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277.

시편 시 39: 6-8.

찬송 50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동화작가 권쟁생 선생님은, 모든 불화와 고통의 출발점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말했지요. 자기 자신은 잘 하고 있고 모든 것이 옳은 데 상대방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불화와 고통을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내가 정말 잘 하고 있는 것인지 옳은 것인지를 꼼꼼하게 점검하다보면 남을 탓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내 마음도 더 평화로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9113일 방송>

 

2. 주현절 후 둘째주일의 구약 성경 삼상 3:1-10의 말씀을 본문으로, “하나님의 낯선 부르심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훗날 이스라엘의 유명한 제사장이며 선지자가 될 사무엘에 관한 일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은 기도의 어머니 한나가 하나님의 성전이 있던 실로에 가서 기도해서 얻은 아들이란 이름으로 낳은 아들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제사장 엘리의 부름을 구별하지 못하였습니다(3-9).

기도해서 얻은 아이인 사무엘은 젖을 떼자 엘리 제사장이 시무하는 실로의 성전에 맡겨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거처는 성전의 법궤 옆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사무엘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사장의 부름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을 부르셨느냐고 물었는데, 아니라고 합니다. 두 번 째도 그리고 세 번째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제사장에게 달려갔지만, 아니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으로 판단, 다시 부르거든 야훼여,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게 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소명/召命이라고 해석합니다. 특별한 임무를 맡기기 위해서 부르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람의 부름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일생을 순종하며 살아 갈 멍에이며, 모든 사람이 따를 삶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터인 세상을 위해 필요한 일꾼들을 부르십니다(1-2).

중국 선교를 위해 기차를 이용할 때는 현지인들과 얘기할 기회가 많습니다. 한 중국인 중학교 선생님과 동석했을 때, 학생들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가르치는지 여부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아니오.”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초등학생들에게도 장래 희망을 가져보라고 꾸준하게 가르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희망도 바뀌어 가는데, 대체로 자신의 능력을 이해하면서 현실적인 희망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인으로써 우리나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희망을 품기를 바래야 하겠습니다. 까닭은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하나님의 일터인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신실한 하나님의 일꾼들로 가득 채워지길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보내셨는지를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주변의 조언도 필요지만, 하나님께서 부르신 가장 적합한 삶의 자리와 역할을 찾고자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과 목적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10).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은 시간을 헛되게 보낸 후에 깨닫곤 합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나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누스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제 멋대로 살고 싶어 하다가 뒤늦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분들입니다. 이 말은 직업의 선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고귀한 목적을 수행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22:37-38)이라 정의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면, 무슨 직업을 가지든 무방하다는 말입니다. 이런 대강령을 품고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와 병자를 돌보는 간호사, 그리고 LPG 가스통을 배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낯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자랑스럽고 값진 인생을 살아가는 분들이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270.

시편 시 38:7-9.

찬송 18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험담하는 사람들을 멀리하라.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 하라. 당신에 버금가는 혹은 당신보다 나은 사람들로 주변을 채우라.” 미국 토크 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의 생활 십계명 중에 있는 내용들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사람들과의 인간관계가 생활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 나는 그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나와 주변의 인간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 오늘 한번 가져보시면 어떨까요?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915일 방송>

 

2. 주현절 후 첫째 주일의 복음서 막 1:4-11을 본문으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써 불편한 진실이 있습니다. 어찌하여 예수님은 죄인들이 받아야 할 세례를 받으셨는가? 하는 물음이 그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그동안 우리의 잘못된 생각도 고쳐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자청하신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4-5, 9, 3:13-14).

많은 크리스천들이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는, 예수님이 자청해서 세례를 받으신 것과 의로우신 그분이 십자가형에 죽으신 것입니다. 요한에 의한 물세례의 목적은 죄인에게 죄를 씻기 위함이었고, 또한 가장 흉악한 죄인만이 십자가형에 처해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실수하곤 하는 고정관념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흠도 티도 없는 완전무결한 분이시라 믿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아드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과,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대속물이 되셨다는 것에는 또 다른 진실이 숨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죄악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죄인의 친구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전가(轉嫁)받은 최악의 죄인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세례의식은 구약성경과 1세기 유대사회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6-8, 12:2-15:33).

더러운 것을 물로 씻어내는 의식은 유대교에 있어서는 매우 구체적이었고 또 엄격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건강한 생활을 위해서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인 예배를 준비하는 중요한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 뿐 아니라 남녀 사이의 은밀한 행위까지 적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살던 유대 사회에서는 쿰란 공동체와 에세네파가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 두 그룹은 적어도 다음 5가지 항목 곧 공동식사, 정결례, 리더십의 계층구조, 회원권 취득 그리고 재산 공유라는 측면에서 동일 그룹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에세네파의 일원이었을 것이라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에세네파의 가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례의식을 거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는 구약의 정결례를 강화한 것으로, 세례 요한은 물세례의 의미와 목적을 죄를 씻는 것이라 밝힌 것이 특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축복해 주신 때문니다(10-11).

성례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7성례와 개신교회가 주장하는 2성례가 그것입니다. 그 논쟁을 계속하려는 것이 아닙니다만, 적어도 세례와 성찬례는 모든 기독교 세계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성례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세례와 성찬례는 바로 우리 주님께서 제정해 주신 것이고, 복음의 상징이며 증표인 때문입니다. 가끔 세례 받지 않고 죽은 사람들의 구원여부를 묻는 질문을 받습니다만, 그런 질문의 답은 오직 주님께 미뤄두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감히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가타부타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누가는 <집들의 세례>를 기록하였는데(루디아의 집 세례/ 16:14-15, 빌립보 간수의 집 세례/ 16:25-34), 이는 영 유아의 사망률이 높은 시절로 성인 뿐 아니라 모든 사람(남녀노소)에게 세례의 필요를 강조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세례를 받고 물위로 올라오시는 주님을 하나님께서는 기이한 자연현상과 함께 큰 음성으로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263.

시편 시 37:25-28.

찬송 37, 101, 40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 이제 내가 되었네/ 여러 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네/ 나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녹아 없어져/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네/ , 이제 내가 되었네미국의 시인 메이 사트의 시 <, 이제 내가 되었네> 라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지요. 유난히 많은 일들이 있었던 2008년 오늘과 내일 이틀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이제라도 온전한 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는 그런 시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81230일 방송>

 

2. 오늘은 성탄 후 첫째 주일로 구약 이사야 61:10-62:3을 본문으로 시온에 붙여진 새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시온산은 예루살렘에 위치한 두 개의 산봉우리(모리아와 시온) 가운데 하나로, 훗날 다윗성이 터를 잡은 곳으로 요새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시온은 다윗을 연상하게 되고, 다윗을 계승할 새로운 나라에 대한 꿈을 꾸게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온에 붙여진 새 이름이란 무엇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예언자 이사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사명으로 들떠 있었습니다(61:10).

오늘은 2023년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날입니다. 금년 한 해는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로 정리할 수 있습니까? 벅찬 가슴으로 시작했을 텐데, 과연 그 결산은 뿌듯하십니까, 아니면 허깨비처럼 가볍습니까? 그렇게 결산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노라면 기쁜 일도 보람된 일도 그리고 자랑스러운 일들도 있었을 것이고, 부끄럽고 어리석고 바보 같은 일들도 떠오를 것입니다. 그렇게 말할 기준은 얼마나 진실 되게 하나님을 생각하였느냐로 가늠할 수 있다 말씀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만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생을 향하신 사랑이 넘치고 넘쳤다는 의미입니다. 구원의 빛나는 옷을 입혀 주셨고, 정의가 펄럭이는 겉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신랑처럼 빛나는 관을 씌워주셨고, 신부처럼 패물을 달아주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말은, 개인적이든 민족적이든 인류를 향한 것이든, 하나님의 은총이 차고 넘쳤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찬양이 넘쳐흐르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61:11).

야훼 하나님을 생각하게 될 때 그 가슴에 솟아나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넘쳐흐르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묘사하기를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것과 같고, 동산에 뿌린 씨가 움트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깨우치는 많은 것들 중에는, 생명의 신비와 기적입니다. 햐얀 눈 속에서 복수초 꽃봉오리가 솟아날 때, 그리고 꽁꽁 얼어붙은 죽음의 땅에서 마늘 싹이 얼굴을 내밀 때, 그 기쁨과 감격은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하나님은 이 같은 생명의 신비와 기적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찬란한 세상 한복판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기뻐할 줄도 감사할 줄도 모르고, 언제나 현실에 대한 원망과 불평은 물론, 미래에 대해서도 불안과 두려움을 가득 안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세상에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고통을 이겨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땅에서 새싹을 돋우시고, 동산에 뿌린 씨를 움트게 하시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온에게 새 이름을 주시겠다 약속하십니다(62:1-4).

일제 강점기에 우리는 성과 이름을 다 빼앗길 뻔 하였습니다. 약소민족의 아픔을 겪은 것입니다. 그런데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이 지금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일본 초중고등 학교 학생들이 자신의 가슴에 한국어로 쓴 명찰을 붙이고 다니는 현실입니다. 이런 통쾌한 복수가 있을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시온과 예루살렘에 새 이름을 주시겠다 하시는데, 어떤 이름입니까? “헵시바라 하시는데, 사랑하는 나의 임이란 뜻이고, “쁄라라고 하는데, 나의 여인이란 뜻입니다. 그동안 그들은 포로 생활을 하면서 수도 없이 들었던 소박데기버림받은 여자라는 이름이 이렇게 바뀐 것입니다. 더 이상 조롱을 받거나 천덕꾸러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사랑 가득한 눈으로 나의 임, 나의 여인이라고 부르신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우리 자신도 스스로를 업신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천사도 부러워하는 이름, 세상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귀한 하나님의 임으로 하나님의 여인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3. 저는 오늘 왕십리 루터교회에서 설교를 합니다. 묵상읽기를 힘들어하는 분들에겐 내년엔 배달하지 않겠습니다. 혹시 폰으로 읽는 분들은 착오가 생길 수 있으니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256.

시편 시 37:4-6.

찬송 37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루는 작은 일생이다. 아침에 잠이 깨어 일어나는 것은 탄생이요, 상쾌한 아침은 짧은 청년기를 맞는 것과 같다.” 19세기의 쇼펜하우어의 얘기입니다. 사실 동양에서는 훨씬 오래 전부터 이런 얘기를 해왔지요. 중국 은나라 탕왕은 <일신/日新 우일신/又日新> 날로 새롭게 하며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자는 의미의 글귀를 늘 가까이 두고 새겨두고 있었다고 전해 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그런 마음이라면 오늘 하루를 좀 더 알차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81223일 방송>

 

2. 대림절 넷째 주일의 사도서간문 롬 16:25-27을 본문으로 이어갈 바울이 전한 복음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80년대 말이었을 겁니다. 한 여자대학 기독교학과 교수가 <바울에게서 예수에게로>라는 책을 썼습니다, 기독교의 원형이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니라 예수의 복음이어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민중 신학의 입장에서 쓴 책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이었습니다(25).

성경을 오해하거나 곡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나무는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경의 한 두 구절에 집착한 나머지 성경의 전체적인 의미를 소홀히 한 것입니다. 한때 남미에서는 해방 신학이 선풍적인 바람을 일으켰고, 이에 뒤질세라 우리나라에서는 민중 신학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런 신학들은 나름대로 매우 의미 있는 주제를 던져주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 대한 당시 교회들의 무관심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이 마구간에 오신 것을 강조한 나머지 이 세상의 모든 빈자와 병자는 바로 예수님이시다 는 말로 발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예수님은 온 세상의 그리스도 곧 구주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빈부귀천 남녀노소 모든 인류가 다 듣고 깨닫고 회개할 말씀입니다.

 

바울의 복음은 성경의 전체적인 말씀의 초점이었습니다(26, 10:9).

우리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 10가지는, 4:13, 1:9, 41:10, 29:11, 14:6, 1:1, 40:31, 3:16, 23:1, 11:28-30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미국 교회 크리스천들이 좋아하는 성경구절 5가지는,

1:9, 3:16, 4:13, 23:4, 8:28이었습니다.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1:1이나 요 3:16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기복신앙을 염두에 둘만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기독교서점에서 파는 액자들 중에 가장 잘 팔리는 것은 요삼 1:2, 1:9 등이라고 합니다. 성경말씀은 신앙생활에 유익한 말씀들이지만, 성경의 초점을 빗나가 인간들이 좋아하는 구절에 제한된다고 하면, 성경의 중심점이 흐려지거나 왜곡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의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른 가르침이라 하겠습니다.

 

바울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27, 고전 10:31).

대부분의 이단자들은 다른 복음 곧 자신을 구세주라거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특징을(고후 11:4, 1:6-9)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복음은 시종일관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구세주)이심과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데 일생을 바친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고전 10:31). 이로써 바울은 세상을 향하여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게 한(3:12-14) 인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Soli Deo Gloria 라는 말은 종교개혁자들이 자주 사용했던 용어이지만, 사실은 바울 사도의 서신에서 왔습니다(고전 10:31).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명령하신 말씀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왜 사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삶의 의미이고 목적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바울의 복음을 세상 끝날 까지 전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249.

시편 시 35:23-25.

찬송 9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위선적이라는 말, 선하지 않으면서 선한 척 꾸민다는 그 표현 자체는 늘 부정적인데요. 하지만 억지로 또는 정 반대의 마음을 품고 선한 척 하는 것 하고, 좀 더 착해지려고 노력하고 연습하는 것은 아주 다르겠지요. 겉으로는 차이가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그 마음의 뿌리는 전혀 다를 겁니다. 비록 겨울 한 계절 동안이라도 좀 더 나누려고 노력하고, 더 따뜻한 마음을 품고자 노력하는 것도 모두 좀 더 선하고 싶다는 바람의 표현일 텐데요. 그렇게 의식적으로라도 노력을 계속해 나가다 보면, 언젠가 좀 더 마음에 드는 내 자신으로 변해 있기도 하겠지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1217일 방송>

 

2. 대림절 셋째 주일의 복음서 요 1:6-8, 19-28의 말씀을 가지고, “나는 누구일까?” 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당시 지도층인 대제사장, 레위 지파 장로들, 바리새파 사람들에게서 질문을 받았는데, “너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는 것이었습니다. 철학적인 질문이면서 동시에 신앙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일까요?

 

요단강변에서는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매우 낯선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6-8).

엊그제 대학 동창 모임에서 25년만에 나타난, 친구가 필립핀과 미국에서 활동했다는 자기 소개를 하였는데, 모두가 놀랐습니다. 우리 교포들을 대표해서 많은 큰 일들을 해왔다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바탕에는 국내에서 가나안 농군학교와 홀트 아동복지회에서 쌓은 스펙이 작용했던 것 같았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기를 소개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요단강변에 나타난 요한이라는 사람은 그의 부모 등 알려고만 하면 알만한 인물이었는데, 그에 대한 요한복음서 기자의 말은 매우 낯설기만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것이나, 하나님의 빛을 증언하러 왔다거나, 사람들이 자기 증언을 듣고 믿게 하려고 한다는 것 등이 수상쩍기만 합니다. 그런데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은 빛이 아니라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 빛이라고 하는 등 아리송한 말이었습니다. 흔히 우리는 이런 사람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곤 합니다.

 

궁금증을 참지못하는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끈질기게 그의 정체를 캐물었습니다(19-25).

우리는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질문하기를 멈춰버렸습니다. 매우 슬픈 일입니다. 질문받기를 좋아하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때문입니다. 학교에서도 학생은 배운 범위에서만 질문해야 합니다. 제게 칼빈의 예정론을 자세히 설명해달라는 질문이나, 웨슬리의 성결의 복음을 이해시켜달라고 질문을 받는다면, 저는 장로교 신학자나 감리교 신학자에게 떠다넘길 것입니다. 제 분야가 아니라고 말하면 넘겨주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질문을 품고 사는 것은 매우 귀하고 값진 일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던져진 질문들은 당신이 그리스도요?” 라는 것부터 엘리야요?”, 그런 다음에 그러면 당신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심각한 질문에서 가장 평범한 질문으로 퇴보한 것입니다. 심각하다함은 종교재판에까지 올라갈 문제라는 것이며, 평범하다함은 누구나 자신이 누구일까를 반드시 물어야 하는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은 물세례를 베푸는 사람에 불과하다 대답합니다(26-28).

세례자 요한이 살던 시대에는 요단 강변은 물론 사해 지역의 척박한 곳에 사는 쿰란 공동체와 에세네 파는 세례를 입회(入會)의식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공동식사, 세례식, 리더쉽의 구조, 회원권 취득 그리고 재산 공유, 이 다섯 항목을 공유(共有)했는데, 세례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나 엘리야 그리고 그에 준하는 예언자로 생각했던 질문자들은 헛웃음이 나왔을 것입니다. 변방을 떠도는 일개 수도사를 과대평가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전(反轉)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자 요한을 비롯해서 누구든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나는 물세례를 베푸는 자일 뿐, 내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끈을 풀기에도 벅찬사람이라 대답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자신을 빵을 굽는 사람이라거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라고, 자신의 소명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해하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242.

시편 시 35:1-3.

찬송 23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흔히 비타민제를 꾸준히 복용하면, 건강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미국의 의학자 마이클 로이진 박사는 비타민제가 실제로 도움이 되지만, 평균 0.4년 정도 더 젊어지는 정도 효과가 있는 반면, 매일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면 자신의 생체 나이보다 8년은 더 젊어질 수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오늘부터 바로 실천해 보시는 것 어떨까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8128일 방송>

 

2. 대림절 둘째 주일의 구약 사 40:1-11을 본문으로 평화로운 세상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성경은 평화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구약에서 자주 나오는 샬롬은 몸과 혼과 영의 완전한 조화를(15:15), 신약에서 자주 쓰이는 에이레네 역시 내적이며 외적인 조화를(5:34) 의미합니다.

 

참된 평화는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오실 때 시작된다 말씀하십니다(1-4).

문명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전쟁의 야만스러움과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과학 문명이 배고픔과 질병에서 자유를 줄 수 있다고 확신하는 시절에 전쟁의 광기에 빠진, 인간의 어리석음을 여지없이 들추고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70년 전의 전쟁 한복판으로 바보처럼 군비경쟁으로 키 재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반도에서만 있을 수 있는 야만은 아니었습니다. 평화를 이룰 수 있다 자신했던 낭만적인 생각은 하루아침에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힘자랑을 멈추게 한 것은 야훼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고, 절벽을 평지로, 비탈길을 넓혀 평평한 대로大路를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고 사랑스럽게 만들어 주신 분입니다. 평화는 인간중심으로 이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세상을 꿈꿀때 가능합니다.

 

지금은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시간입니다(5-8).

예언자 이사야가 받은 신탁은 외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첫째는 인생은 한낱 풀포기 같고, 그 영화는 들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자주 잊어버리는 것이 있는데, 인간은 풀포기에 불과하며, 그 영화는 들꽃 같다는 진리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둘째로 외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풀포기나 거기에 맺힌 꽃과 대조된다는 뜻입니다. 피었다가 속절없이 사라지는 그런 허망한 노력도 그리고 업적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진나라 31대 진시황제(주전 259-210)를 능가할 인물이 없겠지만, 그는 어리석은 인간의 대표인 전쟁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평화의 세상을 만드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아울러 함께 살아갈 대로/大路 ,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 주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기쁜 소식을 나누는 일입니다(9-11).

우리는 매일 매일 전쟁과 다툼의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이, 지도자와 백성이, 그리고 큰 나라와 작은 나라들이 도토리 키 재기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절대 빈곤의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 KOPIA 바람이 불고 있다 합니다. 그동안 배고픔과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남아도는 곡식 몇 자루를 던져주던 서양 강대국과는 달리, 그들에게 벼품종을 개량해 주고 씨감자를 생산할 능력을 키워주는 상생의 인도주의 정신을 우리나라 농진청이 실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함께 잘 사는 그런 노력을 기우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 한국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의 노력이 출발점이 되었다고 합니다. 부족 간의 다툼을 멈추게 하고, 고질적인 빈곤 문제를 풀어가려는 노력이 진정성을 인정받은 것입니다. 동남아시아의 돼지 농가 육성사업도 큰 결실을 맺고 있다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구체적 실천 모델이 된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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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235.

시편 시 34:1-3.

찬송 7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머플러나 장갑은 착용하고 있는 동안은, 그 따뜻함을 크게 실감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엔가 잠깐 풀거나 벗어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와락 한기가 느껴지니까요. 바로 그 순간 그 소품들이 해 내는 큰 역할을 아주 쉽게 느껴 볼 수 있습니다. 기온이 점점 떨어지고 앞으로 계속 그런 겨울 추위가 오게 될 텐데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도 각자 누군가에겐 추운 날의 꼭 필요한 그런 온기일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들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계절을 맞이했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122일 방송>

 

2. 대림절 첫 주일의 사도서간 고전 1:1-9을 본문으로 최후의 날까지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주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일 뿐,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한편 생각하면 슬픈 일이고, 달리 생각하면 가장 인간다운 일입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것은 한 인간의 일생을 대변하는 때문입니다. 잘 살고 잘 죽을 이유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선민입니다(1-3).

국민에게 선택되어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된 이들은 그것을 최상의 영예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이라고 하면 그보다 몇 천 몇 십만 배의 영광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자부심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항상 견지해야 할 자랑일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믿게 된 것은 자신의 지혜나 의지 그리고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사실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2:8).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 진리를 확실하게 간직하고 살아가기를 바랬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핵심 가치인 하나님의 은혜나 구원 그리고 믿음은 모두 선물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응답할 삶이란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살전 5:16-18)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4-6a).

은총이라는 성경 언어는 다함없는 사랑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순경/順境에서든 역경/逆境에서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은 변함없이 부어지고 있음을 믿습니다. 이 믿음은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기 때문에 든든하고 자랑스럽습니다. 문제는 이 믿음이 성경적인 것이어야 하는데,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적 믿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첫째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합니다(1:1, 1:1). 둘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라는 믿음입니다(16:31). 셋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믿음으로 하는 일입니다(11:6). 넷째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는 일입니다(딤전 6:12).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일이란 자기 확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말씀대로 성취될 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까지 주께서 인도하실 것입니다(6b-9).

우리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런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두려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았던 메리 스티븐슨(1922-1999)<모래위의 발자국>란 시로, 불확실성의 두려움을 떨쳐버리게 합니다. 몇 구절을 인용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언제나 저와 함께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니 어려운 시기에는 한 사람의 발자국밖에 없습니다/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던 시간에 주님께서 왜 저와 함께 하지 않으셨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버리지 않는단다/ 네 시련의 시기에 한 사람의 발자국만 보이는 것은 바로 내가 너를 업고 갔기 때문이란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자랑스럽게 서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실 분은 우리 주님이십니다(25:31-46).

 

3. 오늘은 주성농인교회(담임 우슬초목사)에서 설교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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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228.

시편 시 33:1-3.

찬송 50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1월도 하순, 해지고 날 점점 어두워질 때, 비탈에 선 나무들은 스산하다. 이제 거둘 건 겨자씨만큼도 없고 오직 견딜 일 만 남았는데, 사방팔방 수묵화 아닌 것 없는 건 이 때다.” 도종환 시인의 <11월의 나무>에서 읽어드렸습니다. 오직 견디는 일만 남았을 뿐인데, 11월의 자태는 수묵화처럼 아름답다고 했는데요. 흔들리기 때문이 아니라, 잘 견디기 때문에, 그 견뎌내는 자세 때문에 11월의 나무는 그대로 수묵화가 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해 보게 됩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1124일 방송>

 

2. 오늘은 교회력으로 마태의 해의 마지막 주일, 왕이신 그리스도의 날 주일입니다. 25:31-46을 본문으로 재림주가 찾으시는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얼마 전에 대학 동창 한 분이 자신의 삶을 정리한 책을 한 권 낸다 해서 한국에 나왔습니다. 어떤 삶을 살았을까 예상은 하면서도 궁금했는데, 여러 해 모아둔 글을 묶은 책이었습니다.

 

최후의 심판은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일이라 말씀하십니다(31-36, 41-43).

양으로 구별된 사람은 천국을 차지할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이 목마를 때 마실 것을,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나그네 되었을 때 따뜻하게 맞아주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병들었을 때 돌봐주고, 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었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염소로 구별된 사람에 대해서는 악마와 그 졸개들을 위해 준비한 영원히 불타는 지옥으로 들어가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앞서 양에게 말씀하신 것과는 정반대로 산 것에 대해서 혹평하십니다. 자칫 도덕적인 잣대로 심판의 기준을 삼은 듯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평화와 불화의 세상을 대변할 뿐, 하나님의 통치에 주목하라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천국의 핵심가치는 평화라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평화로운 삶을 배우고 실천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전 삶을 평화에 집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는 신앙생활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35-39, 44).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현존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이해입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에서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양과 염소로 구별하는 원칙으로, 목마르고 굶주리고 나그네 되고 헐벗으며 병들고 옥에 갇힌 당사자가 주님이라고 말씀하시며, 이 주님께 마실 물과 음식과 평안한 쉼과 따뜻한 옷 등을 제공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주님이 어디에 계신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찾기가 힘들면 생각을 깊이 해 봐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주님의 현존은 누구인가하고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 곁에 있는 연약한 이웃들입니다. 아브라함이 고단한 길손을 정성껏 접대했던 일화에서 깨우침을 얻은 이들이 베네딕투스(분도) 수도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 가득 찬 힘든 이웃들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동안 무엇을 하며 살아오셨습니까?

 

재림주로 오실 주님께서 찾고 계시는 사람들을 만나봅시다(40, 45-46, 12:28-31).

주님께서 찾고 계시는 사람들은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마땅히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들 삶의 현주소를 확인해 봐야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가? 라는 삶의 현장을 살피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다운 삶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씀을 외우는 것으로 충분하듯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란,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일이며, 이웃 사랑이란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팔을 안으로 굽히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팔을 밖으로 내밀며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을 사는 일입니다. 재림주께서는 반드시 이 두 가지를 확인하실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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