 거룩한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참된 자유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1).

상해 임시정부를 폄하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친일파의 전형적인 주장입니다. 그들은 열혈 독립 운동가들의 희생과 노력에 의해서 광복을 찾은 것이 아니라, 미국 등 세계열강의 공로로 해방을 맞았다고 주장합니다. 일견 맞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조국을 되찾으려는 선열들의 노력과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세계열강에 의해서 자주권을 상실한 민족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넓은 틀에서 생각하면,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죄로부터의 자유라고 하겠습니다. 죄의 속박에 붙잡혀 있는 동안은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주차 실수로 다른 자동차에 흠집을 냈습니다. 목격자도 CCTV도 없었습니다. 그냥 도망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피해 자동차에 저의 전화번호를 남겼고 수리비를 지불하였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둠에서 광명을 찾는 자유를 실감하였습니다.

 

주어진 자유를 육정이 아니라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라 명하십니다(13).

하나님이 주신 자유는 거룩한 책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고속도로(아우토반/ Autobahn)는 약 70%18,000km가 무제한 속도이지만, 권장속도는 130km입니다. 저를 초청한 바바리안 주의 작은 마을 노이엔데텔샤우의 베커 박사는 사랑하는 아내를 이 아우토반에서 잃었다 술회했습니다. 고속도로에서 지킬 매우 간단한 약속을 어긴 불법 차량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무제한적인 자유는 엄중한 책임이 뒤따라야 합니다. 경계해야 하고 명심 또 명심할 것은 육정/肉情이라 했습니다. 존경까지 받던 권력자들이 가장 쉽게 빠지는 함정은 육정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권세의 힘을 약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종노릇으로 사용해야 했습니다. 대부분의 권력자들은 처음에만 반짝 시늉을 낼 뿐, 곧 바로 권력자의 본색을 들어내곤 하였습니다. 초심을 잃지 말라 귓전에 소리쳐도 소용이 없곤 했습니다.

 

이웃 사랑은 모든 율법의 핵심입니다(15).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두 가지 지켜야 할 대/계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6:4-9),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사람들은 자신의 이웃에 대해서 질문을 해왔습니다. 마치 자신의 이웃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지식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고, 종교 지도자들이 그랬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얘기를 들려주셨습니다(10:25-37). 저도 이 말씀을 들었던 어린 시절에는 저만은 예외인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철이 들면서 저 역시 사마리아 사람처럼 손을 내밀어야 할 이웃이 너무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작은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도, 손을 잡아주고 곁에 앉아 주어야 할 이웃들도 너무 많습니다. 어린 자식에게 자랑까지는 아니더라도 든든한 부모가 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이들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따뜻한 손을 뻗을 이웃들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802.

시편 119:150-152.

찬송 28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밥을 굶으면 살 수 없지만,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서 살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짐승처럼 먹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존재라는 데 문제가 있다. 사람의 몸은 자랄 만큼 자라면 성장을 멈추지만, 마음은 생명이 다할 때까지 여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제 마음속을 채우기도 하고 비워 내기도 한다. 마음속에 새로운 바깥 지식을 넣어 주는 책이 있다면, 그 책은 이로운 책이다. 이로운 책은 낡은 지식을 버리게 하고 그 자리를 새 것으로 채워준다. 그런데 자기를 비워 내 마음속을 밝고 맑게 비워주는 책도 있다. 그런 책은 슬기로운 책이다. 슬기로운 책은 두루 통하며 어울리는 체험을 하게하고 제 고집을 버리게 한다.

윤재근, 살아가는 지혜는 가정에서 배운다, p.134.

 

2. 성령강림절 후 둘째 주일의 구약성경 사 65:1-9을 본문으로 하나님이 벌하시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나이 탓인지는 몰라도, 죽음 후에 대면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생각하곤 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이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난 후에 벌어질 일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벌 받을까, 받지 않을까 어느 쪽을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심판하실 대상들은 두 종류의 인간 군상들이었습니다(1-5).

모든 인간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심판 정에 서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관문 앞에 서는 때문입니다. 특별한 것은 이전에 하나님께 빌지도 않던 자들과 찾지도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자들을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귀 기우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오랫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나, 오히려 하나님을 배신하고 제 멋대로 굴어 하나님의 화를 돋우는 백성들, 마침내 하나님의 동산에서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고, 부정한 음식을 먹는 거만한 무리들도 만나시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 정에는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사랑하셨으나, 하나님을 실망시킨 사람들과 함께, 이전에 깊은 교제도 없었던 이방인들까지도 만나시게 되는 자리라고 말입니다. 마치 십자가상에서 만나 대화하는 예수님과 두 강도의 모습이 연상되는 장면처럼, 그들은 첫 대면이었지만, 엇갈린 엄청난 판결을 받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행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6-7).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재판은 소위 해석상의 차이로 공정성을 잃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필요에 따라서 문자적인 해석이 있는가하면, 편파적인 해석으로 인해서 무전유죄/無錢有罪, 유전무죄/有錢無罪라는 상식과 원칙에서 벗어난 판결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법의 제정 정신이 증발해 버린 혼란의 시대가 지배하는 세상을 살게 된 것입니다. 17, 18세기에는 마녀사냥이라는 종교재판이 판을 치고 있었고, 나치와 파쇼적 지배자들은 인민의 이름으로라는 인민재판을 감행하고 있었습니다. 2010년대 베트남에서 인민재판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큰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포승줄에 묶여 끌려나온 죄인에게 논고를 하자, 배석한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반대 주장을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벌어질 최후의 심판은 소행/所行대로 공명정대하게 진행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존재에게 적절한 평가를 받게 할 것입니다(8-9).

인상 깊은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유명한 한 미국인 판사가 있습니다. 교통법규 위반 등에 불려나온 피고인에게 그 동기와 과정을 주의 깊게 듣는 것으로 유명하고, 특히 참전용사이거나 가족일 경우 매우 관대하고 따뜻한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의 심판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미국의 전설적인 야구선수 베이브 루스/Babe Ruth가 마약과 도박혐의로 재판정에 섰을 때의 판결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영웅적인 존재도 얼마든지 약점이 있다는 것,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의 명성이 감춰져서는 안 된다는 판결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그런 따뜻한 인간적인 면모가 참작되리라 기대합니다. “즙이 배어나올 듯 싱싱한 포도송이를 보면, 복이 담뿍 들었다. 터뜨리지 말아야지 하지 않느냐? 나도 망그러뜨리지 아니하고 그대로 위하리라.” 하나님의 심판을 예상해 보는 대목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95.

시편 119:129-131.

찬송 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괴테의 <충고>라는 시가 있습니다. “너는 자꾸 멀리만 가려느냐? 보아라. 좋은 거란 가까이 있다. 다만 네가 잡을 줄만 알면, 행복은 언제나 거기 있나니.” 괴테는 행복이 저 구름 너머에 또는 저 높은 산 너머에 있는 줄 아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놓는 충고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행복은 우리들 삶에 셀 수 없이 많이 널려 있는데 잡지 못할 뿐이라고.

 

2. 성 삼위일체 주일의 복음서 요한복음 8:48-59을 본문으로 성경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신앙에 관한 말씀들은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는 황당무계/荒唐無稽하다 할 수 있습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젊은 예수께서 수천 년 전의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다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이를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신학적인 작업입니다. 결국 <삼위일체>라는 신학의 풀이는 믿음으로 접근하라고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1세기 유대 갈릴리에 혜성처럼 나타난 예수님은 유대 사회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48-51).

갈릴리 주변을 수 천 수만의 사람들로 들끓게 만들었던 젊은 예수는 온 나라 사람들을 주목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13) 직업적인 종교지도자들은 물론 일반 대중들의 신앙을 흔들었고, 산상수훈의 말씀들은(5-7)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던 사람들에게 신선한 청량제와 같았으며, 기존의 율법이해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준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즉결 처단하려고 했을 때(8:1-11) 하신 말씀이나, 영생에 이르는 구체적인 해석(10:25-37)은 사람들의 답답했던 마음을 열어젖히기에 충분했습니다. 병든 이들을 고쳐주시고, 배고픈 이들에게 음식을 나누시는 모습에서는 천국이 다가왔음을 실감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구약에서 예언하였던 메시아의 출현을 상상하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당시의 유대 사회는 다윗과 같은 왕권을 가진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다는 말씀에서 그들은 엄청난 혼란을 느꼈습니다(52-59).

어느 시대나 영웅 숭배나 초인사상이 있어왔습니다. 그 같은 인물이 나타나서 희망이 사라진 세상에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모든 불의를 물리치고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주기를 기대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행적에서 사람들은 이 같은 초인사상을 품다가도 회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기득권 중심의 세상 질서를 파괴하는 듯한 가르침과 행동이 아니라 가난하고 병든 세상에서 차별받는 사람들을 옹호하고 힘을 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미쳤거나 마귀 들린 사람으로 여론몰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신앙의 영웅 아브라함과 비교하게 되었고, 예수는 주저 없이 아브라함이 태어나기도 전에 존재하였고, 아브라함은 자신을 보려는 희망을 가졌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유대 지도자들은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고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이 신앙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인정하는 교파들 중에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만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결과 그런 교파에서는 사도신경이나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협의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광의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이 명시적으로 금하는 것만 먹지 말아야 한다는 이들과, 성경이 금하지 않은 것들은 먹어도 된다는 이들의 차이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다양한 이해들을 잘 정리해 둔 것이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신학이 없는 교파에서는 많은 이단자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 하나님으로 일하고 계심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삼위요 일체인 신학은 부정할 수 없는 성경의 중심사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88.

시편 119:109-111.

찬송 17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50년도 훨씬 전에 첫 번째 신학생 실습을 했던 옛 교회에서 제게 신앙지도를 받았다는 육순을 넘긴 초로의 할매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곤 어떻게 사는 것이 헛되지 않은 삶이냐 물었을 때, 엘리자베스 E. 디킨슨의 시가 생각났습니다. “제가 만일 한 가슴의 깨어짐을 막을 수 있다면, 저의 삶은 헛되지 않아요. 제가 만일 한 생명의 아픔을 덜어주고, 고통 하나를 식혀줄 수 있다면, 그리고 또한 힘이 대해가는 참새 새끼 한 마리를 그 둥지에 다시 올려 줄 수만 있어도, 저의 삶은 진정 헛되지 않아요.” 헛되지 않은 삶은 아주 작은 관심과 배려만으로도 만들 수 있지 않겠냐고 말입니다.

 

2. 성령강림절의 행전 2:14-21을 본문으로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재하실 때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베드로를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지를 똑똑히 목도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님은 두려움에 떨며, 무력감에 숨어있던 제자들을 역사 속에 등장시킨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 오신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담대하게 세워주셨습니다(14-15).

우리는 초대 기독교회의 현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스승을 십자가에 죽임 당하는 절망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사흘만에 부활하신 주님은 40일 동안 지상에 머무셨지만, 매우 적은 사람들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신 것입니다. 목자잃은 양떼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1:4).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고, 숨을 죽이고 조용히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찾았던 마가의 다락방은 120명의 성도들이 지내기에는 매우 작은 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하셨던 말씀만을 의지하며 기도하며 기다렸다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오셨고 거기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내렸는데, 뜨거운 불꽃과 강한 바람 속에 그들은 성령에 취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에 오신 성령님은 구약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였습니다(16).

신앙생활을 오래 해 온 사람들은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해서 수도 없이 많은 얘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구약은 예언이고 신약은 성취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의 계획과 완성이라는 준비된 내용이라고 말입니다. 1960년대 초반에 통일교회가 기승을 부릴 때, 그들의 전도자들이 방방곡곡을 누비며 기존의 교회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들에게 붙잡혀서 난생 처음 시험에 들뻔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구약/舊約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다 가르치고 있고, 신약/新約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가르친다. 그러나 새 시대인 지금은(고전 13:12)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성약/成約의 시대라.”고 말입니다. 얼마나 교묘하게 성도들을 유혹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언의 말씀인 구약과, 성취의 말씀인 신약으로 구성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앙이 흔들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베드로는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무엇을 말씀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17-21).

요엘 선지자는 남왕국 유다의 제9대 왕 요아스가 통치하던 기간인 B.C.835-796년까지 사역한 선지자입니다. 요엘 선지자는 신약에 등장하는 세례요한과 비교되는 인물로, 시대의 불의와 야합하지 않는 강직하고 정의감에 불타는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유대 광야에서 40년동안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체험한 유대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은총을 너무 멀리 있다 생각하고, 가까운 곳에서 유혹하는 우상에 흔들려서 우상숭배를 일삼고 있었습니다. 요엘은 그 시대를 향해서 회개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저 유명한 야훼의 날을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너희 아들과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고 남종과 여종들에게도 예언을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언과 환상이란 새로운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절망과 두려움 한 복판에서 미래를 보았던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81.

시편 119:88-90.

찬송 37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노자/老子의 사상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 한다. 인위적인 것을 피하고 자연의 순리대로 살 것을 주장한다. 그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여린 것이 가장 단단한 것을 뚫는다.” 세상엔 참 흥미로운 것이 많다. 대체로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이기지만, 정반대의 의외성/意外性도 있다. 동물의 제왕/帝王이라는 사자가 두려워하는 것은 모기라 하며, 거센 바람보다는 따뜻한 바람이 두꺼운 사람의 외투를 벗기니 말이다.

 

2. 부활절 일곱째 주일의 사도행전 1:12-26을 본문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스승 예수님을 유대 지도자들에게 팔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40일째 되던 날 승천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목자 없는 교회가 되었으나 주님은 성령께서 오셔서 지도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 성령의 오심을 간절히 기도한 성도들은 120명이었습니다(12-15).

초대 교회 이래로 하나님의 교회는 성령님의 지도를 받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가 전에 일러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라.”(1:4)하셨는데 보혜사 성령께서 오실 것을 확인하신 말씀입니다(14:15-31). 주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과 다시 살아나길 것에 대해서 적어도 3번 이상을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미 말씀을 마음에 새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승천하시게 되자, 그들은 고아와 같은 자신들을 발견하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변경되거나 중단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속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것입니다. 이제 성령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특별히 누가문서(누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합친 용어)는 이 성령 시대를 교회의 시대라고 암시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창립 멤버들의 첫 과제는 가룟 유대의 자리를 채우는 일이었습니다(16-26).

초대교회를 대표한 베드로는 주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의 경위를 자세하게 보고합니다. 그는 주님을 은 30량에 팔아 밭을 산 것과, 스스로 목을 매어 죽어 그 땅에 묻힌 것, 그리고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을 뽑아 가룟 유다를 대신할 것을 성경에서 이미 예언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그들 가운데 오신 성령님의 지도에 힘입은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겉으로는 사람들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성경에 이미 예언되었던 것이며(69:25, 109:8),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뿐이었습니다. 물론 초대 하나님의 교회는 제 구실을 하기도 하고, 그 반대일 때도 있었지만, 그 또한 숨길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사바와 맛디아가 천거/薦擧되었고, 맛디아를 사도로 선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이 완전한 인격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아님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도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대통령 선거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만, 교회의 일꾼을 선출하는 것도 절차와 방법에 있어서 완벽한 결과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 역시 죄인 중에 속하는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인간에게 지나칠 정도로 완전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조금 더 나은 인물은 있을 수 있으나, 절대적인 인물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제가 재직 중일 때 한 분 장로님이 어느 성균관 직속 향교에서 효자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단도직입적/單刀直入的으로 물었습니다. “장로님은 당신 자신을 효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답은 아닙니다. 효자가 없는 세상이다 보니 효자노릇 하라고 주신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 역시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를 잘 알고 계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충성을 다하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74(2025. 5. 25. 부활절 여섯째 주일).

시편 119:67-69.

찬송 39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중국의 격언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기적은 하늘을 날거나 물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다.” 기적이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그 어떤 사건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걷고, 푸른 하늘과 수평선을 바라보며, 새들의 노래를 듣는 것이 참된 기적이라는 뜻이리라. 일어나 일하고 노래하는 기적들 속에서 살고 있음을 발견해야 하겠다.

 

2. 부활절 여섯째 주일의 복음서 요한복음 16:25-33을 본문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려면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말은 세상의 풍조를 극복하고, 크리스천의 삶을 산다 라는 의미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 풍조를 거부하고,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신 주님은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32-33).

지금은 옛날 동요처럼 생각됩니다만, 1970년대엔 <We shall overcome>이란 노래가 교회와 대학가에서 많이 불렸습니다. 1절만 옮겨보겠습니다. “We shall overcome. We shall overcome. We shall overcome some day. Oh deep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 day.” 이 노래의 배경은 1955년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버스 승차거부 운동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저항운동은 비폭력적이었지만, 1년 후 미 연방 최고 법원은 인종차별의 위헌성/違憲性을 인정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다는 말씀은, 세상 안에 가득 차 있는 죄와 죽음의 영원한 사슬을 푸시고 참된 자유와 해방 그리고 구원을 가져오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승리는 악에게 지지 않는 일이며, 마침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12:21).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하면 얻는 그 날이 오리라 예언하셨습니다(25-28).

신약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화해자 역할을 하는 중보자/μεσιτης 라는 개념이 6곳에 나오는데, 그를 예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딤전 2:5, 8:6, 9:15). 로마 가톨릭교회나 성공회에서는 예수님과 더불어 성모 마리아나 성인들이 이런 중보자로 믿는 것은 잘못이며, 조직신학의 대가 박형룡박사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12-14장을 요약하면서 신성과 인성을 가진 분으로 무죄한 분만이 중보자의 자격을 갖는다 서술하고 있으며, 고신 55회 정기총회에서는 중보기도 라는 용어를 사용금지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당신의 뜻대로 응답해 주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 크리스천에게는 위대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서 계심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길이었습니다(29-31).

우리들 크리스천이 가진 가장 확실하고 강력한 힘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써 세상에 오셨고, 우리들 인간과 세상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 주신 구세주가 되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주님과 같이 부활할 것을 믿으며,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을 주재하실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외에 잠시 머무는 땅에서의 행복이나 보람과 기쁨은 지엽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일반종교가 현세적인 축복을 강조하고 인간 중심적 구원을 기대하는 것에 반해서, 기독교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 구원과 내세적인 복락을 지향하는 차별성을 말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구원하기에는 무력한 존재이며, 오직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믿고 의지하는 길 뿐임을 말씀하고 있기에, 이런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신앙의 신비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1980년대 초 부산 남천동 분도수녀원을 몇 차례 방문하였을 때, 그분들의 최고 계율이 나그네 접대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나그네를 섬기는 기쁨을 깨달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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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67.

시편 119:46-48.

찬송 23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불행한 사람은 갖지 못한 것을 사모하고, 행복한 사람은 갖고 있는 것을 사랑하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 교수 하워드 가드너의 명언이다. 많이 가져도 마음이 여유롭지 못한 사람과, 적게 가져도 마음이 여유로운 사람, 누가 행복한 사람인지, 그리고 누가 불행한 사람인지, 그걸 깨닫고 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2. 부활절 다섯째 주일의 사도서간 요한 계시록 21:1-7을 본문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저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새롭게 살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새로운 나라에서 살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나라를 말하며, 또 그 나라는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요?

 

우리 시대 현대인들이 갈망하는 세상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 합니다.

선거철이면 그 시대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의 기대치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한 때 우리나라는 3만 불 시대를 꿈의 목표로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는 매우 소박한 구호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잘 먹고 잘 살게 하겠다.”는 아주 평범하지만 원론적인 구호가 그것입니다. 70년대 새마을 구호에서 들렸습니다. 동국대에 양주동박사가 있었는데, 그 분의 주례사에는 잘 먹고 잘 살아라.”는 말이 꼭 들어가 있었다 합니다. 그런데 덕담처럼 들리는데 사람들은 크게 웃었는데, 까닭은 제 욕심만 부리는 사람에게 하는 욕설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잘 사는 기준 중의 하나가 잘 먹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너무 많이 먹지 말고 적당히, 너무 맵지도 짜지도 않으며, 아무 것이나 덥석덥석 먹지 말고, 이렇게 제대로 잘 먹기만 해도 행복한 세상을 살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생긴 말이 밥이 보약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세상이었습니다(1-4).

성경에는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한 순간도 예외 없이 세상을 섭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살피시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온갖 문제들로 고통이 가득합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악마/사탄이 침투했다 말씀하십니다(3:1-21). 물론 악마의 기원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다만 악마가 하는 일, 인간을 유혹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을 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문제를 더 많이 일어나게 하는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일인데, 곧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사랑과 자비는 풍성하지만,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일만 남아 있다는 것이 유대교의 쉐마가 가르치는 중심점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세상이었습니다(5-7).

새로운 세상을 말씀하시는 성경은, 재창조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천국 문 앞에서 한국 여인들 때문에 긴 줄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얼굴을 대조/對照하는 천사들이 한국 여인들이 공사/工事를 너무 많이 해서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세상은 완전히 다른 창조나 재창조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은 세상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목마른 사람이 없는 세상이고, 병든 사람이 없는 세상입니다. 압제자가 없는 세상이고 기우러진 운동장이 없다는 말입니다. 맹수들이 어린 사슴과 토끼와 어울리는 나라가 되도록 고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제자리를 잡는 작업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들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이 땅위에서의 노력은 불완전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평화와 감사 그리고 기쁨으로 가득 찬 예상 가능한 나라를 꿈꿀 수 있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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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60.

시편 119:28-30.

찬송 21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윤동주가 사랑했던 시인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Paul Valery(1871-1945)는 이런 명언을 남겼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한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2. 부활절 넷째 주일의 행 20:17-35을 본문으로 바울의 고별 설교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무엇이든 마지막이라는 말이 붙으면 까닭 없이 숙연해지고 머뭇거려집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유언과도 같이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에서 밀레도까지는 약 45km나 되는데, 장로들을 밀레도까지 불러서 고별설교를 한 것입니다.

 

바울 선교의 처음과 나중에 깊이 관여한 분들 앞에서의 고별설교였습니다(17-24).

유서를 써 보신 분들이라면, 그 대상은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뜻을 같이 했던 동지가 첫 대목에 오를 것입니다. 바울 사도에게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사도는 그들이 자신의 선교에서 겪었던 기쁨과 눈물의 의미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들을 추억했습니다. 첫째는 유대인들의 음모로 인한 시련이었으며,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회개의 설교를 했던 것도 추억했습니다. 셋째는 성령의 지시로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계획이 매우 위험한 것인지를 알리고 있습니다. 넷째는 사도는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의 무엇이며, 그 중대성에 대해서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충실하게 짊어질 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사도의 고별 설교는 시종여일하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결연한 삶의 여정을 알리고 기도의 도움을 받으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짊어질 고난의 멍에를 피하지 말자고 권고합니다(25-35).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만사형통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달랐습니다. 저의 집에서 1km 떨어진 아산 패밀리 풀장 옆에는 오석비문이 있는데, 프랑스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지 1년도 안 된 젊은 신부님이 순교지로 끌려가면서 쉬었다는 기념비입니다. 수년을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서품까지 받은 신부님이 채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가까운 가족들에게서부터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백해무익하다는 평가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현대 목회자들이 명심해야 할 경구입니다. 어둠 속에 유폐되어 복음의 가치가 높이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돌봐야 할 양떼를 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말씀으로 이 시대의 가슴들을 태워야 하는 때문입니다.

 

설교자인 사도와 그곳에 있던 장로들은 눈물의 기도로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36-38).

나이 탓인지는 몰라도 복음을 전하는 도중에 죽을 수 있으면 영광스럽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중국에서 그리고 베트남에서 현지 목회자들을 가르치다가 공안의 습격을 받아 정신없이 도망가던 일화들이 있습니다. 기쁨에 넘친 젊은 전도사님들이 신학교 기숙사에서 조반을 먹기 전에 마을을 돌며 찬송을 불렀던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제가 강의하는 시간을 노려서 6명이 강의실로 습격한 것입니다. 저는 외국인이어서 쉽게 체포는 못하고, 현지인들만 6명을 체포해 갔습니다. 그 틈에 내몽고로 피신을 해서 그곳의 성도들을 가르쳤습니다. 베트남에서는 현지 교회지도자의 친 동생이 공안에 고발을 해서 그들이 교회당으로 밀어닥친 것입니다. 다행히 사전에 입수한 정보로 저와 통역은 호치민으로 가는 일반버스로 탈출할 수가 있었습니다. 세상은 복음을 필요로 하고 있지만, 거부하는 세력은 여전히 강한 힘으로 장벽을 치고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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