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354.

시편 시 55:15-17.

찬송 155, 15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노래책을 꺼내 좀이 기어 다니는 책장을 넘기며 노래를 부른다. 햇빛을 향해 뻗던 화초들 줄기가 내가 매일 노래 부르는 쪽으로 휜다.” 양 선희 시인의 <음악 요법>이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하는데요. 음악 요법은 절박한 마음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지요. 덤으로 화초들 줄기까지 노래가 들리는 쪽으로 휜다고 했습니다. 화초들이 노래를 더 잘 들어보려고 귀를 쫑긋 세우는 모습, 상상만으로도 참 어여쁘게 느껴지는데요. 이제부터는 우리도 노래 쪽으로 몸이 슬며시 기울어지는 그런 시간이겠지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9330일 방송>

 

2. 우리 주님의 부활절 복음서는 막 16:1-8, “부활신앙은 최상의 축복이다.”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주변의 목사들은 부활주일 설교가 가장 어렵다고 말하곤 합니다. 부활을 증명하려고 힘쓰는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신앙이란 증명할 수 있을 때만 빛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은 성령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주신대로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세 여인은 향유를 들고 주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1-4).

제가 목회 4년 차인 어느 초겨울에 부산의대 기독학생회의 수련회 강사로 3일간 양산 통도사 부근의 한 기도원에서 진땀을 흘린 일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확신이라는 주제로 부탁을 해 왔었습니다. 그때 저는 파스칼의 노름이라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이며 신학자인 파스칼이 신앙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는 잘 알려진 공식을 소개했습니다. 유대민족을 광야 40년 동안이나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게 하면서 신앙을 훈련했음에도 실패했던 신앙을, 확실하게 공식 하나로 증명함으로 믿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시도는 진행 중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석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유대인의 관습대로 죽은 지 사흘된 시신에 향유를 바르려 무덤을 찾았는데, 무덤 문을 막고 있던 큰 돌을 어떻게 굴릴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을 모를 때의 모습입니다.

 

흰옷 입은 젊은이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5-6).

태산 같은 걱정은 사라졌습니다. 큰 돌은 굴려져 무덤은 열려 있었고 한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여인들에게 주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난데없는 청년을 훗날 사람들은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그 단어 외에 다른 말을 찾을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 천사는 여인들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말들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많은 말들이 생략되어 있지만 다른 복음서들로 보완을 하면,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28:6, 24:6-7). 여자들은 그곳에 머물러 서성거릴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어디로 그리고 누구에게 가서 어떤 말을 해야 할 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신앙은 증거자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참된 신앙이란 주님의 말씀을 회상하거나 기억함으로 출발하고 완성되는 것이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을 기억할 때만 창조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24:8) 부활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를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5).

 

부활신앙은 거룩한 두려움 앞에서 초라한 자신을 직시하게 만들었습니다(7-8).

두려움이란 말은 헬라어로 포베오(φοβεω 두려워하다)는 동사로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무려 75%이상 사용되는 수동태 동사입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란 존경한다, 경외한다는 의미로도 자주 쓰입니다. 그럼으로 부활신앙이란 우리 자신이 능동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밖으로부터 우리를 움직이는 강력한 힘에 의해서 작동하는 능력이었다는 말입니다. 무덤을 찾은 여자들은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을 때, 발이 땅에 얼어붙는 것처럼 떨렸고, 이어서 환희의 전율을 느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거룩한 두려움을 체험한 많은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엘리야, 막달라 마리아,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 바울과 디모데 등입니다.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게 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크고 작은 거룩한 두려움을 우리들에게 주십니다.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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