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요일 아침 대구 지하철 참사는 삶을 비관한 사람과 현대 문명의 허점이 잘 조합된 엄청난 슬픔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전혀 다른 모습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중풍병자의 아름다운 이웃들입니다. 그리고 강한 이웃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곁에 계셨습니다.

도전을 극복할 때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을 찾았던 중풍병자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기에 그분 앞에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은혜 받겠다는데 누가 양보 하겠습니까? 다른 것과는 달리 은혜는 뒤로 미룰 성격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는 자신을 예수님 앞으로 데려다 줄 장정들에게 지붕을 뜯게 하였고, 들것의 네 귀퉁이에 줄을 매달아 예수님 앞으로 내리게 하였습니다. 누구에게나 어려운 문제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 앞에서 멈춰서서는 안됩니다. 문제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들은 지혜를 구했고, 그 지혜를 따라서 행동하였습니다. 도전을 극복하는 불굴의 정신과 행동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볼 때, 자랑스럽고 아름답게 바라봅니다. 어쩌면 문제 앞에서 불평이나 하고 주저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중풍병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만난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도전하는 사람들, 그들은 반드시 아름다운 삶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노아가 이런 도전정신을 실천하였고, 모세와 여호수아가 그랬습니다. 그래서 모두 멋진 삶을 만들어 갔습니다.

합심할 때 아름답습니다.

두 사람만 모여도 의견이 달라서 요란합니다. 겨우 둘 뿐인 부부관계도 삐거덕거리는 것이 인생살이인데, 네 사람이 합심했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네 사람은 들 것을 운반할 때부터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였습니다. 보조를 같이 하기 위해서 서로 맞춰야 할 것이 많았습니다. 걸음의 폭이나 숨쉬기도 맞춰야 했고, 들 것을 잡는 힘도 적절해야 했습니다. 거기다 이번에는 지붕을 뜯는 문제까지 덧붙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분명히 이런저런 의견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붕까지 뜯어야 하느냐는 반대의견도 있었을 것이고, 그 높은 지붕에서 줄에 달아내리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염려도 제기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목표를 위해서라면 한 마음 한 뜻이 되기로 했습니다.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힘을 모을 것은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고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사분란하게 역할분담을 실천하였습니다. 기왓장을 끌어내리는 일에서부터 긴 줄을 구해오는 일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붕에서 예수님 앞으로 정확하게 달아내리게 되었습니다. 합심 협력한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이런 합심 협력하는 자세가 절실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두 세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을 보면서 거기에 제 정신을 가진 한 두 사람이 없었다는 회환을 갖게 합니다. 삶을 비관한 사람이 있었고, 전동차의 운전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역무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한 직업의식도 없었고, 생명의 위험을 바라보는 윤리의식도 없었습니다. 그들 중에 한 두 사람만이라도 제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면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사는 거대한 지구에, 제대로 된 한 두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우쳐 줍니다. 모든 사람이 다 깨어있을 수 없습니다. 차에도 누군가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가정에도 누군가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국가나 교회에도 누군가는 깨어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바로 그 사람이 저와 여러분이기를 바랍니다. 이런 두 세 사람만이 있다면, 그런대로 세상은 돌아갈 수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문제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을 때입니다. 이 세상에는 '갤러리'들이 너무 많습니다. 직함은 요란하지만 구경꾼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능동적인 참여자로서 이런 두 세 사람에 우리들 이름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인생과 추한 인생이 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잘 어울려서 값진 삶을 엮어가는 사람들, 그들은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중풍병자를 메고 왔던 그 네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위대하고 아름다운 삶을 실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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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월 23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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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교회 35돌 생일입니다. 청장년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개인적, 교회적, 그리고 국가적으로 어떤 방향을 향해서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목표를 더욱 분명하게 하며, 삶의 내용을 확실하게 해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인생은 상 받기 위해 달음질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달리기를 위해 준비된 운동장과도 같습니다. 매일 매일의 삶이 달리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학교가는 학생들도, 일터로 가는 어른들도 
달리기를 합니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힘쓰는 것들이 바로 달리기 입니다. 
그 목적은 매우 단순합니다. 남들보다 더 나은 상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더 나은 상을 얻어볼까하고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추운 겨울에 찬 바닷물에 들어가 해삼과 멍게를 잡는 해녀들을 보았습니다. 그런가하면 행여 신혼여행 중인 손님이 올까 해서 유채밭을 지키고 있는 할아버지도 보았습니다. 옥돔을 몇마리 잡아보겠다고 서둘러 배를 타고 나가는 어부도 보았습니다. 모두가 달음질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그들이 희망하는 상을 받겠다고 피곤한 몸을 끌고 달리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른들만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까지도 예외없이 상을 바라면서 달음질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슬픈 일이 아니라, 아름답고 멋진 모습입니다. 비록 땀을 흘려야 하고, 숨을 몰아쉬어야 하지만, 달음질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은총입니다. 거기다 상까지 기대하고 있으니 더욱 멋진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달음질하는 인생을 자랑스럽게 생각합시다.

승리하는 인생은 남다른 비결을 갖고 있습니다.

운동경기에서 이기지 못하고 들러리만 선다면 실패한 사람입니다. 기왕 달음질할 인생이라면 승리해야 합니다. 사도는 두가지 비결을 제안합니다. 첫째는 절제하는 일이고, 둘째는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입니다. 승리하는 인생을 살려면 자신을 다스리는 절제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누가 자기를 다스릴 수 있습니까? 자기 훈련을 철저히 해야 하겠습니다만,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승리하는 인생은 분명한 목표를 향해서 달립니다.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있습니다만, 거들떠 보지도 않고 한결같이 목표만을 생각합니다. 그 사람에게는 다른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듯이 말입니다. 남들이 무엇이라고 해도 상관치 않고 오직 목표만을 향해 달립니다. 이런 사람과 겨뤄 이길 상대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바라보고 달리는 사람을 누가 멈추게 하겠습니까? 한 젊은이가 출세해서 금의환향 했습니다. 그를 맞는 마을 어른들은 이구동성으로 그 젊은이의 성공은 오래 전에 정해져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자기를 다스리는 사람, 거기에 오직 한 목표만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성공 외에 다른 길이란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절제와 바른 삶의 방향성입니다.

예수만 바라보고 걸어가고 있습니까?

<사랑만 갖고 사랑이 되니?>라는 광고문이 있는 모양입니다. 성격도 아름다움도 사랑의 수식어일 뿐, 돈이면 다 된다는 세태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예수님만 바라보자!> 시대를 역행하는 흰소리라고 생각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가 밥먹여 주느냐? 시던 백부님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은 삶의 방향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도 해야 하고, 잠도 자야할 것입니다. 남들이 하는 산책도 하고 등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디를 향해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성이 정해져 있지 않다고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고 헛된 삶입니까? 사도는 자신의 삶을 향방없는 달리기가 아니고, 허공을 치듯한 주먹질이 아니라고 분명히 했습니다. 뚜렷한 목표를 바라보면서 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와 또한 무엇과 싸우는지를 
분명히 알고서 산다고 고백합니다. 어디를 향해서 달리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달리십니까? 아니면 그냥 달리십니까? 목표를 정하고 달리십시오. 
저는 인생을 열심히 살고서도 실패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은 방향성의 중요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충고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말입니다.

모든 이에게 주어진 삶은 대동소이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목표를 정하고 자기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남다르게 살아갑니다. 예수님만을 향해서 삶의 방향성을 정했다면, 가장 지혜롭고 위대한 삶을 시작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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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월 16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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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욥기 7:1-7

최선의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는데도 불구하고 실패가 거듭 되풀이될 때,  
낙심하게 되고 급기야 절망감에 빠지는 경험을 해 보셨습니까? 믿을만한 사람이 등을 돌릴 때, 절망은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욥이 그랬고, 예수님도 그런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 때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욥은 갑자기 밀어닥친 시련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동방의 의인이라고 불려지는 욥은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가족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였으며 재물도 넉넉하였습니다. 아래에는 충성하는 종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뜻 모를 시련이 몰아닥쳤습니다. 도둑 떼들이 몰려와서 소와 나귀를 빼앗아 가는가 하면, 난데없이 하늘에서 불이 내려 양떼와 종들을 살라버렸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태풍이 불어 자녀들이 한 시에 매몰되었습니다. 10명의 자녀가 죽고, 칠천의 양들과 삼천의 약대들, 오백겨리의 소와 암나귀들이 불과 며칠 사이에 다 없어지고 만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욥 자신은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욕창이 나서 고통을 겪어야 했고, 이해심 많고 사랑스럽던 아내마저 독한 여인처럼 마음을 쇠갈고리로 긁어댈 뿐 아니라,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폭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문자 그대로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욥처럼 시련을 겪은 사람이 없습니다. 동방에서 소문난 의인이라는 사람이, 가장 모범적인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람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시련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까닭모를 시련도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이런 시련 앞에서도 하나님께 찬양할 뿐, 죄를 범치 아니하고 원망치도 않았다는 것입니다(1:20-22). 

시련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가 중요합니다.

시련을 대하는 여러 사람들을 성경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욥의 아내를 봅시다. 
하루아침에 10명의 자녀를 땅에 묻고, 그 많던 재산을 다 잃어버렸으며, 남편마저 중병에 시달리게 되었을 때,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어디에 있었는지 모를 온갖 분노와 저주가 그 마음속에서 활화산처럼 끓어오르고 있었습니다. 둘도 없는 우정을 나누던 욥의 친구들도 소개합니다. 그들은 모든 시련에는 원인이 있다고 가정하고는, 욥에게서 죄를 고백하라고 논쟁을 벌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시련과 고통에서 진단하는 방식입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죄를 밝혀내려는데 열을 올리는 것이 악한 인간의 마음입니다. 이 세상에는 시련과 고통은 있습니다. 그 원인은  다양합니다. 잘못 때문에 오는 시련이 있고, 실수와 범죄로 시련과 고통이 뒤따르게 됩니다. 억울한 고통도 있을 수 있고, 의를 위해서 자원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저런 시련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 입니다. 욥은  바로 그 점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고통과 시련을 '일반화'시켰습니다. 시련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1-6절).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7절).

절망의 순간에는 하나님을 의지할 때입니다.

절망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십니까? 무슨 뜻인지 알고 사용하십니까? 자기 자신의 힘과 지혜로는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망을 종종 경험합니다. 우리 자신이 할 아무 일도 없는 캄캄한 순간입니다. 바로 이런 순간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은총의 단계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망을 어떻게 극복합니까? 지난 주간 저는 88세 되시는 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1시간 가깝게 당신의 인생역정을 들려주었습니다. 신문과 방송에도 이름이 오르내리는 화려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외아들의 잘못으로 재산을 다 잃고 매일 밤을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생각과는 달리 미움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할머니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권면했습니다. 하나님만이 그녀에게 평화를 주시고 기쁨과 용서를 주신다고 말입니다. 저는 신앙이 좋다고 말하는 이들이, 시련 앞에서 형편없이 절망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 함은, 다른 아무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붙잡는 것임을 배워야 합니다. 건강하고 넉넉할 때만이 아니라, 어떤 처지에서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절망은 특별한 사건이 아닙니다. 종종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절망 앞에서 좋은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무력하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더욱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붙잡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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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월 9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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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서를 이적의 복음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이 잘 증거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에 
권세가 있었고, 누구도 할 수 없는 귀신과 자연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 예수님을 통해서 오늘의 귀신들을 내쫓는 승리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귀신은 언제 어디서나 활동하고 있습니다.

현대 과학문명 시대에 귀신 얘기를 하는 사람을 바보라고 할 것입니다만,
성경은 귀신의 활동을 주장할 뿐 아니라, 여전히 위험한 적그리스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성경 안에는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많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흔히 미친 사람을 의미하는데,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심각한 고통을 안겨다 주는 사람입니다. 최근에는 이런 현상을 하나의 질환으로 보고 치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고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이런 미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여러가지 사회적인 요인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충격적인 일들, 억울한 일들, 감당할 수 없는 아픔들로부터 이런 질환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옷을 벗어던지고,
소리를 지르고 울고불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귀신들렸다는 것은
좀 더 다른 차원의 현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밖으로부터 오는 인격적인 영향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정신은 두가지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하나는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악령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화보다는 악령의 영향이 매력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엄숙해야 할 회당에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떠들 수 있었습니다.

귀신은 성도들 안에도 찾아올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처참하게 죽인 아들이 있었는가 하면, 자신이 낳은 아이를 추운 겨울에 비닐 봉투에 넣어 던진 비정한 어미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단순히 정신질환입니까? 아닙니다.
인격적인 힘, 악령에 붙들리지 않고서야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만행입니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어떤 특정인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령 성경에도 보면 왕 사울이 귀신에 붙잡혀 있었고, 사도 베드로까지 귀신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가룟인 유다 역시 그러했습니다.
귀신의 역할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질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어지럽히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가장 파괴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 중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충동하고 졸개로 끌어들이는 것 같습니다. 마귀의 종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귀신의 졸개노릇을 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한다고 한 말이었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활동을  가로막는 사탄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귀신은 활동하고 있습니다.
신앙심 깊은 사람들에게 더욱 접근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그 유혹에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야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정신적인 질환으로 인해서 제정신을 갖지 못한 것도 문제입니다만,
악령에 사로잡혀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오래 전에 사회주의에 맹신하는 한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피의 혁명을
서슴지 않고 제의했습니다. 불평등한 자본주의를 깨부수기 위해서는 
혁명도 필요하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이념에 사로잡히는 것도 무섭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물며 귀신에게 붙들린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의 마음에 채워져 있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악령이 아니라, 성령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이를 이간질하고, 분쟁을 일으키고, 평화를 깨트리는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귀신을 내쫓는 일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제 모습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만 흠집을 찾으려는 이런 귀신들이
있는 한, 그곳에 하나님의 평화나 소망이 없습니다. 귀신을 내쫓고 거기에 
성령이 좌정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은 사랑과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 그리고 절제를
가르칩니다. 성령은 우리를 이해하고 용서하도록 지도하십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그의 졸개들에게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게 하십니다.
귀신이 우리를 점령하는 한 평화가 없습니다.


귀신은 단순한 육체나 정신적 질환인 미친 현상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나라를 파괴하는 적극적인 세력입니다. 
이런 악령의 종이 되지 않도록 삼가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안에서 귀신을 내쫓고 평화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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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월 2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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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도 우리 교회 신앙표어는 <예수님만 바라보자>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단순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신앙생활에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우리들을 향해서 단순하게 살기를 강력히 추천하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살 이유는 종말의 시대를 살기 때문입니다.

한 때 <무소유>라는 책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불교적인 관점이지만 
배울 점을 시사하였습니다. 소유에 집착하다가 정작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은 개인적인 종말을 인식해야 합니다. 무한정 허락된 삶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조차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삶을 단순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큰 목표를 세우고, 다른 것들은 그 목표를 위한 작은 단계들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저것 기웃거리면서 시간을 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기회는 딱 한 번뿐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사도는 단순화를 강조하였습니다. 지나치다싶을 만큼 단순하게 삶을 정리하도록 말씀하십니다. 아내가 있어도 없는 사람처럼 살고, 우는 일과 기쁜 일까지도 거기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고 파는 일이나 가진 소유를 살펴보는 일까지도 무시해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제한된 시간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해야 할 일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개인적인 종말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매일 매 순간이 마지막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살아야 합니다.

단순한 삶은 구심점이 분명한 삶을 말합니다.

어느 변호사댁에 초대받았습니다. 안내된 거실에는 대형 TV 한 대와 식구들이 함께 앉을 긴 소파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또 다른 학생 댁에 초대받았습니다. 몇 권의 책과 테이블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어느 일본 대학교수 댁에서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거실에 꽉 들어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구심점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게 하는 대조적인 장면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구심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오직 예수>라는 구심점을 갖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32-35절). 얼마 전에 오랫동안 투병중인 교우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어두운 방안에서 외로운 생활로 자연히 우울증세가 있었습니다. 
가족들에 대해서 원망하는 마음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제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주님만 바라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벌써부터 그렇게 살았어야 했습니다.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도 기회는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랑도 식는 날이 오고, 물질도 사라지는 날이 오며, 친구도 떠나가는 날이 옵니다. 그러나 주님만은 어제도 오늘도 영원토록 항상 그 자리에 계십니다. 헛된 것들에 더 이상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온전히 주목해야 할 구심점에는 예수님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바라봅시다. 단순하게 사는 것을 실천해 갑시다.결심과 실천은 별개의 것들 입니다. 좋은 생각을 품게 되었다고 해서 좋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또 다른 일입니다. 
단순하게 사는 생활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한낱 꿈에 불과합니다. 가까운 것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먹는 것을 단순하게 합시다. 한꺼번에 많은 식단보다는 몇 가지를 여러 차례 골고루 준비하면 낭비도 줄이고 건강에도 도움을 줄 것입니다. 활동도 단순하게 합시다. 계획을 세우고,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을 나눠서, 먼저 할 일과 나중할 일을 차례로 차근차근 풀어가는 것입니다.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려고 하니까,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학에 입학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동아리활동에 매력을 느낀 나머지 5개나 들었습니다. 3년이 지나도록 정신없이 뛰어다닌 후에야 정작 힘써야 했던 공부는 뒷전에 밀려나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많다고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우물을 파도 시간이 모자랄 수 있는 게 인생입니다. 신앙은 이런 단순한 삶을 지도하는데 크게 도움을 줍니다. 매일 첫 시간에 생활의 우선순위를 검토할 수 있고 자문을 구할 수 있습니다. 주님, 오늘 제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저를 가르쳐 주옵소서.


우리의 삶은 한계가 있습니다. 시간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종말론적인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단순하게 살기, 구심점을 갖기, 그리고 이런 생각을 실천하기는, 지금 우리들이 적극적으로 힘쓸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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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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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시작하면서 많은 생각을 가지게 되는데, 그 중의 하나가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주제입니다. 성경은 사무엘을 그 모델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이웃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께 대해서 항상 깨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깨어있는 사람입니까

사무엘은 하나님께 대해서 깨어 있었습니다.

기도의 열매로 낳은 아들을 한나는 서원대로(삼상1:11) 젖떼기가 무섭게 하나님의 사람 나실인으로 바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사장 엘리의 밑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는 여호와의 궤(법궤)가 있는 지성소에서 잠을 잤다고 했습니다. 성전의 등불을 끄지않기 위해서였는지 그 이유는 분명치 않습니다만, 그는 성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것은 분명합니다. 할 일이 많았습니다. 매일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묵상함으로,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자 힘썼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적어도 사무엘은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끝도 없는 하나님 사랑의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배우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을 배워가면 갈수록 하나님만이 아니라, 세상과 사람들이 더욱 잘 알 수있고 볼 수도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는 인생들인데도, 어리석고 품위없이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으며, 복된 삶을 내팽개치고 헛된 일에 분주하게 살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자신에 대해서 깨어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쏘크라테스는 자신을 알라는 충고를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귀하고 천한지를 구별하지 못하며, 삶의 우선순위조차도 알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때문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모든 문제가 있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을 배우는 동안에 자신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을 때, 한 밤중의 꿈속에서였지만, 벌떡 일어났고 자신의 스승 엘리 제사장에게 나아가 하명을 기다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무엘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깨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같은 세상에서 찾아보기 드문 젊은이었습니다. 세 번씩이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시고 계심을 느끼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병들고 나약한 제사장 엘리에게 엎드렸던 것입니다. 무능하고 무력하다고 부모나 스승을 하대하는 세상에서 사무엘은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킴으로 본을 보였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만이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누구나 시련과 역경이 있습니다. 예외란 없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그곳에 깨어있는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사람이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역사를 돌보도록 하셨습니다. 노아와 아브라함, 모세와 다윗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사장 엘리는 나이도 문제였습니다만, 영적으로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나의 기도를 오해했고(1:14), 자녀를 바로 가르치지 못했고(13절), 사무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금방 분별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사무엘은 깨어있었기에 이스라엘은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들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교회에서도 깨어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좀 더 멀리 바라보고 좀더 깊이 세상과 역사를 생각합니다.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의 미래를 내다보게 됩니다. 눈앞의 문제나 사건에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좀더 크고 넓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100년도 더 된 큰 나무를 잘랐습니다. 다섯 개의 나이테가 붙어 있었습니다. 고난의 세월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가 더 깊고 넓게 뿌리가 내려서 큰 나무가 되는 바탕을 준비했던 때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 깨어있을 때, 세상도 희망을 가집니다.


주님은 깨어있는 삶을 기도라고 했습니다(마26:41). 시편 기자는 말씀을 사모할 것을 권고합니다(시119:131). 이웃의 요구에 민감할 것도 충고합니다(눅10:36-7). 우리들 모두가 깨어있는 근사한 사람을 소망하며 힘쓰는 한 해를 만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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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월 19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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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저마다 자랑스러운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새해 벽두에는 더욱 그런 생각을 간절히 하곤 합니다. 
성경은 세례자 요한을 그 모델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보기 드물게 자랑스러운 일생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본받을 자랑스러운 삶이 어떤 것인지 찾아보십시다. 

삶의 목표를 분명히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무엇을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목표도 방향도 없이 달리기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불안할 것입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더욱 불안해질 것입니다. 
목표가 분명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그런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해야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잠을 잤고, 약대 털옷을 입고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 
그가 가진 유일한 의상이었습니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가난에 길들여진 생활을 엿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렇듯 광야에 거주하면서 보통 유목민처럼 살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확실히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2-3절의 이사야 예언을 실천에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뒤에 오실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것인데, 
그래서 소리꾼으로 외쳐야 했고,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와 세례를 주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의 예언이 자신의 삶의 목표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한 평생 그 길만을 고집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어떤 목표가 있습니까? 무엇을 위해서 살고 무엇을 위해서 죽을 것인가 하는 목표가 있기는 한 것입니까? 우리 시대는 이런 사생관(死生觀)의 부재현상이 뚜렷합니다.

초심을 잃지않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였습니다.
산뜻한 출발이 끝까지 유지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초심을 잃어버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처음과 끝이 분명했고, 그렇게 관리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인기는 대단하였습니다. 요단 강변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에게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궁궐에서 온 귀부인들도 있었으며, 학식이 높은 이들과 관리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여전히 그는 자신의 역할, 소리꾼과 길잡이에 충실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분이라고 메시야를 소개하는데  열중하였습니다. 그분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격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그 분의 신발 끈조차도 매거나 풀어드릴 자격이 없다고 높여 드렸습니다. 자신이 주는 세례는 물세례에 불과하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주시는 세례라고 그 차이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보기 드문 모습이 아닙니까? 호시탐탐 신분상승을 위해서라면 권모술수와 배신을 밥 먹듯 하는 세태에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시종일관 초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며, 그 메시야를 소개하는 전령에 불과하다는 점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모든 삶을 주님께 집중하였습니다.
시간은 시작과 끝이 있게 마련입니다. 영겁의 시간이라지만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의 끝에서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 평가의 기준은 <주를 위함>이었는가로 가늠한다는 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해서라고 말씀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을 주님을 증거하는데 집중하였습니다. 어느 교육학자는 집중력보다 더 효과적인 공부가 없다고 했습니다. 삶의 가치 역시 집중력에 좌우된다고 하겠습니다. 그 집중력이 무엇에 혹은 누구에게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님께 집중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주님께 집중하기 보다는 세상에 집중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위험천만한 자세입니다. 서서히 생명을 잃어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기자는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 훈련을 강조했습니다(신 6:4-9). 주일을 성수하는 것이나,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로 출발하는 것은 이런 집중력을 키우는 검증된 훈련들입니다. 돈을 물려준 분과 훈련된 좋은 신앙을 물려준 분 가운데서누가 값진 유산을 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성도는 세상 한복판에 서 있으면서도 주님께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그 때 어디에서 무엇을 하건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금년부터 자랑스럽게 살아봅시다. 우리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자신에게 감탄하는 그런 매일을 만들어 갑시다. 목표를 분명히 정하고, 초심을 계속 지키며, 오직 주님만 집중하는 그런 삶이 우리가 꿈꾸는 자랑스러운 삶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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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월 12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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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미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순한 성품으로 어울려 사는데 익숙한 양의 해입니다. 양에 비유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목자이신 하나님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인생의 목자이시며, 우리를 성공적으로 살게하는 빛이신 하나님을 마음에 모셔들이라고 하십니다.

어둠 가운데 사는 인생들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아테네에 디오게네스라는 철인은 햇볕이 내리쬐는 한낮에 어깨에 횃불을 들고 다니면서 어둡다는 말을 되풀이 하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캄캄한 어둠속에서 헤매고 있음을 풍자한 것입니다. 분명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두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어둡고, 말하는 것이 어둡습니다. 미국은 북한을 향해 악의 축이라고 합니다. 백성이 굶주리고 있는 형편인데, 무기를 개발하는 전쟁광이라는 게 그 근거입니다. 북한은 미국을 향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합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향해 서로 잘못했다고 불평합니다. 바깥세상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어둠속에  이 사실을 눈뜨지 못하는 한 일평생 어둠 속에서 헤매다가 망하고 말 것입니다. 여전히 밝은 빛이 비추고 있지만 어두운 마음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살고있는 것입니다. 바깥세상이 어두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마음 안이 어두운 것입니다. 검은 색 안경을 통해서는 온통 세상이 검게만 보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세상은 불만족스러운 것들로 가득차 있을 뿐입니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두렵게 하는 것은, 세상도 아니고 다른 누구도 아닙니다. 어두운 마음을 가진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참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슬픔과 절망 속에 살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던 남편이 세상을 떠나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슬픔과 절망은 더욱 밀려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비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곁에서 안타깝게 바라보던 친구가 찾아와 함께 갈 데가 있다고 했습니다. 자원봉사활동을 하는 고아원이었습니다. 한 낯선 아이가 자신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엄마! 라고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나보다 더 슬픈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목사님의 설교가 귀에 들어왔습니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 빛이신 주님은 벌써 그 여인 곁에 와 계셨습니다. 그 주님을 되찾은 것입니다. 출애급기 3장은 하나님을 되찾은 모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왕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살인자가 되었고, 도망자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외롭고 쓸쓸한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 비로소 자신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는 위대한 삶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어둠을 깨닫는 것에서 참 빛이신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일이 중요합니다.
  
빛 가운데 사는 것이 잘 사는 삶입니다.
너나없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사는 것이 이상적인 삶인지를 분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가지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빛 가운데 사는 일입니다. 빛이신 주님 안에서 사는 일입니다. 건강여부가 아니고, 재력이나 권력 여부가 아니라, 빛 가운데서 사는 것이 진정한 승리이며 잘 사는 것입니다. 제가 옥수동에 올 때는 38살의 청년이었습니다. 이제 58살의 장년이 되었습니다. 종탑을 오르내리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마음 뿐입니다. 평생 청년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평생 부귀를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됩니다. 그런 것들로 성패를 가름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  오직 하나, 빛 가운데서 사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했습니다(롬 14:8). 옳고 그름을 우리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듯, 잘 살고 못사는 것 또한 우리 몫이 아닙니다. 

그러나 빛 가운데서 살고 있다면, 다시 말해서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복 주실 것입니다. 빛 가운데 사는 자들과 그 자녀들을 형통케 하실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우리의 참된 염려와 걱정은 우리의 말과 행실이 하나님의 빛 가운데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모든 고통과 슬픔은 어둠의 자식들로 살아갈 때입니다. 바깥이 아니라 우리 속사람에게서 일어난 것들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참 빛이신 주님을 모셔들이고,매일 매일 빛 가운데서 살아가는 승리하는 삶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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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월 5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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