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354.

시편 시 55:15-17.

찬송 155, 15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노래책을 꺼내 좀이 기어 다니는 책장을 넘기며 노래를 부른다. 햇빛을 향해 뻗던 화초들 줄기가 내가 매일 노래 부르는 쪽으로 휜다.” 양 선희 시인의 <음악 요법>이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하는데요. 음악 요법은 절박한 마음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지요. 덤으로 화초들 줄기까지 노래가 들리는 쪽으로 휜다고 했습니다. 화초들이 노래를 더 잘 들어보려고 귀를 쫑긋 세우는 모습, 상상만으로도 참 어여쁘게 느껴지는데요. 이제부터는 우리도 노래 쪽으로 몸이 슬며시 기울어지는 그런 시간이겠지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9330일 방송>

 

2. 우리 주님의 부활절 복음서는 막 16:1-8, “부활신앙은 최상의 축복이다.”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주변의 목사들은 부활주일 설교가 가장 어렵다고 말하곤 합니다. 부활을 증명하려고 힘쓰는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신앙이란 증명할 수 있을 때만 빛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은 성령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주신대로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세 여인은 향유를 들고 주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1-4).

제가 목회 4년 차인 어느 초겨울에 부산의대 기독학생회의 수련회 강사로 3일간 양산 통도사 부근의 한 기도원에서 진땀을 흘린 일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확신이라는 주제로 부탁을 해 왔었습니다. 그때 저는 파스칼의 노름이라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이며 신학자인 파스칼이 신앙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는 잘 알려진 공식을 소개했습니다. 유대민족을 광야 40년 동안이나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게 하면서 신앙을 훈련했음에도 실패했던 신앙을, 확실하게 공식 하나로 증명함으로 믿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시도는 진행 중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석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유대인의 관습대로 죽은 지 사흘된 시신에 향유를 바르려 무덤을 찾았는데, 무덤 문을 막고 있던 큰 돌을 어떻게 굴릴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을 모를 때의 모습입니다.

 

흰옷 입은 젊은이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5-6).

태산 같은 걱정은 사라졌습니다. 큰 돌은 굴려져 무덤은 열려 있었고 한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여인들에게 주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난데없는 청년을 훗날 사람들은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그 단어 외에 다른 말을 찾을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 천사는 여인들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말들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많은 말들이 생략되어 있지만 다른 복음서들로 보완을 하면,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28:6, 24:6-7). 여자들은 그곳에 머물러 서성거릴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어디로 그리고 누구에게 가서 어떤 말을 해야 할 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신앙은 증거자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참된 신앙이란 주님의 말씀을 회상하거나 기억함으로 출발하고 완성되는 것이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을 기억할 때만 창조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24:8) 부활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를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5).

 

부활신앙은 거룩한 두려움 앞에서 초라한 자신을 직시하게 만들었습니다(7-8).

두려움이란 말은 헬라어로 포베오(φοβεω 두려워하다)는 동사로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무려 75%이상 사용되는 수동태 동사입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란 존경한다, 경외한다는 의미로도 자주 쓰입니다. 그럼으로 부활신앙이란 우리 자신이 능동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밖으로부터 우리를 움직이는 강력한 힘에 의해서 작동하는 능력이었다는 말입니다. 무덤을 찾은 여자들은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을 때, 발이 땅에 얼어붙는 것처럼 떨렸고, 이어서 환희의 전율을 느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거룩한 두려움을 체험한 많은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엘리야, 막달라 마리아,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 바울과 디모데 등입니다.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게 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크고 작은 거룩한 두려움을 우리들에게 주십니다.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47.

시편 시 54:1-3.

찬송 41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린다.” 에멜 자토펙이라는 체코 출신의 마라톤 영웅이 이런 말을 했답니다. 얼핏 들으면 너무 당연한 말인 것 같지만.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선, 달려야 한다는 것,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말인데요. 달리기 이야기를 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소설가 하루끼는 이런 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오래 살기 위해 달리는 것이 아니다. 비록 짧게 살 수밖에 없더라도, 그 짧은 인생을 완전히 집중해서 살기 위해 달리는 것이다.” 중요한 것 달리기 자체가 아니라, 완전히 집중하는 삶, 바로 그것이겠지요. 오늘도 그런 하루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9326일 방송>

 

2. 종려주일의 사도서간 빌 2:5-11을 본문으로 왜 그랬을까?”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고난 주일을 의미 있게 보내려는 분이라면 적어도 이 질문 왜 그랬을까?”를 진심으로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하늘 왕좌를 버리고 종의 자리에 오셨고, 어찌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셨을까? 어찌하여 최고의 영광을 예수께 주셨을까?

 

첫 질문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리를 내려놓고 종의 자리인 인간 세상에 오셨을까? 입니다(5-7/ 3:16).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바보처럼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시련과 역경을 짊어지려 하지 않고 멋진 인생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199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존 포브스 내시는 수상 소감에서, 조현병이란 정신병을 앓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한 아내 알리샤에 대한 얘기만을 하였습니다. 영광이란 꿈도 꿀 수 없고 대신 잘못되면 자신도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도 끝까지 사랑한 한 여인이 자신의 전부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묻습니다. 어찌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리를 내려놓고 가장 불행한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셨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것은 넘치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의 힘을 예수님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며,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차디찬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는 삶을 택하셨을까? 입니다(8).

우리는 살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나 사건들을 만날 때, 큰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이른바 값진 삶이라며, 헛된 일처럼 보이는 일에 매달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쓰레기 같은 일에 인생을 낭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깨우침입니다. 값진 삶을 사는 이들이란 묵묵하게 농사를 짓거나 유기견들을 돌보거나 매일 쑥이며 냉이를 팔러 장터에 나와 좌판을 깐 촌로들입니다. 그런가하면 쓰레기 같은 삶을 사는 이들이란 정치가나 권력자가 되어보려고 발악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이 에이브래함 링컨이었는데 하나님이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이 전자라고 말입니다. 후자가 쓰레기 같은 인물들인가는 나다나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에 등장하는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온갖 추악한 음모와 살인 모략 등으로 세상을 어지럽힌 사람들인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한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 질문은 하나님은 누구에게 최고의 영광을 주셨는가? 입니다(9-11).

어리석은 사람들이란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망각증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자를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권선징악>이라는 말이나, <사필귀정>이라는 말은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도덕불감증에 걸린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종교인들도 예외가 아니며, 특히 기독교 지도자들이 가장 많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매우 평범한 일에서 깨닫고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일터를 주셨고, 어울려 살도록 질서를 위해서 지도자들을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가 하나님의 자리처럼 오해한 것입니다. 자신의 직무를 벗어난 말과 행동을 서슴없이 자행합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주시기를 좋아하십니다. 그 대상들은 이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될 게 분명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40.

시편 시 51:17-19.

찬송 13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지/奧地의 마법사를 찾아 떠났던 도로시 일행과, 행복을 찾아 파랑새를 찾으러 나섰던 치르치르와 미치르, 이상/理想을 향해 말을 몰고 떠나는 돈키호테, 이 모두가 부럽습니다. 그들이 찾은 교훈과 행복한 결말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힘들게 하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지 않아도 되고, 언제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는 점에서요.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며칠의 여행도 현실을 걱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마음이 막힘없이 자유로운 사람이 가장 부럽습니다. <KBS FM 1, 가정음악, 2009318일 방송>

 

2. 사순절 다섯째 주일의 구약성경 렘 31:31-34을 본문으로 새 계약의 특징들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문명사회란 복잡다단한 사회 구성원들을 질서정연하게 통제할 수 있는 규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 나라는 자신들만의 헌법을 제정하고 그 헌법에 따른 규약들과 시행령을 만들어 사회와 나라의 질서를 유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계약이라는 말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개정된 새로운 규율이 필요해졌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새 계약이란 어떤 것입니까?

 

예레미야가 소개하는 새 계약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31-33).

선거철이 되면 사람들은 많은 변화를 기대하기도 하고 실제로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변화는 내용이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용을 바꾸는 일은 엄청난 비용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시간도 필요하고, 절차와 과정이 복잡할 뿐 아니라 저항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형식을 바꾸는 것은 그에 비해서 훨씬 더 단순하고 가볍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 맺었던 계약의 내용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그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계약 내용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새 계약을 요청하는 쪽이 하나님이라는 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약을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맺게 될 새 계약은 종이나 돌에 새긴 것이 아니라, 그 백성의 가슴에 새기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시니 이스라엘은 가슴에 새긴 계약을 갖게 되었습니다.

 

새 계약을 가슴에 새기는 효과는 그 백성을 용서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34).

유대교나 기독교의 진리를 오해하거나 곡해하는 사람들의 치명적인 문제는 모든 문제 풀이의 주체를 인간 편에 두는 일입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더욱 더 철저히 지킴으로 구원에 이르려 하는 것이고, 기독교의 아류들은(알미니안)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 미안해서, 희미하게 남아 있는 자유의지로 자기 공로를 발휘하려고 합니다. 가장 어리석고 미련한 방법입니다. 이는 일반 종교가 주장하는 선행과 수행으로 완덕/完德에 이르려는 노력과 한 치도 다를 바 없습니다. 성경의 중심점이라고 할 요 3:16은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가 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그리스도(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이고, 진리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이 십자가의 도를 구원의 표지/標紙로 삼았고 증거하였습니다.

 

새 계약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 뿐 아니라, 기독교 구원의 뿌리가 되었습니다(4:12, 21:9).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예수를 변호하며 외친 증언입니다. 이 증언은 기독교는 더 이상 종이나 돌비에 기록된 계약이 아니라, 사람들의 심령에 새겨진 계약을 지킬 무리임을 온 천하에 밝힌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질문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옛 계약은 무엇이고, 새 계약은 무엇입니까? 옛 계약은 종이와 돌비에 새겨진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 곧 십계명을 비롯한 613가지 계명들입니다. 그렇다면 새 계약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을 믿는 그 한가지 입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 예표가 유대광야에서 시연되었고, 모세가 바로 그 증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인 십자가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33(2024. 3. 10. 사순절 넷째 주일).

시편 시 50:19-21.

찬송 51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정호승 시인의 시집 제목인데요. 재미삼아 여러 가지로 슬쩍 변용해 볼 수도 있겠지요? 후회하니까 사람이다. 실수하니까 사람이다. 흔들리니까 사람이다. 이렇게도 얘기해 볼 수 있겠지요. 오후의 피곤이 조금 더 빨리 느껴지는 월요일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지. 이렇게 좀 더 관대하게 말해 주는 마음의 영양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939일 방송>

 

2. 사순절 넷째 주일의 복음서 요 3:14-21을 본문으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교회력은 우리 주님의 생애를 살피는데 가장 바람직한 안내서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고난 한 복판을 살아가면서도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더욱 더 기피하는 주제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의미가 있습니다.

 

놋뱀 사건은 십자가 사건의 예표이면서 신앙의 신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14-15, 21:4-9).

광야 생활 40년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신앙을 배우는 다시 없는 기회였지만, 깨달은 자는 극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소위 체험 신앙의 약점이 고스란히 밝혀진 셈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40년이란 긴 세월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기적 속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 매일 이른 새벽에는 만나를 내려주셨고, 석양에는 메추라기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메마른 광야에서 맑은 샘물을 마실 수 있게 하셨으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사막의 더위와 추위를 이겨내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의 입에서는 원망과 불평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불뱀사건이었습니다. 원망하는 사람들을 불뱀에 물려죽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로 불뱀에 물린자는 높은 장대 끝에 매단 놋뱀을 바라보게 하셨고, 바라보는 사람을 죽음에서 살려주신 것입니다. 놋뱀을 바라보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살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죄와 죽음에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이란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진심/眞心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에 달려있습니다(16-18).

한국교회는 알미니안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적인 타락을 시인/是認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인간 자신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양 유혹합니다. “지금 당장 죽어도 천국갈 수 있다 확신합니까?” 하고 인간의 확신 여부에 구원이 달린 듯 가르칩니다. 그러나 인간의 확신이란, 바람에 나부끼는 초개(지푸라기)보다 믿을 게 못됩니다. 그렇게 확신을 힘주어 말하던 베드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에서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마감되었습니다.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총을 가르쳐야 할 루터교회와 장로교회가 제 구실을 못하는 때문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인지, 매순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향해서 최선을 다하려 힘써야 구원받은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빛과 소금으로 세상을 사는 모습입니다.

 

십자가는 구원받은 모든 크리스천이 짊어지고 있는 모습이어야 합니다(19-21).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는 십자가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무리 교회당이 크고 봉사 활동이 활발하다 하더라도, 십자가를 찾을 수 없다면 기독교의 아류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지역교회 목회자들이 생활고를 겪고, 예배당이 비가 새고 이런저런 고초를 겪는다고 해도,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십자가를 기대하고 출발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준 사람들은 자신의 전 생명을 주님께 맡기고 살았던 헌신자들이 시대마다 우뚝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고후 5:17). 지혜로운 사람은 이런 사람이 되기를 희망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뿐 아니라, 순간 순간의 삶의 갈림길에서 향방을 선택하게 될 때는(고전 9:26), 반드시 기준이 되고 원칙이 되도록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26호.

시편 시 49:16-20.

찬송 40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에도 근육이 있어. 처음부터 자라는 것은 어림도 없지. 하지만 날마다 연습하면 어느 순간 너도 모르게 어려운 역경들을 벌떡 들어 올리는 널 발견하게 될 거야. 장 미란 선수의 어깨가 처음부터 그 무거운 것을 들어 올렸던 것은 아니잖아? 지금은 보잘것없지만 날마다 조금씩 그리고 가보는 것, 조금씩 어쨌든 그 쪽으로 가보려는 것, 그건 꼭 보답을 받아.” 공 지영 작가의 신작 에세이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중 에서 전해드렸습니다. 어려운 일을 겪으면 겪을수록, 마음 속 근육이 점점 단단해 져서 나중에는 더 큰 어려움도 감당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이 말이 지금 힘든 시간을 겪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위로와 용기로 전해졌으면 합니다.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933일 방송>

 

2. 사순절 셋째 주일의 사도서간 고전 1:18-31을 본문으로 십자가의 도를 자랑하자.”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불교가 사성제 팔정도를 구원의 진리라 한다면, 기독교회의 진리는 십자가의 도/라고 해야 합니다. 죄와 죽음에 빠진 인간을 대신해서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이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입니다(3:16).

 

고린도 교회는 십자가의 (진리)에 대해 심각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18-23).

십자가의 도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유감스럽게도 십자가의 도는 기독교회의 중심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강조되지 않는 것은 물론 그 상징인 십자가를 스크린으로 가려버리는 교회들도 많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1세기 고린도 교회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반론을 제기하는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의 주장은 언급하면서도 정작 교회의 변호는 사도가 대신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에 대한 유대인들의 주장은 오점(스캔들)에 불과하고,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짓(몰리아)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죄악의 시궁창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한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십자가의 도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힘이고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현현이라고(5:8)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만 열려 있는 진리였습니다(24-25).

구약에 선민사상이 있다고 하면, 신약에는 부르심이라는 사상이 있습니다. 선민사상이란 세상에 있는 많은 민족 중에서 특별히 택함을 받은 백성, 곧 히브리 민족으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고 있습니다(12:1-3). 그런데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 민족에게만 복을 주시려는 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민족을 일꾼으로 삼아서 세상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복을 나누어주는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려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정신은 신약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알게 하신 후, 십자가의 도를 세상 끝까지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선민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진 특권은 하나님의 현존인 말씀을 맡은 것입니다.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고 증거할 책임 말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자랑하고 전파할 과제를 모든 크리스천에게 맡겨주셨습니다(26-31).

십자가의 도는 사람이 꾸며낸 신화나 영웅담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전하는 하나님의 지혜는 무슨 요술방망이처럼 어리석고 미련한 자를 불러내어 세상에서 지혜롭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시고, 세상에서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시려고 가장 약한 자들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시는 것은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9:23 을 인용하였는데,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시오.”라고 말입니다. 요즘 들려오는 소식들은 부정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신대원 졸업생 6명중 한 명만이 목회현장에 파송된다고 하며, 농어촌 교회는 목회자가 떠나가고 있다 합니다.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도를 자랑하지 않고 십자가의 도를 전파하지 않는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12(2024. 2. 18. 사순절 첫째주일).

시편 시 46:1-3.

찬송 36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늘 자리를 바꾸고 싶어 하는 그런 병에 걸려 있다.”고 프랑스의 작가 알랭드 보통은 이야기합니다. “어딘가로 옮겨가게 될 것을 늘 꿈꾸면서,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항상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린 알고 있습니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가면 그곳에서는 또 다른 곳을 꿈꾸면서 살아 갈 것이 분명하다는 것 말입니다.” 가장 소중한 건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삶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새겨보면서, 월요일 아침 힘차게 출발해 보겠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9216일 방송>

 

2. 사순절 첫째주일의 사도서간문 약 1:12-18 본문으로 시험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교회가 사순절을 정하고 지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주님께서 어떻게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시고 승리하셨는가를 배우는 것 못지않게, 현재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 고난을 어떻게 감당할까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시련은 모든 인생이 피할 수 없는 멍에이면서, 동시에 이겨내야 하는 과제라는 사실입니다(12).

야고보 사도는 행복한 사람이 누군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면류관에 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주제가 엄청난 비중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중심 단어는 시련을 견디어 내거나, 시련을 이긴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용하는 시련이라는 낱말은 페이라스몬이란 말로, 시련이라는 말이나 유혹이라는 말로 번역됩니다. 시련과 연단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의미를, 유혹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를 나타냄으로 조심스럽게 번역해야 합니다. 시련과 연단을 끈기와 인내로 잘 극복한 사람에게는 행복과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는데 반해서, 수많은 유혹의 덫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은 불행과 수치의 나락에서 허우적거릴 뿐입니다. 우리 모두가 감사해야 할 것은 시련과 유혹은 모든 사람들 앞에 동일하게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끝까지 참고 이겨내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유혹하거나 시험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13-15).

우리는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누군가 희생양을 만드는 못된 습관이 있습니다. 혼자 책임을 지려니까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생각한 것입니다. 그 책임전가의 1순위가 하나님이란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참 많이 하였습니다. 일이 잘 풀리거나 좋은 일이 생길 때는 자화자찬을 늘어놓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문제 해결이 늦어졌던 것입니다. 책임소재가 불명확하니까 진단이 잘 안 되었고, 수정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께서는 유혹을 받지 않으실 뿐 아니라, 악을 행하도록 유혹하지 않으신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유혹에 넘어가거나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은 우리들의 욕심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욕심에 빠진 사람은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습니다. 그 스스로 욕심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 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과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16-18).

우리 크리스천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시련과 유혹으로 힘들어할 때만이 아니라, 일취월장 만사형통하다고 생각할 때 교만해지기 쉽다는 사실입니다. 남의 꾀에 잘 빠지거나 속임수에 넘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그 자신에게서 사기성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정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얕은꾀에 넘어가거나 속임수에 빠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우들 사이에 서로 불신하고 경계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한 때 어느 대형 교회에서 큰 금융사고가 벌어졌는데, 재력을 과시하고 분에 넘치는 접대를 받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고 합니다. 상호 신뢰를 기본으로 생각하는 성도들 사이에서 고리대금을 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풍성한 은총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3. 오늘은 도봉루터교회 창립65주년 기념 예배에서 설교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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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05(.

시편 시 44:24-26.

찬송 25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히말라야에는 세계의 지붕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높은 산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형이 워낙 높고 험준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습니다만, 히말라야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히말라야 정상에 오르는 일이 좀처럼 없다고 합니다. 산의 정상을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신성한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겠지요. 그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부분은 인위를 가하지 않고, 그 모습 그대로의 신성함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리고 대상이 지닌 존엄한 가치를 가장 올 곧이 받아들이는 방법이기도 하겠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9211일 방송>

 

2. 주현절 후 여섯째 주일의 사도서간 고후 3:12-13, 4:1-6을 본문으로 복음을 자랑하자.”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기쁜 소식이라는 뜻의 복음은 이 세상에 들려진 가장 귀중한 소식입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이 복음의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유는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고,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모르는 때문입니다.

 

복음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3:12-14).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할 것과 알지 않아도 될 것에 대해서 분별력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랜 옛날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후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되자 이를 백성들에게 보이면 그들에게 해가 미칠까 해서(33:20) 자신의 얼굴을 너울로 가린 적이 있었습니다(34:29-35). 그런데 이런 옛적 일화를 염두에 둔 사람들이 마치 너울로 얼굴을 가리듯 복음을 가리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를 우둔한 일이라 지적하였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을 때의 일이라 해석합니다. 크리스천들은 더 이상 복음을 가려서는 안되겠습니다. 문제는 크리스천들 역시 복음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엉터리 설 교가들이 외치는 만사형통을 외치는 기복신앙의 관용어가 아닙니다. 예수가 우리의 구주이심을 듣는 것은 가장 큰 기쁜 소식이라 하겠습니다.

 

복음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멸망하는 자들에 해당된다 말씀하십니다(4:1-4).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는 엄청난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도, 그리고 해야 할 일도 아닙니다. 저의 백부님은 70살이 넘어서 세례를 받고 명예 집사가 되신 분입니다. 이른 아침 저의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릴 때마다 툇마루 끝에 앉아계시면서 예수가 밥 먹여 주느냐?” 며 저의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신 분이셨는데, 너무 늦은 나이에 회개하고 크리스천이 되신 것입니다. 저의 집안에서 가장 늦게 예수를 구주로 믿으신 분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으면 누구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사도는 이런 진리를 알고 있었고, 복음을 외면하는 이들은 멸망하는 자들에게 해당된다 설교한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젊은 날에 방탕한 생활을 하던 아들 아우구스티누스를 위해 어머니 모니카는 눈물로 엎드린 기도의 힘을 믿었다 말했습니다.

 

복음 전도자들은 오직 복음을 자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5-6).

우리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보면 이른바 바벨탑을 쌓던 수고는 허망하게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허망하지 않게 우뚝 솟아 있는 것은 위대한 신앙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80년대 초에 여름 성경학교를 열면서 티셔츠를 나누어 주는 교회와 그렇지 못한 달동네 교회 아이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이를 보도한 <기독교사상> 지가 당시 전두환 정권에 의해 크게 곤욕을 치러야 했습니다. 티셔츠나 교회당 건물과 교세, 프로그램, 이런저런 활동을 자랑하는 교회들은 정신을 차리고 복음을 자랑하는 교회로 돌아서야 합니다. 헛된 일에 힘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자랑하는 일은 모든 교회 지도자들이 힘쓸 일이고, 모든 크리스천들이 동참할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 설교가 예수 중심이 되어야 하고, 삶의 의미와 목적이 예수 중심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복음 전파에 힘쓰는 모든 전도자들에게 응원을 보냅니다.

 

3. 오늘은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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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298(2024. 2. 4. 주현절후 다섯째 주일).

시편 시 44:4-6.

찬송 466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봄의 기운이 들기 시작한다는 입춘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24절기 가운데 가장 첫 번째 절기인 입춘을 또 다른 새해의 시작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집집마다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글귀를 적어서 대문 앞에 붙이던 풍습도, 바로 이런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데요. 만물이 새로운 생명을 싹틔우기 시작한다는 오늘, 입춘이라는 말만 들어도 봄이 성큼 다가온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오늘 하루 마치 새해 첫날을 맞이하는 기분으로 또 새롭게 시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924일 방송>

 

2. 주현절후 다섯째 주일의 구약성경 이사야 40:21-31을 본문으로 절망하는 그대를 지키시는 자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사람의 인품이나 신앙을 알아보기 좋은 기회가 있습니다. 그것은 시련과 역경을 겪을 때입니다. 피할 수 없는 절망이라고 느낄 때 하나님께 실망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태도로 하나님께 불신앙을 드러내곤 합니다.

 

하나님이 뽑아내신 이스라엘도 시련 앞에서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하였습니다(27).

성경에 등장하는 신앙의 인물들 중에서 욥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련과 고통을 겪을 때,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하였습니다. 수도 없이 많은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배고프고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우리들 역시 어려운 일이 겹치거나, 실패와 시련을 당할 때, 예외 없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당신의 능력의 팔로 붙잡아 주시고 지켜주신다는 믿음이 무너져 내렸다고 생각한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고생길에는 관심도 없으시고, 그들이 누려야 할 권리 같은 것은 아는 체도 하지 않으신다 불평하였습니다.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 한국인의 특징 중 하나는 혼잣말을 자주 한다는 것을 지적하였는데, 무력한 자신을 위로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원망과 불평은 신앙이 성숙할 기회를 놓치는 장벽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절망하고 낙심하는 사람들을 붙들어 주시는 창조주이십니다(28-29).

오랜 훈장 생활을 통해서 빠른 성공과 출세를 바라는 젊은이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바꾸고 교회를 개혁하겠다는 뜨거운 열정을 토로하였습니다. 그리고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기성세대를 무기력하고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심지어 수십 년을 목회한 대 선배에게 자신의 성공 비전을 심어주고 싶어 안달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현실을 마주 대하고는 그리 오래지 않아 꼬리를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곤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며 어설픈 변명을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의 성실성이나 진정성 여부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들 삶의 길목에는 수도 없이 많은 시련과 역경의 골짜기들이 있고, 악마의 함정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선배들은 인내와 겸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머리를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R. 브라우닝의 <피파의 노래>를 음미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30-31).

대학졸업 50년이 됐다며 <재상봉 동문의 날>에 초대를 받고 일화집을 통해 추억을 일깨워 달라 부탁을 받았습니다. 쥐들이 갉아먹다 만 스크랩북에서 입학통지서, 등록금 고지서, 도서대출증 등을 살피다가 교수님들과 함께 드린 예배 순서지를 발견했습니다. 설교는 제가 했고, 본문은 시 121:1-8, 제목은 너를 지키시는 자였습니다. 본문의 시인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유대인으로 가정했고, 처절하게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의 돌무더기 앞에서 부른 절망의 노래라 배경설명을 하였습니다. 시인은 다리의 힘이 풀어져 털썩 주저앉아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반전을 시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청년과 장년의 모습이 겹쳐서 어른거립니다. 그리곤 날개쳐 솟아오르는 독수리처럼, 아무리 뛰어도 고단치 않고,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 새 힘을 얻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모두 다.

 

3. 오늘은 주성 농인교회(묵상식구 우슬초목사 시무)에서 설교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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