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805호(2025. 6. 25. 수요일).
시편 119:159-161.
찬송 40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삶을 즐기려는 사람보다, 삶을 보람있게 하려는 사람이 일을 해야 참맛을 누릴 수 있다. 인간에서 있어 삶은 쾌락의 소모가 아니라 노력의 산물임을 아는 사람은 일하는 보람에서 삶의 만족을 찾는다. 직장인은 일터에 나가 맡은 일을 부끄럼 없이 할 때, 당당하고 떳떳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을 누릴 수 있어야 삶의 행복을 가까이 둘 수 있다. 행복은 일하는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윤재근, 살아가는 지혜는 가정에서 배운다 p.145.
2. “잃었던 아들(11-32절)”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기준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해석을 대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이며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오늘의 말씀을 “탕자의 비유”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30여 년 전 독일의 신학자 헐무트 틸리케가 “기다리는 아버지 비유”라고 불러서 매우 신선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오래 전에 노벨 문학상 수상자 앙드레 지드는 <탕자, 돌아오다>는 책을 썼는데, 이 책은 파더십/Fathership에서가 아니라, 선십/Sonship에서 성경을 읽었다고, 이어령 교수는 한 강연에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한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던 두 아들 중 막내를 아주 불효한 망나니 정도로 이해하였는데, 지드의 눈에 비친 그 아들은 망나니가 아니라, 조금은 아버지의 시각에서가 아니라, 젊은 자신의 시각으로 인생을 살고자 했던 어떤 면에서는 젊은이다운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참고로 2013.10.31. 양화진 교회에서 가진 이어령 강좌를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비유로 풀었습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내년엔 뉴욕 가서 올스타전 데려가겠다고. 얘가 흥분해서 뉴욕 올스타전 가서 누구 만난다고 친구들에게 자랑했는데 아버지가 오더니 얘야 안 되겠다, 내년에 가자. 믿었어요. 여름을 기다리고 뉴욕 간다 했는데 아버지가 오더니 이번에는 장사가 너무 잘 돼서 대목인데 어디 갈 수가 없어. 내년에 가자. 3년을 기다리게 됐어요. 애들이 거짓말쟁이라 놀리고 그때마다 죽을 맛이죠. 그랬는데 딱 3년째 하는 말이 얘야, 야구 말고 다른 거 안 되겠냐? 아들이 예, 됐어요. 그만 두세요. 아버지에 대한 불신을 해서, 아버지는 거짓말쟁이야. 집을 나가서 장사하는 거에요. 그런데 너무 고통스럽고. 어느 날 문득 꿈을 꾸는데 아버지한테 가서, 아버지가 약속을 못 지켰지만 이제 아버지 모시러 왔습니다. 꿈에서 아버지가 너 나쁜 놈 왜 이제 돌아와서, 무릎 꿇고 이게 아니지요. 그래서 내가 잘못했구나, 아버지가 못해 주시면 내가 하면 되는데. 티켓 다 사고 해서 아버지 집에 가서 무릎 꿇고 이제 제 형편이 넉넉하니 제가 모시겠습니다.”
오래 전에 저 역시도 다르게 성경읽기를 제안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 힘쓰는 얘기를 늘어놓기도 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수 백 수천의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다 자기 식으로 그 말씀을 소화했을 테니 말입니다. 그 방증으로 4복음서가 출현한 것이고 말입니다. 어떻게 똑같은 목사의 설교를 듣고서, 한 사람은 들을 가치가 없는 저질이었다 평하는가 하면, 다른 한 사람은 이렇게 은혜롭고 감동적인 말씀을 오랜만이다고 반색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탕자가 됐든, 기다리는 아버지가 됐든 간에, 주인공이 누구냐 보다는 그 내용이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저는 큰 충격을 먹었습니다. 하루 종일이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으니 말입니다. 파더십에 길들어 있던 사람으로, 선십의 경우고 생각해 봤어야 했다는 뒤늦은 반성을 해 봅니다. 그래야 성경의 줄거리가 훨씬 더 자연스러워지니 말입니다. 그러니 앙드레 지드의 분석에 의하면 둘째 아들은 영 나쁜 놈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건의하고 의견을 전달해도, 변치 않는 아버지의 고집에 실망하고, 집을 나가겠다고 했을 때, 몇 번은 다시 생각해 보라 만류한 끝에,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아들의 의견도 합리적이고 들어줄만 하기에 그의 재산을 일찍 상속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자연스러운 흐름 아닙니까? 그 다음은 사회생활에 경험이 없었던 둘째 아들이 실패하는 것은 뻔한 일이었고, 나름 성공해서 아버지 앞에 나타나겠다 결심한 그 고집을 꺾지 못하고 돼지우리에서 버티고 지내다, 쓸데없는 옹고집을 버리고 아버지 집을 향해 돌아섰던 것이었다고 말입니다. 얼마 전에도 통일교의 꾐에 빠져 방황하던 제자들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그들을 풀어주었던 어느 대학 총장의 이야기가 당시 신문에 실렸었습니다. 신세를 망치고 부모형제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던 제자들이 “선생님은 우리를 묶어서라도 그들의 꾐에 빠지지 못하도록 했어야 옳지 않았느냐?” 항변할 때, 도무지 그들의 옹고집과 논리를 거부할 수 없어서, 그들이 그 엄청난 악마의 꾐에 실감하도록 허락했노라 결정하였다 술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인간의 논리나 고집을 누가 꺾겠습니까? 부모나 스승의 말씀조차 믿지도 따르지도 않는다면 허락할 수 밖이라고요.
3. 6.25 7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피난 가던 아련한 추억이 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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