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508.

시편 78:70-72.

찬송 239, 235, 25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무엇을 붙잡고 살아남았을까? <흑야/黑夜>를 쓴 엘리 위젤(1928-2016)<죽음의 수용소>를 쓴 빅터 프랭클(1905-1997)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에 대해 큰 질문을 갖게 한다. 위젤은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를 물었고, 프랭클은 왜 살아야 하나?”를 물었다. 목회 초년시절, 전덕애선생(거창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적극적 사고방식>을 쓴 로버트 슐러를 소개하였다)이 장기려 박사의 암 수술을 받았다며 내게 기도를 부탁했을 때, <흑야> 전문을 녹음해서 가지고 갔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모든 죽음을 마주했던 사람들이 가졌던 질문,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왜 살아야 하나? 이 두 질문은 오늘도 우리들 모두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2. 성령강릴절 후 열다섯째 주일의 구약성경 신 4:1-9을 본문으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가을의 문턱을 넘어섰습니다만, 찜통더위는 계속될 전망입니다. 기후위기가 가져다 준 채찍입니다. 부자나라들의 탄소배출로 가난한 나라들이 더욱 힘들어졌고, 인류의 미래는 그 시간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똑똑한 바보들은 제 꾀에 죽어갈 것입니다.

 

사는 길이 있고 죽는 길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길을 택하시겠습니까?(1-4).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는 모래와 돌이 전부인 광야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무려 40년이란 길고 긴 세월동안 말입니다. 분명 죽는 길이었습니다. 낮에는 뜨거운 햇빛이 내려 쬐이고, 밤에는 바위를 갈라 튀게 하는 냉기로 떨게 하고 있었습니다. 광야 생활 40년은 죽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광야 생활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죽음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광야 생활 40년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훈련의 장소를 마련해 두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죽음이 아니라 훈련의 장소가 되고 기회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여기에는 엄청난 조건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기만 하면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땅 광야도 생명의 은총으로 바뀔 수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태지도 빼지도 않고 잘 듣고 지키면 땅을 차지하고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든 민족 앞에서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5-6).

노방 전도자를 만났습니다. 종로 3가에는 송 해씨를 기념하는 8각 정이 있는데, 그곳을 설교단으로 삼고 열심히 생명의 길과 멸망의 길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실천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란 귀 기우려 듣거나 외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그 말씀의 뜻대로 실행에 옮길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는 전도자들의 수고가 컸습니다. 그래서 전국 방방곡곡에 교회당을 세웠고, 교인들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들이 교회에서부터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가나안 성도들이 엄청나게 불어났고, 안티 크리스천들이 훼방꾼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서 생긴 문제였습니다.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어린 주일학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고 따라 설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을 때, 하나님과 그 백성들은 서로에게서 멀리 떨어져버렸습니다(7-9).

이제 예배는 끝났습니다. 오늘 들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세상에서 살아가십시오.” 오늘도 의식교회에서 예배 말미에 다짐하는 파송의 인사말입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세상에서 살다가 예배하러 모여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들은 후에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행동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배란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이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흩어지는 것이 파송하는 행동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외치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욱 더 필요한 것은 조용하게 실천하는 행동하는 삶입니다. 우리 한국 개신교회의 가장 취약한 점은, 실천하지 않는 믿음이고, 행동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실천하지 않을 뿐입니다. 사랑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행동하지 않을 뿐입니다. 사는 길과 죽는 길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믿음을 실천할 때이며, 행동하는 사랑이 될 때입니다.

 

3. 오늘은 주성 농인교회(우슬초목사 담임)에서 설교할 예정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501.

시편 78:48-51.

찬송 46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려말 이조판서를 지냈던 이 기(1522~1600)<간옹우묵>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런 재미있는 글이 전해집니다. “세속에서 하는 말이 있다. 노인이 젊은이와 반대인 것이 대개 세 가지다. 밤에 잠을 안자며 낮잠을 좋아하고, 가까운 것은 못 보면서 먼 것은 보며, 손주는 몹시 아끼나 자식과는 소원한 것. 이것이 노인의 세 가지 상반된 점이다.”

정 민, 옛 사람이 건넨 네 글자,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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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령강림절 후 열 넷째주일의 복음서 막 7:1-13을 본문으로 전통의 가치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길들여진 생활이 습관이 되고 습관을 여러 사람과 공유하면 전통이 된다는 것은 경험이 가르쳐준 삶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전통이란 누가 뭐라 해도 쉽게 버릴 수도 고칠 수도 없는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에도 전통의 가치가 있습니다.

 

유대인은 정결례란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며 지켰습니다(1-4).

모세의 율법에는 세 가지 부정함에 대해 상세하게 정결례 의식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병(문둥병)으로 살던 사람이 고쳐졌을 때 모든 사람으로 이를 알리기 위한 결례/潔禮(13-14), 성과 관련된 유출물을 씻는 결례(15), 마지막으로 사체/死體를 만졌을 경우에 행하는 결례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선 이런 결례제도는 건강한 삶을 위해서 필요한 사회적인 보호 장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외출 후에 손과 발을 씻는 관습이나, 음식을 먹기 위해서 손을 씻는 관습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는데, 예나 제나 건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생각됩니다. 요즘은 거의 볼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예전에 어린 아이를 출산했을 때는 세이레 동안 대문에 왼손으로 꼰 새끼줄(금줄)을 쳤는데, 남아일 때는 고추와 숯덩이를, 여아일 때는 미역줄기, 솔잎과 종이를 달았습니다. 산모의 건강도 위하고,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하는 뜻도 있었다 합니다.

 

전통을 악용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였음을 책망하십니다(8-10).

좋은 습관을 가진다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고, 살아가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가령 저와 같이 새벽 형이란 습관을 가진 사람은 기도와 묵상 그리고 독서하는데 편리합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서 새벽기도회를 다닌 것이나, 오랜 시간 시험공부를 하던 것 등이 습관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일부러 새벽에 일어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고르반>이란 전통이 있습니다. 수입이 생기면 그 일부를 성전을 위해서 또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 따로 떼어 모아두는 일을 말합니다. 미국의 어느 가정에서는 고르반 항아리가 거실에 서너 개 있었습니다. 귀한 일을 하려다 보면 돈이 없어서 고르반 항아리를 두었다 말씀했습니다. 저는 좋은 생각통장을 만들어 활용합니다. 그런데 얼마든지 악용할 수 있습니다. 부모나 형제가 도움을 청할 때, 못받을까봐 고르반 밖에 없다고 둘러대면서 완곡하게 거절하는 것이 당시의 진실이었습니다.

 

좋은 뜻으로 출발하지만, 도중에 나쁜 뜻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5-7).

한 때 법꾸라지라는 신조어가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법의 정신과 목적을 따르기 보다는 법의 문자만을 악용해 미꾸라지처럼 잘 피해가는 법지식인들을 혐오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짧지 않은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정신과 목적이 빠져버린 문자주의에 함몰될 때가 많습니다. 20여 년간 저는 9명의 친 남매 외에 또 다른 형이 한분 계셨습니다. 그분은 타지에서 직장을 찾아 저의 마을로 오신 분인데, 하숙집 창문으로 우리 집을 훤히 볼 수 있었는데, 매일 북적대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어느 날 찾아와서 아들로 삼아 달라 어머니께 졸랐다 합니다. 싸우고 다투는 모습이 진정한 가족 간의 모습이라며 말입니다. 훗날 포목점 주인이 되어 부자가 되었는데, 지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형은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정신과 목적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문자를 강조하시는 분이 아니라, 정신과 목적을 주목하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494.

시편 78:23-25.

찬송 43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대선일이 115일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자기 피알의 시대라고 하는데, 듣기에 민망하던 말들이 귀에 익었는지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이런 현실은 우리나라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자신이 가장 백성을 사랑하고 충성스럽게 섬길 머슴이라고 자처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얼굴 빛 하나 바꾸지 않고 망나니 노릇을 하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 차악을 택합니다. 말과 행실에서 조금은 양심이 남아 있거나, 그의 신앙심과 살아온 경력에 큰 기대를 하는 것 말입니다.

 

2.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열세째 주일로, 사도서간 엡 5:15-21을 본문으로 세월을 아낄 이유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어느 시대를 살았던지 간에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한 관심은 높다 하겠습니다. 개역성경(RSV)에서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하였는데, 훨씬 뜻이 제대로 느껴집니다. 주어진 시간을 잘 관리할 책임이 있습니다.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삶의 의미는 다양해질 수 있습니다(15-16).

어린 시절에 많이 들었던 가르침 중에는, 소년이노학난성/ 少年易老學難成, 일촌광음불가경/ 一寸光陰不可輕 이란 말씀이 그것입니다. 소년은 늙기 쉬워 학문을 이루기 어려우니, 짧은 순간이라도 헛되게 보내지 말라는 의미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시간이해는 직선적인 시간이해로 시작이 있고 끝이 있어서, 한번 지나가면 되돌릴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매 순간의 시간이 절박하고 진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시간에 대한 이해가 있는데, 되풀이 된다는 윤회의 시간이해입니다. 영겁의 시간을 말합니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시간, 짐승으로 살아가는 시간, 미물로 살아가는 시간 등인데, 깨달은 삶을 살 때까지는 수천만 년, 수억 년을 계속된다는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시작과 끝을 말씀하는 한번 뿐인 시간을, 불교는 끝도 없는 윤회의 시간을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어떤 시간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실제로 어떤 시간 속에서 살고 계십니까?

 

세월을 아낀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입니까?(17, 19).

제가 감동적으로 읽은 책 가운데는 러시아의 물리학자 류비세프의 삶을 소개한 <시간을 지배한 사나이>라는 책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실천하고 평가하는 삶을 살았는데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도, 단 한 순간도 자신이 연구하는 주제를 생각하고 계산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아무 뜻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단하게 할 수 있습니다만, 누구나 마음조차 먹을 수 없는 삶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다만, 저는 성경의 중심점을 토대로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하는 것, 둘째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10:25-28) 이라고 믿습니다. 일찍이 동양에서도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는 경구를 써서 벽에 걸어놓고 따르고자 했으니까요.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성령님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임에 분명합니다.

 

세월을 아끼며 사는 것은 제정신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18, 20).

엊그제 한 친구의 근황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좋아할 말만 하는 것 같았습니다. 순수 소설을 쓰는 사람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마디 얹었습니다. “역사의식을 가지라.”고 말입니다. 제정신을 차리고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제정신을 차린다 함은 깨어 있는 삶을 산다는 뜻일 것입니다. 모두가 일신의 평안과 안일에 취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홀로 깨어서 병영의 초소를 지키고, 자신의 일터를 지키는 사람은 귀하고 귀한 사람입니다. 동요 <등대지기>의 삶은 그 가사처럼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최근에 알려진 바로는 이 곡의 원곡은 19세기 중반의 찬송가 <황금률/The Golden Rule>이라고 합니다. 기드온의 300명 군사처럼, 깨어있는 제정신으로 살아가는 크리스천을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부터 말입니다.

 

3. 오늘은 안성 예수 사랑교회(담임/김효종목사님)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487.

시편 78:1-4.

찬송 3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보게 조카, 얼른 와보게. 내 장사가 얼마나 잘 되는지 와서 보고 배워. 장사 수완을 배워두면, 앞으로 먹고 사는 일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게야.” 가게를 운영하는 상인이 자신의 조카에게 조곤조곤 가르쳐주며 말했다. “폴란드에서 생산되는 이 옷감을 본 적이 있나? 이미 유행이 지난 옷감인데, 습기가 차서 곰팡이가 슬고 여러 군데 좀이 슬었어. 몇 년 동안 진열해 놓아도 팔리지 않았었는데, 오늘 팔렸어. 품질이 좋은 외국제품이라고 하니까 멍청한 손님이 깜빡 속아 넘어가 얼른 사갔지. 그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 멍텅구리라니까!” 그러자 숙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누가 정말 바보 멍텅구리인지 구분이 안 가네요. 이걸 보세요. 그 사람이 준 돈은 위조지폐입니다.”

        차오슈잉, 우화에서 발견한 인생 지혜, pp.274-275,

 

2. 성령강림절 후 열 둘째 주일의 구약성경 왕상 19:1-8을 본문으로 무기력한 엘리야의 문제는 무엇일까?”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저는 평생을 왕성한 식욕을 가지고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항암치료 때문인지 식욕과 함께 의욕까지도 떨어지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됐다며 말입니다.

 

성경에서 역설적인 말씀을 만날 때 난감해지곤 합니다(1-4).

1983년 여름 불의 선지자 엘리야를 만나기 위해서 갈멜산 산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곳 정상에는 그 옛날 우상을 섬기던 바알 왕과 이세벨 왕후의 제사장들과 기도의 대결을 벌여 승리했던 엘리야의 석상이 있는데, 엘리야는 오른 손에 칼을 움켜쥐고 있었고, 발밑에는 우상을 섬기던 제사장들이 죽어 너부러져 있었습니다. 더운 여름날이었는데도,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우상의 제사장 850명과 엘리야 한 사람이 기도 대결에서 엘리야가 승리하고, 36개월 비오지 않던 땅에 소나기가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싸움에서 이겼는데도 불구하고, 우상의 여인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공언을 하고 군사들을 풀어 엘리야를 수색하였습니다. 도망자의 신세가 된 엘리야는 광야로 피신 한 로뎀나무 밑에 얼굴을 파묻고,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용맹이 충천하던 엘리야가 무력한 도망자의 모습으로 변한 것입니다.

 

엘리야가 무기력한 사람들의 전형/典型처럼 바뀐 까닭은 무엇일까요?(5-6).

엘리야의 풍채로 보나, 우상의 제사장 850명을 대상으로 싸운 이력으로 보나, 엘리야가 왕후 이세벨의 한 마디에 기가 꺾이고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한 모습을 볼 때, 실망감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엘리야가 어찌하여 무기력한 모습으로 돌변하게 되었는지 그 까닭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80년대 초 장신대와 샌프란치스코 신학대가 공동으로 주관하던 목회학 박사(D. Min.)과정을 하고 있을 때, 옆 자리에 유명한 부흥사가 앉았는데, 그분이 남산 구치소생활의 한 일화를 들려주었습니다. 하루는 교단 총회장이 면회를 오셨는데, 자신이 그 자리에 없는 줄 알고 간수에게 말하기를 젊은이들이 철이 없어 고생을 해 봐야 한다.”고 하자, 간수가 그래도 개신교 대책 예산이 500만원인데 비해, 천주교는 5,000만원 입니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전향/轉向을 하고 박정희의 새마을 전도사가 되어 일본으로 갔다 했습니다. 세상 권력 앞에서 유약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유약한 일꾼을 끝까지 격려하셨습니다(7-8).

한기총이라는 연합단체에 몇 차례 참석한 일이 있었습니다. 사자후를 토하며, 영웅담을 늘어놓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일간지에 재판을 받고 있는 기사가 실렸는데, 그 사자후를 토하며 영웅담으로 좌중을 주름잡던 분에게 젊은 판사가 야단을 치는 말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목사님, 거짓말 좀 하지 마세요.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 죄송합니다.” 이 모습은 엘리야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억지로 눈을 감고 로뎀나무 그늘로 파고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비겁하고 무기력한 엘리야를 위해 천사를 보내 음식과 물을 전하며, “음식을 먹고 물도 마셔라.” 권하신 것입니다. 엘리야의 초라한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일꾼으로 세우시고 얼마나 맥이 빠졌을까요?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연약한 자를 붙들어 힘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용기를 주셔서 일하게 하십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480.

시편 77:1-3.

찬송 422.

 

1.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노르웨이 작가 헨릭 입센은 <인형의 집/1879> 희곡을 통해서, 은행가 헬마의 아내 노라로 하여금, 고액 연봉이나 넓은 집에서 목을 매달고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짜 인생 제대로 된 인생을 살라고 온 몸으로 말하게 합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명언은 오늘날에도 우리 현대인에게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돈으로 씨앗은 살 수 있으나, 농부의 의욕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잠깐의 즐거움은 살 수 있으나, 행복은 살 수 없다.”

 

2.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열한째 주일로 복음서 요 6:22-35을 본문으로 균형잡힌 신앙생활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균형이라는 말은 듣고 말하기 보다는 실제는 참 어려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회 생활과 신앙 생활을 균형있게 할 수 있는 것은 여간 용기와 지혜로는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직장 생활과 가정 생활의 균형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여러 목적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22-25).

주님께서 5천명을 먹이셨던 벳세다 광야에는 팔복교회가 세워져 있었는데(1936-1939), 그 교회를 후원한 사람은 이탈리야의 독재자 무소리니였습니다. 복을 의미하는 라틴어 Beatitude는 물질적인 복이 아니라, 정신적이 영적인 최고의 행복을 뜻하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찾아나섰던 벳세다 광야의 유대인들은 물론, 21세기 현대인들이 찾고 있는 복은, 여전히 물질적인 복과 질병으로부터의 해방 등이라는 점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2천년동안 우리 기독교회가 한 발자국도 이 주제를 바르게 가르치지 못해서, 교회가 세상의 소금이나 빛이 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옳은 일을 하다 박해를 받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런 설교와 기도를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썩을 양식과 썩지 않을 양식을 필요한 만큼 구하고 얻어야 하겠습니다(26-27).

우리들 크리스천은 두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는 땅의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 나라입니다. 그 특징은 땅의 나라는 썩을 양식 만나를 먹는 나라이고, 하늘 나라는 썩지 않을 양식 생명의 떡을 먹는 나라입니다. 우리 주님은 썩을 양식에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두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두 배로 힘든 멍에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균형잡힌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제가 학생시절일 때, 시골에서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의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힘들다는 말씀을 많이 하였습니다. 끝도 없는 농사짓기를 다 한 후에 교회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 계획을 잘 세워야 하고, 일의 순서나 능률적인 체력도 십이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균형잡힌 삶이란 매일 매순간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야 하겠습니다(28-33).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의 관리자로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시간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엿새동안은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고, 단 하루는 썩지 않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토요일 밤 늦게까지 한 주간의 수입과 지출 등 복잡한 은행 결산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몇 시간 눈을 붙인후에, 주일 오전 일찍 식구들이 총출동해서 주일학교에 출석 교사와 학생으로 생활하던 은행차장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유명 선교단체에서 대표 강사로 세계적인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는데, 제가 물었습니다. 은행원으로 그리고 주일학교 부장으로 힘들지 않으냐? 대답은 세상 일은 힘들 때가 많으나, 교회일은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그 내용은 균형잡힌 삶을 살려고 힘쓰는 때문 같습니다. 크리스천은 저마다의 자랑스럽고 힘겨운 멍에들이 있습니다. 억지로 또는 무리하게 짊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동행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473.

시편 75:1-3.

찬송 236.

 

1.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서울을 배경으로 활동한 장 혼/장혼(1759-1828)은 중인 신분으로, 요샛말로 하면 전문 편집인으로 괄목할 성과를 남긴 사람이다. 그는 1790년 교서관/校書館 사준/司準으로 재직하면서 1816년까지 수많은 서책을 교감하여 출판했다. 그가 남긴 평생의 소망/平生志에는 인왕산 아래 옥류동 골목 맨 끝에 있는 허름한 집 하나에 마음이 끌려 늘 그 집을 구입하여 새롭게 꾸미고 싶어 했다. 주변의 자연환경도 마음에 들었고, 도심에 가까우면서도 조용한 점도 마음에 들었다. 집값이 50쾌라서 이를 사서 조촐하게 꾸미는 것을 상상하였다.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고 채소밭을 일구고 찾아오는 손님들과 시를 수작하는 호젓한 지블 꾸민다. 그렇게 하는 비용이 250쾌이다. 모두 300쾌이면 이이암/而已痷(장혼의 호)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 비용이 없으니 말짱 꿈이다.” 평생의 소원을 이루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안대회, 고전 산문 산책, pp.536, 547.

 

2.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열 번째 주일로 사도서간 엡 3:14-21을 본문으로 세상이 알아야 할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로버트 풀검의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란 책은, 미국 국회에서도 낭독되는 열풍을 일으켰는데, 만일 학생이 공부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새댁이 밥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이 보다 더 낭패는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잘 알고 있으리라 기대했다면 더욱 낭패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다면 어떨까요?

 

세상 사람들이 눈뜨지 못하는 낭패 중의 낭패가 하나 있습니다(14-16).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중요한 것과 더 중요한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최근에 저의 주치의가 된 분이 있습니다. 50대 말 정도 되는 분인데, 궁금증을 물어보기라도 하면 큰 소리로 꾸중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주의 점을 한 번도 말해 주지 않았는데, 그걸 제게 덮어씌웁니다. 입틀막을 하니까 더 이상 말문이 닫히고 맙니다. 처음에는 병원장에게 항의 서한을 써볼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그만 두었습니다. 얼마나 환자들에게 시달렸으면 저럴까 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제게 해 주었다는 주의 말도 누군가에게는 했을지 모릅니다. 의사는 환자를 돕고 싶은 마음이 더 중요한 것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 국어선생님은 선배셨는데, 당신의 제자들을 정말 사랑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 선생님이 많은 제자들에게 공부하는 기쁨을 깨우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사도는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17-19).

자녀를 데리고 와서 기도부탁을 하는 교우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이 기대하는 기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충성심, 솔로몬의 지혜, 엘리야의 신실함, 노아의 인내 등등을 자신의 자녀들이 은총으로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해 달라고 말입니다. 제가 가장 힘겨워하는 내용들입니다. 그런 내용들을 이루려면 엄청난 땀과 눈물 그리고 시련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맞춤 기도문을 준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아이에게 철든 인생을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철만 들면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는 철든 인생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기만 하면, 누구나 위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내게 임했는지를 배우려고 힘써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심을 믿어야 합니다(20-21).

우리가 기도하거나 일을 할 때, 그 목적을 붙들어주는 근거가 확실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희망의 돛을 올리고 인생이라는 먼 길을 향해 힘차게 떠나가지만 오래 버티지를 못하고 주저앉거나 되돌아옵니다. 물거품과 같은 희망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를 바울 사도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든 문제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떠난 데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무당이나 박수들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대로 부르거나 내 쫓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 안에 들어와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리석을 때는 가르쳐주셨고, 위기에 처할 때는 지켜주셨으며, 낙심하고 슬퍼할 때도 곁에 계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사랑으로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송하고 영광 돌리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윗보다도, 솔로몬이나 엘리야보다도 모세나 노아보다도, 더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지난 주간에 26회 방사선 치료를 마치고 아산에서 가료 중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많은 분들의 기도의 성원을 입었습니다. 감사 또 감사 드립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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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466.

시편 74:3-5.

찬송 217.

 

1.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일시적인 부는 구해서 얻지만, 영적인 선물은 포기함으로 얻는다. 크리스천은 달성코자 하는 스스로의 목표가 없다. 그는 수동적으로 언제나 하나님이 자신을 쓰시도록 맡겨버리기 때문에 김장감을 느끼지 않고 성화된다. 그러나 당신의 성화가 당신의 야심은 아니다. 그것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야심이다. 당신이 긴장감을 풀고 마음 편히 있음으로 그것에 도달할 수 있다.” 범브란트, 새장을 벗어난 새의 이야기, pp.114-115.

 

 

2. 오늘은 성령강림절후 아홉째 주일로 구약 렘 24:1-6을 본문으로 하나님의 뜻은 우리와 달랐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어찌하려고 이러십니까?” 라는 한탄을 합니다. 제 뜻대로 안된다고 막말을 해댄다는 말입니다.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하던 어느 목사의 망발도 테스 형을 가장한 하나님에 대한 비난이었습니다.

 

절망의 시절은 하나님을 갈망하기에 최적의 때입니다(1-2).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순경/順境이 때는 세상살이가 모두 자신에게 우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자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도 함부로 하고 행동도 버릇없습니다. “하나님 까불지 마!” 라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정신 차리게 할 아무런 방법이란 회초리가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감당하기 어려운 이런 시련을 만나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기도 합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왕 여호야긴을 비롯하여 지식인과 높은 관리들 그리고 은장이 대장장이 등 기술자들을 다 붙잡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왕과 일꾼들을 다 잃어버린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절망을 없을 것입니다. 그때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살길을 열어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때 성전 앞에 맏물 무화과 바구니와 썩어 먹을 수 없는 무화과 바구니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현실에 대해서 질문하셨습니다(3-4).

사람들 중에는 보고 듣고도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감각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주 질문하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고 말입니다. 우리가 깨어있는 신앙을 자주 이야기하는데, 깨어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던지시는 질문을 듣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보 같은 사람들은 무슨 음성이나 환시로 듣게 하거나 보게 하는 줄로 생각합니다. 어느 선생님도 자신의 미래를 바라보게 할 수 없습니다. 그 자신이 깨우침을 가져야 볼 수 있는 것이 자신의 미래인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세상을 향한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즉시로 무화과가 보이는데, 하나는 무척 좋은데, 다른 것은 먹을 수 없이 썩어버렸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깨닫는 자에게 하나님은 말씀을 이어가실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여러분 앞에 놓여 있는 현실에 대해서 무엇을 깨닫고 계십니까?

 

절망의 시절을 희망과 환희의 시절로 바꾸어 주시겠다 약속하십니다(5-6).

세상에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있고,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수준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산 YWCA 성경반을 지도할 때, 지원자가 너무 많아서 40명만 모집한다는 안내와 많이 오면 커트라인을 두겠다고 했습니다. , 학력이나 지식수준이 아니라 교사의 말에 순종 여부라는 힌트를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40명을 채웠는데, 서울대 출신 이대 출신 부산대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딱 한 분 초등학교 출신이 있었습니다. 누가 선생의 마음에 쏙 드는 훌륭한 학생이었을까요? 그분은 단 한분 초등학교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문맥을 따라 문제를 풀었습니다. 절망의 시간을 계속될 것이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무화과 과일처럼 잘 돌보아, 헐지도 않고 뽑지도 않고 잘 심으리라 약속하신 것입니다. 한국기독교회는 오래 전에 술독에 빠져서, 독재자 주변을 떠나지 않으며, 점쟁이들과 어깨동무를 할 수 있겠습니까?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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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452.

시편 시 72:11-14.

찬송 36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파란만장한 이력을 가졌다. 1954년 서독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으나, 몇 주가 지나서 동독 교회에 목사가 필요하다는 청을 받고 동독으로 넘어가 동독교회를 섬긴 호르스트 카스너 목사가정에서 자랐다. 1990년 동서독 장벽이 무너져 통일이 되자, 그녀는 1991년 헐무트 콜 내각에서 여성 청소년부 장관을 거쳐, 연방 하원의원에 8차례 당선되었고, 2005-2021년까지 4차례 독일 총리를 역임하였다. 그가 남긴 명언은 빨리 가고 싶다면 혼자 가도 된다. 그러나 멀리 가고 싶다면 함께 가야 한다.” 이다. 빨리 가고 싶어서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휘청거린다.

                박성완, 24. 7. 6.

 

2.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일곱째 주일로, 사도서간 고후 12:1-10을 본문으로 환상과 계시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이른바 신비체험은 모든 기독교인의 로망일 수 있습니다. 신비한 음성을 듣고 놀라운 기적 한 복판에 서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자랑스럽고 확고한 신앙의 반석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한 경험자의 말을 들어봅시다.

 

초대 기독교회는 신비체험자들로 넘쳐나 혼란스러웠습니다(1-4).

50-60년대는 용문산에서, 70-80년대는 한얼산을 중심으로 신비체험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방언을 받았다는 평신도들의 기도 소리가 교회당을 흔들었습니다. 정숙한 예배를 강조하던 장로교회에서는 이런 현상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허용했지만 교회당에서는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막을 수 없었습니다. 방언기도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박수를 치며 복음가를 부르는 모습이 빈번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이를 막으려 했지만 터진 봇물과 같았습니다. 한얼산 골짜기는 기도소리로 캄캄한 밤을 하얗게 밝히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제3자처럼 담담히 고백하였습니다. 그의 신비체험은 모든 사람을 능가했습니다. 그는 셋째 하늘까지 올라가게 되었는데, 몸과 함께 갔는지 영만이 갔는지는 모르겠다 했습니다. 낙원과 같은 곳인데,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말을 들었습니다.

 

신비체험은 교만병에 들게 하였고, 이를 막기 위해서 가시를 주셨습니다(5-8).

신앙생활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교만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때에 교만해졌습니다. 그것은 이만하면 충분하다거나, 성공했어라 거나, 이보다 더 행복할 순 없다고 남들 앞에서 자랑할 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때를 위기로 생각해야 하는데, 오히려 이런 때를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교만병에 들게 되자,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순종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인류의 흥망성쇠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영웅호걸들이 자신이 최고의 지혜와 능력을 가졌다고 호언장담할 때 몰락의 길로 떨어진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였던 선배 한 분이 있었는데, 세계적인 학자라고 추켜세우자, 천국에 갔다 왔다는 책을 낸 것입니다. 바울은 교만병으로 세 가시로 고통당한다. 고백하였는데, 안질과 치질 그리고 간질이었다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교만병의 멍에를 평생 짊어지고 살면서 그 멍에를 자랑해야 했습니다(9-10).

교만병의 폐해는 심각하여서, 사도 바울은 이를 가시에 비유하였습니다. 한번 박히면 살을 뚫고 깊이깊이 빠져들어 가는 가시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서 세 번씩이나 하나님께 간청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너는 이미 은총을 충분히 받았다.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하나님의 은총과 권능이 자신에게 머물러 계시도록, 더욱 더 자신의 약점들(가시들)을 열심히 자랑했고, 그 때문에 사람들에게서 모욕과 빈곤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아야 했다 고백하였습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은총과 권능을 받았다면, 더 건강하고 부유하고 온갖 축복이 넘쳐야 하는데, 오히려 모욕과 박해를 당했다면 말입니다. 교만병을 극복하는 방법은 교만병이 가져다주는 가시들을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안질과 치질 그리고 간질을 반길 사람은 없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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