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690(2025. 3. 2. 주님의 산상변모주일).

시편 107:19-22.

찬송 94, 263, 47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의무는 인생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에 대한 의무, 인간과 신에 대한 의무. <중략>. 의무감이 없으면 시련이나 유혹이 닥치는 순간 흔들리게 되고 쓰러지게 된다. 반면 의무감으로 무장하고 있으면 나약한 사람도 강해질 수 있고, 용기를 발휘할 수 있다. 의무는 옳은 일을 행하게 하는 원천이다. 의무감이 강한 사람은 무엇보다 말과 행동이 진실하다. 옳은 것을 옳은 방법으로 옳은 시기에 말하고 행한다.” 윤문원, <지혜와 평정>, pp.150-151.

 

2. 주님의 산상변모 주일의 복음서 눅 9:28-36을 본문으로 주님께서 변모하신 의미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세 제자를 데리시고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는데, 그곳에서 주님의 모습이 영광스럽고 옷이 눈부시게 빛났으며, 모세와 엘리야가 곁에 있었는데,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주님의 변모가 전하는 첫째 의미는 주님께서 기도하는 동안에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28-29).

흥미로운 점은 세 명의 제자들이 주님을 주목해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도하면 자신이 원하는 소원들을 쉴 새 없이 고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다른 종교의 기도와 비슷한 현상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드려야 할 기도는 할 수 있는 한 주님을 바라보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처럼, 그들 역시 주님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 중에도 주님을 주목해서 바라보는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일방적인 우리의 사정이나 목적을 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독특한 우리 크리스천의 기도입니다. 그때 우리는 놀라운 현상들에 눈을 뜰 수 있게 되고, 신비한 현상을 보게 되며, 위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변모가 전하는 두 번째 의미는 십자가를 주제로 토론한 것입니다(30-32).

모세와 엘리야는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들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노예생활에서 자유민으로 해방시킨 지도자로 등장했다면, 엘리야는 혈혈단신으로 850명의 우상의 제사장들을 무찌른 하나님의 일꾼이었습니다. 그들의 등장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려고 하시는 일 곧 십자가에 대한 것이었다 부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원을 향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목표임을 증거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를 소환할 정도로 말입니다. 특히 모세와 엘리야는 죄와 죽음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많은 고민을 한 인물들이었고, 실제로 죄의 값에 대해서 죽음 뿐 이라는 분명한 징벌을 보여 준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금송아지를 하나님을 대신한 우상으로 섬긴 자들을 하루만에 3천명을 죽이는 벌을 내렸고(32:25-29), 엘리야 역시 우상숭배자 제사장들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죽인 것입니다(왕상 18:16-40).

 

주님의 변모사건이 전하는 세 번째 의미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33-36).

설악산 신선대에는 너럭바위에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데, 직접적인 이름뿐 아니라,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남기는 일입니다.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짓자고 제안합니다. 여느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는 내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오늘의 본문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때 중심 주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의 중심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까닭은 하나님의 실재는 말씀이며, 말씀에 대한 이해와 순종만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말씀을 순종한다는 의미도 다시 한 번 숙고해야 하겠습니다. 순종은 자신의 의지나 생각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행동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순종은 제사보다 낫다고(삼상 15:22) 강조하고 있습니다. 순종을 배울 이유입니다.

 

3. 오늘은 주성농인교회(우슬초 목사님 시무)에서 설교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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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83(2025. 2. 23. 주현절후 일곱째 주일).

시편 106:46-47.

찬송 15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톨스토이의 <부활>은 그가 만년에 쓴 작품으로, 네프로도프와 카추샤의 연애를 말하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당시의 교회를 비판하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부활>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수가 당시 교회가 의식, 기만에 찬 예배, 교회 안에서의 우상숭배 등에 대해서 교회를 헐기 위해서 온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교회의 권위와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진리에서 벗어난 모습이었고, 죄의 심연에 빠져있는 교회가 다시 부활해야 세상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2. 주현절 후 일곱째 주일의 사도서간 고전 15:21-26을 본문으로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부활은 설명이 가능한 일이 아니고 신비입니다. 크리스천들이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또한 신비입니다. 부활 신앙은 가장 어리석은 일일 수도 있고, 가장 위대한 선택일 수도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과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같은 세상 안에 살고 있습니다(21-23).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나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것만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세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인간다운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세계를 향해서 머리와 가슴을 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사랑이나 희망을 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 차원 높은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두 종류의 사람을 우리는 비난할 수도 없고, 폄하할 수도 없습니다. 둘 사이에는 죽는 순간까지 서로 논쟁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를 두고 4세기의 교부 어거스틴은 사유/思惟의 영역이 다른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보편적인 인간은 이성의 영역에만 만족하는데 반해, 신앙인들은 이른바 하나님의 영역에까지 확장하고 싶어 합니다. 인간은 이성의 영역에 만족하지 않고 훨씬 더 넓은 세계를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축복입니다(24-25).

부활 신앙은 교회 안이나 교회 밖이 혼재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심지어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도 부활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잘 가늠이 안 되는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 신앙을 줄기차게 붙들고 있다는 것은 특별한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에, 이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고서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 사람의 사고/思考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사고의 영역으로 불려 들어간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확실한 특징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모세시대나 선지자들의 시대에는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눈으로 체험하였으나, 그 이후의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부활 신앙의 첫 열매이며 첫 대상입니다(26).

부활은 역사 속에서 나타났던 사건이었습니다. 바로 예수 사건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무덤에서 일어나신 사건 말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역사적 사건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한 부활하신 날을 2천년 동안 지켜온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고전 15:20). 그러므로 이제는 죄와 죽음의 노예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참 자유인으로 살아갈 특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할 힘을 가진 존재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과제는, 우리에게 주신 이 부활신앙을 끝까지 고백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과,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섬기는 것뿐입니다. 성령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아멘.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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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69.

시편 106:4-6.

찬송 20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서울 중량구청 앞 한 중학교 벽면에는 “Boys be ambitious!”라는 조각 글귀가 붙어 있다. 우연히 혹은 여러번 이 글귀를 보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젊은이들이 생겼을 것이다. 일본 삿보로 농업학교에서 2년간 교수로 일했던 미국인 윌리엄 클라크가 임기를 마치고 일본을 떠나며 남긴 말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삶의 변화를 삼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2. 주현절후 다섯째 주일의 복음서 누가복음 5:1-11을 본문으로 어부를 제자로 부르시다.”를 읽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한 대학원생이 목사님은 몇 명의 제자가 있습니까?” 라고 묻더니, 10여녀 전에도 또 다른 대학원생께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두 번 다 똑 같이 예수님이 열둘을 두셨으니까, 한 명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신 것이었습니다(10-11).

불교의 석가모니는 10명의 제자들(釋迦 十聖)을 두었는데, 그들은 불국사 석굴암에 조각되었고, 공자의 제자들은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 모두 10명인데, 논어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듯 제자를 두신 것은 당신들의 뜻을 온 세상에 널리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스승의 영향력에 비해서 제자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는데, 그것은 스승의 뜻이 자신들의 뜻과 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이 어부와 비슷한 출신이었다는 점에 주목하려고 합니다. 석가모니나 공자의 제자들이 사회적으로나 식견에서 수준 높은 것에 비해,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류층에 속했다는 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 그리고 도마처럼 부족함과 흠결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제자의 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했습니다.

 

제자의 길은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면 충분했습니다(1-5).

그물을 씻는 제자들은 실패의 연속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하지 않고 새로운 삶을 향해 일어났습니다. 누구에게나 자신들이 헤쳐갈 인생길은 녹록하지 않을뿐더러 실패하는 일들이 다반사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어부들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은 빈 그물을 들어 올릴 때마다 실망하였을 것입니다만, 다시 한 번 만, 또 한 번 만 하면서 밤을 꼬박 새었을 것입니다. 입학과 취업 등 이런저런 시험을 치를 때, 수도 없이 낙방을 하는 사람들이 합격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도중에 주저앉아 희망의 끈을 놓아버려선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은 절망과 낙담을 가슴에 품었지만, 다시 일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일의 중요성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일상의 삶을 끝까지 붙들고 사는 사람만이 제자의 길도 인생길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삶이 반전되는 결정적인 순간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었습니다(6-9).

위인전에서 우리가 배우는 가장 값진 교훈은, 그들의 삶을 역전/逆轉시키는 계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삶이 단조롭고 무의미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일들이 어리석고 헛되었다고 절망할 때 말입니다. 고민과 절망의 순간들입니다. 바로 이런 때 우리를 깨우는 섬광이나 희미한 소리를 듣게 되곤 합니다. 본문의 제자들은 낯선 지나가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그것이었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으시오.”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고기 잡는 노하우를 가진 분이라 생각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변화의 계기가 필요할 때에 들려온 음성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일으켜 세울 반전의 기회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들의 마음을 흔들기만 하면 움직일 준비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절실한 마음을 꿰뚫어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순종한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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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62.

시편 105:28-30.

찬송 25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는 크리스천이든 아니든,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귀한 의미를 생각나게 한다. 사랑의 십자가, 감사의 십자가, 위로의 십자가, 그리고 소망의 십자가 등 등. 서양에는 십자가 교회가 많이 있다. 기독교 진리의 핵심에 십자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엔 십자가 교회가 매우 드물다. 고난으로만 생각하는 때문이다. 그게 슬픈 현실이다.

 

2. 주현절후 넷째 주일의 사도서간 고전 13:1-13을 본문으로 사랑으로 충만한 삶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고매한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께서 유행가 가수 패티 킴씨에게 전화를 걸어, 부부와 자녀들이 너무 사랑스럽다며 계속 그렇게 살라고 말하고 싶다 했답니다. 그게 인연이 되어서 패티 킴은 최현배 선생님의 장례식에서 조가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온전한 사랑에 눈뜰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3-5).

모든 사랑은 온전한 사랑과 반쪽뿐인 사랑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의 기쁨이 있는가 하면, 사랑의 아픔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기쁨을 희망하지만, 사실은 사랑의 아픔 혹은 사랑의 슬픔이 더 많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저는 결혼식 주례사에서 사랑의 기쁨보다는 사랑의 아픔을 더 많이 강조했습니다. 사랑의 기쁨은 그것을 얻으려고 바친 땀과 수고가 너무 컸기 때문도 그렇지만, 실상은 위장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사랑의 아픔은 누구에게나 쉽게 접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진정성을 갖는 현상인 때문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아야 하고, 친절해야 하며, 시기도 자랑도 교만도 무례하지도 사욕을 품어서도 성내서도 앙심을 품지도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랑이란, 오랜 전부터 우리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된 사랑이란 용기가 필요하다 말씀하십니다(6-10).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낭만적인 감정 소비재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은 충분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성격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불의에 맞서는 용기를 발산하기도 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하기도 하며, 치우치지 않고 넓은 관용을 베풀기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나 희망 그리고 인내의 폭도 넓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랑의 영역은 그 깊이와 넓이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신앙의 다양한 은사들이 시들어질 수 있습니다. 예언이나 방언이 멈출 수 있고 사라질 수 있습니다만, 사랑은 언제든지 다시 솟아나는 화수분/貨水盆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망해야 할 신앙의 덕목은 사랑이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불완전한 세상에서 사랑만큼은 언제나 완전한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생 힘쓸 사랑하는 삶에는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11-13).

흔히들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 나타났다는 말을 듣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반쪽 사랑이 아닌, 온전한 사랑으로 우리들 인생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친히 고난의 멍에를 짊어지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는 가장 확실한 상징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들이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유일무이한 신앙의 표지/標識입니다. 미국교회를 심방한 일이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모든 가정들의 거실에는 십자가가 중앙에 걸려 있었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 형통할 때나 힘들고 어려울 때도 그 십자가는 그 가족들에게 언제나 거룩한 힘을 주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랑스러울 수도 있고, 때론 부끄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짊어지신 사랑의 표지인 십자가는 언제나 우리를 다시 감싸주고 믿음과 희망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3. 오늘은 주성농인교회(우슬초목사 시무)에서 설교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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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55(2025. 1. 26. 주현절후 셋째 주일).

시편 105:7-9.

찬송 23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대학에 가면 꼭 들어보고 싶은 과목이 있었는데, 철학강의였습니다. 그런데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그 교수님이 쓴 여러 권의 책들을 읽고 감동을 받아 선뜻 그 분의 과목을 신청했는데, 너무 감성적이어서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세간의 인기와는 달리 그 교수님의 강의에 들어오는 철학과 학생들은 매우 적었습니다.

 

2. 주현절 후 셋째 주일의 구약 느헤미야 8장을 본문으로 율법을 가르친 학사 에스라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느헤미야를 현대적인 시각에서 연구한 김형준목사님은 <섬기는 사람 느헤미야>에서, 특히 오늘 본문인 8장을 열면서 말의 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유명한 Boys, be ambitious!를 외쳤던 삿보로 농과대학에서 초빙교수로 3년여를 가르쳤던 윌리엄 클라크 박사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1961년 거창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던 때에 이 말씀을 들으며 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서광이 비치는 감격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공부는 목적은 단지 기억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미래를 꿈꾸기 위함입니다(1-3).

주전 586년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노예들은 3차에 걸쳐 고국으로 귀환하게 되는데, 느헤미야는 3차 귀환 때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기 위하여 주전 445년 경 돌아왔습니다. 우리들 인간의 역사는 다분히 인간에 의해서 출발하고 전개되며 결론짓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진행과정을 깊이 들여다보면 승리의 역사든 실패의 역사든, 그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개입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굵직한 역사는 우연같은 필연이 있었는데,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 참여 혹은 역사 개입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데, 우리의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더 빛나는 미래를 꿈꿀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예루살렘 남동쪽 앞 기드론 골자기 기혼샘 옆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해뜰때부터 해가 중천에 이를 때까지, 학사 에스라에 의해서 역사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배우는 사람들의 자세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수용적이어야 했습니다(5-6).

공부 잘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저의 25년간의 노 하우에 의하면 선생님의 열굴을 정면으로 쳐다보고, 한 마디도 놓치지 않을 자세로 말씀을 빨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제가 아산에 터를 잡고서 처음 한 일은, 마을 어린이들을 가르치겠다는 광고를 낸 일이었습니다. 딱 한번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지금도 가장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어린 아이들에게 다음 월말고사에 나올 문제를 가르치는 선행학습을 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왕도(王道)를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목사가 전도하려고 아이들을 꾀이고 있다는 말이 돌았다 했습니다. 제가 연세대학 총장 최우등 장학금을 두 번씩이나 받았다는 것을 밝혔는데도 말입니다. 공부는 어쩌면 가장 쉬운 일일지 모릅니다.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매일 매일 배운 것을 잘 복습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멘 아멘으로 응답했다 말합니다.

 

학사 에스라의 교수법은 알아듣기 쉬운 가르침이었습니다(8-10).

학생들의 실력이 오르지 않는 원인에는 가르치는 교사의 책임도 있습니다. 제가 대학 1학년때 남대문 지역의 껌팔이 구두닦이 청소년들을 위해 야학에서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열정은 지금도 자랑스러운 추억 중의 하나입니다. 제가 만난 설교자들 중에 가장 쉬운 설교를 잘 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동화작가 출신이어선지는 몰라도 누가 들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어휘를 택하셨고, 문맥의 흐름도 간결하고 명료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분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낱말도 꼭 영어단어를 덮어 쓰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사족이지요. 강의도 쉽게 가르치시는 분도 있고 일부러 어렵게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서 기자는 에스라의 율법 해석은 알아듣고 깨칠 수 있도록 풀이하여 주었다.”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어린아이나 노인들도 모두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가르치고 설교하는 지도자가 존경을 받는 풍토가 기대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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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48.

시편 104:22-24.

찬송 18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파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이 1788122일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가 남긴 시 <꽃처럼 저버린 사랑>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 그 아름다움 한창 피어날 때/저버린 그대/잠든 그대 위엔 묘석일랑 놓지 못하게 하리라/그대를 덮은 잔디 위엔 ///가엾은 그대여!/혹시나 그 발걸음이 고이 잠든 그대를 /깨울까 하여이니라.”

 

2. “가나의 혼인잔치(1-11)”을 읽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한번 입력된 자료는 고치기가 참 어려운 것을 느낍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이 그런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난처한 혼인잔치에 참석하신 주님의 일화입니다. 혼인잔치의 과방에서 흘러나온 얘기를 주님께서 모친을 통해 듣게 된 것입니다. “포도주가 부족하다니 이를 어쩌나?” 이스라엘과 서양에서는 피로연이나 식사 초대는 미리 참석자 명단이 확인되고 준비하는 게 상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임금의 혼례식에는 초청 확인을 했는데도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서 혼주/婚主가 화가 나서 시장과 거리에서 사람들을 갑자기 초청하고 난리법석을 떠는 얘기가 나옵니다. 1995년 겨울 학기를 미네소타 주의 쌍둥이 도시 중 하나인 세인트폴에서 예배학을 공부할 때, 저의 주임 교수님이 매 주일 저를 픽업해 주셔서 여러 교회들의 예배에 참석하였는데, 어느 날은 시내를 지나가시다가 이 주변에 큰 호텔이 있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따님 결혼 피로연을 열었는데, 100명을 초대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피로연에 초대된 손님들은 양가의 혼주가 50명씩 초대했다고 하며 평생에 기억할 즐거운 시간을 가졌노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과방을 호텔 측에서 맡고 공급하기 때문에 가나의 혼인잔치의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 했습니다. 그러나 혼주의 집에서 피로연을 가질 땐 가끔 포도주가 부족해지는 경우가 있다 했습니다. 어디나 포도주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튼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모자라게 된다면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습니다. 이런 낭패를 대학교의 시험문제에 까지 등장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바이런이 살던 19세기에 케임브리지 대학 종교학 시험지에 등장한 것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의 일화는 신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 고 말입니다.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은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그의 시가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람인데, 그는 일찍부터 그의 떡잎을 소개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앞서의 문제지를 받고는 2시간 동안이나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합니다. 그러니까 시험 감독인 교수가 와서 이제 10분밖에 남지 않았네. 한 줄이라도 써야 하지 않겠나?” 했더랍니다. 그래서 그가 몇 자 시험지에 옮겼는데, 그게 바로 저 유명한 물이 제 주인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졌도다.”란 정말 한 줄의 시 같은 명답이었던 것입니다. 이보다 더 멋지고 슬기로운 신앙적 의미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항상 이 구절은 바이런을 생각하곤 합니다. 우리들 인생길에는 가나안 잔치집이 당면했던 문제들이 생기곤 합니다. 예수님의 문제풀이 방식을 바이런은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문제가 닥쳤을 때, 우선 두려움에 사색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곤 당황하게 되고, 원망과 불평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앙인들도 이에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이런의 문제풀이방식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점을 눈뜨게 합니다. 문제 앞에서 불안해하고 원망도 불평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바이런은 시험 시간 2시간을 다 사용하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 가지 대답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포도 알갱이가 밀폐된 옹기그릇에서 숙성하면 발효되어 포도주가 되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생길의 골목골목 마다 우리의 자취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현실입니다. 저는 이런 신앙적 의미를 시 121편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첫 공식 설교를 이 구절에서 찾아냈습니다.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 고 말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문제 앞에서 발버둥을 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해답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절망과 두려움의 한 복판에서 우리가 뚫어져라 바라볼 분은 천지를 지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신데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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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41.

시편 104:1-3.

찬송 46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버트란트 러셀은 1930<행복의 정복>이라는 책을 펴냈다. 참 당돌한 책이다. 1차 대전(19147- 191811)이 끝난 뒤였다. 전쟁의 상흔과 새로운 삶에 대한 도전이 끓는 때, 이 책을 써낸 것이다. 행복은 불행을 이기는 것으로 처방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내면세계에 빠져들지 않고, 열정과 관심을 바깥 세계로 돌리는 것으로 진단한 것이다.

 

2. 주현절 후 첫째주일의 사도서간문 롬 6:1-11을 본문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크리스천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추상적으로 들린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인지를 묵상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다시 살 수 있습니다(1-4).

예수님의 열 두 제자를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와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지 않고 사는 길을 원했던 것입니다. 죽음은 삶의 반대쪽에 있는 것으로 죽음에 대해서 부정적인 세상의 영향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절망했으며, 다시금 옛 생활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런 어두운 먹구름 가운데 살고 있는 제자들과 크리스천들에게 예수께 받은 세례를 기억나게 하였습니다. 세례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하여 살아나는 진리를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새로운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먼저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세례는 우리에게 먼저 죽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세례는 죽음과 다시 삶을 깨닫게 하십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5-8).

본래 우리 인생은 죄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말하고 먹고 마시는 일체의 일들이 죄와 관련된 것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규정하는 말, 하마르티아는 빗나간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 단어였습니다. 학생이 선생님의 말을 잘 듣고 공부에 매진해야하는데 책상에 엎드려 졸고 있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농부가 그날의 일과를 충실히 해야 하는데 술집에 앉아서 술이나 퍼 마시고 있다면 이것 역시 죄입니다. 목표를 빗나가는 삶, 목적을 잃어버리고 엉뚱하게 살아가는 일은 일체가 죄짓는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에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인생의 목표를 바라보게 하셨고, 삶의 의미를 깨워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깨 살아가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며, 동료 인간들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셋째는 날마다 죄를 이기며 살아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9-11).

아담 이래로 모든 인생은 죄의 저주 아래 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자포자기와 절망 속에 살고 있는데 반해서, 크리스천들은 죄와 투쟁을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크리스천의 대장이 되셔서 우리들을 격려하시고 돕고 계십니다. 크리스천들이 싸워야 할 대상들은 너무 많습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적들로 불신과 탐욕 그리고 무기력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가하면 밖으로부터 쳐들어오는 적들도 많습니다. 불의와 거짓 그리고 어리석고 헛된 유혹들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을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진리로 허리띠를 매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들라 하십니다. 우리들 자신을 대장 예수께 전폭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말라.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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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634.

시편 103:3-5.

찬송 405, 444, 47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수우족 인디언의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바람 속에 당신의 목소리가 있고, 당신의 숨결이 세상 만물에게 생명을 줍니다. 나는 당신의 많은 자식들 가운데 작고 힘없는 아이입니다. 내게 당신의 힘과 지혜를 주소서. 나로 하여금 아름다움 안에서 걷게 하시고, 내 두 눈이 오래도록 석양을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이 만든 물건들을 내 손이 존중하게 하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예민하게 하소서.”

 

2, 성탄절후 둘째 주일의 구약 열왕기상 3:4-15을 본문으로 일천 번제의 정신을 따라 살자.”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기도에 대한 일화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브라함의 기도였습니다. 그밖에 모세의 기도, 사울의 기도, 다윗의 기도, 솔로몬의 기도 등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기도들은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일천 번제를 드린 솔로몬 왕에게 하나님은 꿈속에 나타나셨습니다(4-5a).

간절한 마음은 낮과 밤 구분 없이 삶에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일천 번제란 일천 번씩 드린 제사가 아니라, 일천 마리 제물을 번제로 드렸다고 말입니다(대하 1:6). 어느 교우가 875번제 예물이라며 헌금을 드린 것을 알고, 그분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분의 대답은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솔로몬이 드린 일천 번제를 모범으로 삼아서 875번째 헌금을 드린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대답해 주었습니다. 대단히 정성스러운 예물이라고 답한 후, 잘못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공로주의가 될 수 있으며, 솔로몬의 일천 번제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만일 일천 번을 예물을 드린다고 하면, 하루도 빠짐없이 29개월을 꼬박 예물을 드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가끔 드린다면 10년도 걸릴지 50년이 걸릴지 모를 것이며, 그걸 세다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왕이니까 할 수 있는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자, 무엇이든 구하면 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5b-9).

가장 현명한 신앙인이란 누구일까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사람도 포함될 것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기도자로 엎드렸습니다. 솔로몬의 기도는 진정성이 있었는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감사했고(6), 둘째는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했습니다(7). 셋째 지도자로써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간절히 구하였습니다(9). 솔로몬의 기도는 한 순간의 짧은 생각이나 감상적인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천 번제를 드리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생각하고 숙고했던 기도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지혜나 인격은 어떤 한 순간의 깨우침이나,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배운 것을 통해서 뿐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그리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오랜 고독한 기도의 시간이 가르쳐준 것들이었습니다. 이런 기도의 환경은 가난과 질병과 싸우는 보통 사람은 물론 지도자에게도 매우 중요한 덕목이겠습니다.

 

일천 번제의 정신은 행복한 삶(장수, 부귀, 지혜)을 살게 해 주십니다(10-15).

일천 번제의 정신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서 살려는 마음입니다. 누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행동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도 하고 묵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 인간의 생각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인간의 문제는 욕심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십계명에서 열 번째 계명이 욕심을 갖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성경에서는 탐욕을 금하라고 합니다. 지나친 욕심입니다. 우리 주님은 내가 가지려는 욕심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하는 욕심을 기를 것을 권고합니다. 그것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가르치는 내용이고 주님이 보여주신 삶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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