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760.

시편 119:28-30.

찬송 21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윤동주가 사랑했던 시인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Paul Valery(1871-1945)는 이런 명언을 남겼다. “당신은 당신이 생각한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2. 부활절 넷째 주일의 행 20:17-35을 본문으로 바울의 고별 설교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무엇이든 마지막이라는 말이 붙으면 까닭 없이 숙연해지고 머뭇거려집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유언과도 같이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에서 밀레도까지는 약 45km나 되는데, 장로들을 밀레도까지 불러서 고별설교를 한 것입니다.

 

바울 선교의 처음과 나중에 깊이 관여한 분들 앞에서의 고별설교였습니다(17-24).

유서를 써 보신 분들이라면, 그 대상은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뜻을 같이 했던 동지가 첫 대목에 오를 것입니다. 바울 사도에게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사도는 그들이 자신의 선교에서 겪었던 기쁨과 눈물의 의미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들을 추억했습니다. 첫째는 유대인들의 음모로 인한 시련이었으며,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회개의 설교를 했던 것도 추억했습니다. 셋째는 성령의 지시로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계획이 매우 위험한 것인지를 알리고 있습니다. 넷째는 사도는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의 무엇이며, 그 중대성에 대해서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충실하게 짊어질 것을 다짐하고 있습니다. 사도의 고별 설교는 시종여일하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결연한 삶의 여정을 알리고 기도의 도움을 받으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짊어질 고난의 멍에를 피하지 말자고 권고합니다(25-35).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만사형통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달랐습니다. 저의 집에서 1km 떨어진 아산 패밀리 풀장 옆에는 오석비문이 있는데, 프랑스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지 1년도 안 된 젊은 신부님이 순교지로 끌려가면서 쉬었다는 기념비입니다. 수년을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서품까지 받은 신부님이 채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가까운 가족들에게서부터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백해무익하다는 평가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현대 목회자들이 명심해야 할 경구입니다. 어둠 속에 유폐되어 복음의 가치가 높이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돌봐야 할 양떼를 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말씀으로 이 시대의 가슴들을 태워야 하는 때문입니다.

 

설교자인 사도와 그곳에 있던 장로들은 눈물의 기도로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36-38).

나이 탓인지는 몰라도 복음을 전하는 도중에 죽을 수 있으면 영광스럽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중국에서 그리고 베트남에서 현지 목회자들을 가르치다가 공안의 습격을 받아 정신없이 도망가던 일화들이 있습니다. 기쁨에 넘친 젊은 전도사님들이 신학교 기숙사에서 조반을 먹기 전에 마을을 돌며 찬송을 불렀던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제가 강의하는 시간을 노려서 6명이 강의실로 습격한 것입니다. 저는 외국인이어서 쉽게 체포는 못하고, 현지인들만 6명을 체포해 갔습니다. 그 틈에 내몽고로 피신을 해서 그곳의 성도들을 가르쳤습니다. 베트남에서는 현지 교회지도자의 친 동생이 공안에 고발을 해서 그들이 교회당으로 밀어닥친 것입니다. 다행히 사전에 입수한 정보로 저와 통역은 호치민으로 가는 일반버스로 탈출할 수가 있었습니다. 세상은 복음을 필요로 하고 있지만, 거부하는 세력은 여전히 강한 힘으로 장벽을 치고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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