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804호(2025. 6. 24. 화요일).
시편 119:156-158.
찬송 49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시치미를 떼라. 상대를 속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속마음을 간파당하지 않도록. 자기의 속마음을 간파당해서는 일을 그르친다. 혈기왕성한 인물을 상대하면 좋은 결과를 얻는다. 이 사람은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들떠 말을 내뱉고 얼굴 표정에 나타내어 속마음을 비친다. 자기의 감정이나 표정을 숨길 수 없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의 손에 놀아난다.” 어느 자기 계발서에 나온 글을 옮겼습니다. 글쎄요. 윤문원, 지혜와 평정, pp.24-25.
2. “잃었던 양 한 마리(1-7절)”과 “잃었던 은전(8-10절)”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무미건조/無味乾燥 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맛도 감정도 없고 메마르다는 의미입니다. 저도 블러그(blog)를 운영하는데 두려워하는 것은 댓글로 몇 달에 한 번씩 들리곤 합니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평에 대해서 “감사합니다.”와 같은 짧은 인사를 전하곤 했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생략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제 글이나 설교를 읽는 분들 대부분이 설교자이거나 지도급 교회 성도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가끔 설교에 대한 제 나름의 소신을 밝히곤 합니다. 가령 이런 내용입니다. 진공상태에서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말씀을 전하라고 말입니다. 어떤 분은 신학을 소개한 후 그에 비추어 본문을 분석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본문의 단어나 문맥을 충실하게 푸는데 총력을 쏟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어떻게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비판도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설교를 무미건조하다 생각합니다. 차라리 도덕과 윤리를 소개하며 세상 사람들보다는 조금은 더 나은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이 낫겠다 싶을 때도 있습니다. 성경의 사람들이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살았듯, 오늘의 우리들 역시 특별한 삶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있기에 화가 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성경 말씀에는 나름의 특징들이 있는데, 그들의 삶의 자리가 독특했던 때문입니다. 가령 누가문서는 가난한 자들과, 세리와 죄인 그리고 여인과 이방인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1세기라는 시대적 정황에서 살펴볼 때, 가난한 자는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실패자로 분류될 수 있고, 세리나 죄인은 사회적으로 경멸과 증오의 대상이었으며, 사람이면서도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소위 2류 인생인 여인들과 이방인들에 대해서 깊은 연민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들 삶의 이야기는 저마다의 독특한 삶의 자리 때문에 의미도 가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삶의 자리를 들춰내지 않고서는 어떤 근사한 이야기를 조합한다 하더라도 엉터리 얘기를 하고 마는 셈입니다. 진공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데, 바로 그런 사람 얘기를 하고 있으니 얼마나 헛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100마리의 양을 치는 목자가 있었습니다. 양떼를 몰고 초원을 찾아다니는 모습은 유대 나라 뿐 아니라, 몽골에서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발생하는 낭패가 있습니다. 무리에서 이탈하는 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이런 녀석들은 불과 한 두 마리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목자는 식은땀이 흐르게 마련이고, 그 녀석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때로는 남아 있는 99마리를 현장에 두고서 말입니다. 혹자의 말처럼 나머지 99마리를 무시한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분명한 것은 목자는 그 99마리의 양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멀리 달아나지 않을 믿음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느 풀숲에서 찾아 반갑게 안아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때의 목자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고 뿌듯합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동네방네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가까운 친구들에게는 푸짐하게 술을 살 수도 있고, 기분이 쨍하다 싶으면 아예 밥을 한턱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목자를 대신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이런 말씀에 오해를 하곤 합니다. 의인 99보다 죄인 한 사람이 더 소중하냐고 말입니다. 그 목자의 마음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의 막말입니다. 무리에서 이탈한 그래서 죄인이 된 양을 되찾은 목자의 심정은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감격과 기쁨입니다. 그 목자의 마음을 주님은 헤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말씀은 상황 속/ Text in context에서만 제 빛을 발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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