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가복음 6장 7-13절

한 때 신학계에서는 [전도]와 [선교]라는 용어를 가지고 논쟁이 치열했습니다. 개인구원에 초점을 둔 [전도]보다,  
온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는 [선교]에 비중을 두는듯한 기류가 압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개인과 사회라는 
대상의 차이일 뿐, 그 중요성은 다를 수 없으며, 순서상 개인 구원 없이 사회구원은 요원하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전도 원칙은 팀 사역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에 파송하는 첫 번째 자료입니다. 예수님은 12제자를 소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씩 짝을 지어 파송하셨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일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일이란 팀 사역임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주님 혼자서 하실 수 있었을 텐데도, 우리 주님 예수님은 팀 사역을 선택하는 선례를 만드신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엄청난 일에, 바로 구원의 대상인 인간들을 일꾼으로 세워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첫 사람, 아브라함과 그의 민족 
이스라엘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선택되었던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위대한 일을, 연약한 우리 인생에게도 거들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여러 까닭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하나님은 우리들 인생과 함께 어울리는 조화내지 협동의 정신을 
본으로 세우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영웅을 기다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서로 화목하며 협력하는 삶을 
배우고 익히기를 바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가장 위대한 구원 사역에 인간들을 참여시키신 것입니다. 
협력하는 전도가 최우선의 원칙입니다.


전도에만 최선을 다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8-9절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자적으로 이해할 때 그런 문제가 생깁니다. <지팡이>만 휴대하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전도 파송에 관한 세 복음서 사이에 차이가 있는데, 이는 각 복음서를 
읽었던 대상들이 달랐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합니다. 마태와 누가복음서는, 전도를 받는 사람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줄 것임으로 따로 준비할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전도자들을 만나게 될 사람들은 그들에게 엄청난 빚을 
지게 마련입니다. 그들이 전해 준 복음으로 인해서 그들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전도자를 
대접해야 옳습니다. 그런데 마가의 경우는 다릅니다. 전도자의 생활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전도 자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가의 공동체는 신앙의 위기를 겪고 있었고, 자연히 
복음 전파의 절박성을 안고 있었습니다. 전도자는 그의 생각과 생활 주변이 단순해야 합니다. 오직 전도일념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마치 물건을 파는 장사꾼이 어떻게 하든 손님의 마음을 사로잡아 물건의 가치에 넋을 잃도록 
만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자세는 다른 모든 생활에서도 배우고 익힐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전도할 땐 전도에만 충성!


복음을 전하고 악령을 내쫓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전도자가 해야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복음이란, 예수님이 구주가 되신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분명 사람들은 구주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죄와 죽음에서 노예처럼 살고 있지만, 슬프게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숨은 살아있는 것 같지만, 마음에 평안이 없고 장래에 소망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기쁜 소식입니다. 사람들을 활력과 희망 속에 살게 만들어 주는 동력입니다. 이런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걸음은 가장 복된 것입니다(사52:7). 이런 복음을 전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악령 곧, 사탄입니다. 
이런 사탄은 가장 교활한 무리들로 이들 역시 사람을 부리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탄이 
될 수 없지만, 사탄의 종노릇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베드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 안에 있는 사탄을 책망하셨습니다(막8:33). 이런 사탄은 항상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소극적이고 부정적
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생각하기 보다는 자신의 처지와 생각을 먼저 고려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계략은 
얼마나 치밀하고 지혜로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사탄을 이길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전도자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팀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를 대상으로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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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8월 3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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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편 143편 1-8절

요즘 한국에서는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사이에서 경쟁심이 치열합니다. 가령 한 어린 아이가 시험에서 99점을 
맞았다고 한다면, 100점을 맞은 여러 명의 아이들이 그를 앞지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한 문제
밖에 틀리지 않았지만, 그 아이는 99점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시 143편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에 조금 부족하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앞서의 기준에 의한다면, 모든 사람들은 천국에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완전한 점수인 100점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시편 143편을 보면, 다윗은 자신을 구원하도록 하나님의 은총을 구합니다. 그는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을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시지만, 다윗 역시 살아있는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비를 구하는 다윗의 호소는 하나님께서 그의 종 다윗을 
심판하지 않으실 것을 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100점을 맞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은 살아있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의롭지 못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에스겔 2장에서 우리는 그의 예언자 에스겔에게 말씀을 들려서, 배반한 백성-이스라엘 민족에게 보내신다는 
구절을 읽었습니다. 이 민족은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언자 에스겔을 통해서 
그들에게 선포됩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 배반한 나라를 위해서 전해집니다.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서 6장에 보면, 하나님께로 보냄을 받은 예언대로 예수님은 그의 고향을 방문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합니다. 그 고향 사람들은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진 이런 권능이 어찜이뇨?"라고 묻고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의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고향에서 어떤 기적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소수의 병자들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
이었고, 그들의 믿음 없음을 이상하게 여기셨습니다. 그 결과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 고향사람들에게 들려졌지만, 그들은 그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마가는 이상하게 여기시더라고 설명을 붙였습니다. 이 말씀들 속에는 예수님께서 참으로 병자를 고치셨고, 
그것은 기적이었다고 하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예수님께서 늘 하시던 것보다 훨씬 
적은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계속 활동하신다고 
기대합니다. 그들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더 이상 해 주실 일이 없었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많은 기적 사건들 중에는, "너희의 믿음으로 잘 될 것이라"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가 가진 믿음에 의해서 행하여진다고 하는 일은 
신기한 일이 아닙니까? 

끝으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가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 안에 머물러 계셨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이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사람은 좌절감 외에 다른 것을 얻지 못합니다. 

불신자는 자기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잃어버립니다. 자신을 
믿는 것과 하나님께서 이루실 수 있다는 믿음을 상실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은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 143편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불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의가 없이는, 불신자는 모두 불의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며, 그래서 구원으로부터도 여전히 떨어져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목사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아무 상관없이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면전에서 불의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그 분의 의로움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의 현존은 여러분이 확실히 하나님의 구원을 꽉 붙잡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십시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의로움을 붙드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얻을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 분의 자비함 속에서 나타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믿을 때 강해집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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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 27일 지쇼우(Rev. Zueshow)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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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레미야 애가 3:22-33

예레미야는 비운의 선지자입니다. 그는 40년 동안 쉬지 않고 자기 민족과 나라를 위기에서 구출하고자 
노력했지만 그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그는 슬픈 노래, "어찌할거나!"(에카)를 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절망까지도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야 합니다.

똑 같은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인품과 가치, 그리고 그의 장래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문제 앞에서 낙심할 수 있고, 자포자기할 수도 있으며, 당당하게 맞설 수도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다는 
전쟁의 참화를 차마 바라볼 수 없게 되었지만, 예레미야는  이런 현실 가운데서도 낙망하지도, 자포자기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히 여전히 남아 있음을 바라보았습니다. 
비록 나라는 망했지만 완전히 망한 게 아니고, 오히려 아침마다 더욱 새로운 희망을 느낄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가 무엇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스위스 철학자 아미엘은, 마음이 변하면 태도가 변하고, 태도가 변하면 습관이, 습관이 변하면 
인격이, 인격이 변하면 인생이 변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마음이 변하면 인생이 변합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워지고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우리들 삶입니다. 고난 그 자체만 생각한다면 
슬프고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그 고난이 주는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인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가난의 뜻을 깨달은 한 젊은이는 부모와 가족을 더욱 사랑하게 됐고, 공부에 더욱 정진해서 
서울대 음악대 성악과에 수석이 되었습니다.


고난은 잠잠히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때입니다.

뜻 모를 고난이나, 의로운 고난이라면 그래도 견딜 만 하지만, 당연히 받아 마땅한 고난 앞에서 무엇인가 
희망을 가진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권하는 경우는 분명 후자입니다. 
잘한 것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혼 줄이 나도록 매를 맞아 마땅한 잘못을 뻔히 저지른 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래도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면서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권합니다. 어려운 일 
앞에서 서두르다가 더 그르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고난 앞에서 기다림의 가치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해줍니다. 이런 하나님께 대해서 우리들의 성실치 못한 삶을 반성하고 회개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기다림은 새로운 기회와 소망을 꿈꾸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기다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손길에 
맡기는 믿음이 자라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은총만을 바라는 가장 지혜로운 시간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시간의 의미만이 아니라, 성품을 조절하는 훈련도 가능케 합니다. 고난의 시간은 기다림의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총을 헤아려보며, 우리 자신들의 어리석고 연약한 모습을 대조해 보는 
새로운 기회입니다. 잠잠히 주님을 기다리라.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발견하는 기회입니다.

모두가 즐겨하지 않는 고난이긴 하지만, 그래도 고난은 적지 않은 역할을 하고 있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육체적인  고난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생활에 고난이 없다고 한다면 또 어떤 일이 생길까요? 
거의 틀림없이 자만과 오만에 빠져서 거들먹거리다가 어리석은 길로 내달릴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고난이 있기 때문에, 겸손해 지고, 남을 배려하게 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사랑하는 일과 
섬기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삶의 내용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고난이 닥쳐왔다고 해서 너무 절망하거나 
슬퍼할 까닭이 없다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고난보다 더 확실하게 하나님을 찾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선지자는 바로 이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시련과 고통 속에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로 고난의 멍에를 짊어지게 하셨고, 뺨을 맞는 
수치도 맛보게 하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영원토록 그런 고통  가운데 머물게는 하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고 합니다(27-31절).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건강도, 자존심도, 명예도 잃었다고 절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고난을 통해서 이것들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회복하게 된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이며,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고난은 고난만이 아닙니다. 고난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재정비하는 기회입니다. 자신과의, 이웃과의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세우는 은총의 기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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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 20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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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가복음 4:35-41


예수님은 제자들을 크게 꾸짖으신 일이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도무지 믿음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큰 낭패는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을 향한 주님의 질문으로 받아야 하겠습니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로써,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분명히 해두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하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저의 할머니는 중년에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할머니가 믿는 것은 무어예요? 서양 선교사님이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주저하지 않고, 예수님이 저를 살리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들어주실 것을 믿으며, 나중에 천국에 들어갈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가 되시며,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분이신 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을 마음에 확고하게 간직하고 있어야 할뿐 아니라, 살아가면서도 그 신앙으로 굳세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은, 적어도 신앙적인 차원에 있어서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풍랑을 만났을 때,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세상이 망하는 줄로 알았고, 이제는 
꼼짝없이 죽는줄로 알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그들과 같은 배에 타고 계시는데도 
말입니다. 그들은 육신으로 계신 주님과 함께 동거하고 있었는데도, 그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가장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하실 수 없다는 생각이, 바로 기독교인의 비극입니다.


시련과 역경은 믿음을 확인하는 시금석일 수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성숙한 사람과 미숙한 사람을 구별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새로운 환경-특히 어려운 일 앞
에서의 처신으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믿음을 저울질 할 수 있는 것도 시련과 역경이 시금석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바다에서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경우를 예로 들어봅시다. 이런 일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인생살이가 항상 순풍에 돛단 듯 평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경우  힘들고 어렵다고 
하겠습니다. 사업에 실패할 때도 있고 중병에 걸릴 수도 있으며, 믿었던 사람이 등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낯선 일이 아니라, 흔한 인생살이 모습입니다. 물론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며, 굉장히 심각한 
고통과 두려움을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믿는 사람으로서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고 있습니다. 
낙심할 것이고, 슬퍼할 것입니다. 두려움이 여러분을 꼼짝하지 못하도록 붙잡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떤 사람들처럼 이젠 살 희망이 없으니 죽는 게 
낫겠다고 하겠습니까? 바로 이런 경우가 생겼다고 하더라도,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도와주실 주님께서 바로 우리들 곁에 서 계시는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순간이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고, 주님의 손을 굳게 붙잡을 때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들 믿음의 현주소를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매일 안개가 끼는 날도 아니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도 아닙니다. 맑게 갠 청명한 날, 미풍이 부는 그런 
날도 오게 될 것입니다.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의 교차, 희망과 절망의 반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믿음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 머물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들의 삶의 자리는 늘 변화하고 있고, 예측할 수 없는 문제들이 
터져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아프게 한다고 하더라도, 믿음만은 부여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믿음을 확인하도록 촉구하셨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도록 성장한 믿음에까지 말입니다. 믿음은 우리 
자신의 지혜와 힘을 나타내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나타나게 하는 
유일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믿음은 하나님을 우리들 삶의 현장에 
모셔 들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제자들이 배웠던 것처럼, 믿음 있기를 구해야 하고, 
믿음으로 살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믿음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엘리사와 같이 갑절의 믿음(영감)을 구할 것입니다.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소유해야 할 
가장 값진 보물입니다. 지금 이 보물이 우리에게 있는지를 살펴보십시다.


왜 절망하고 슬퍼합니까? 현실적인 문제가 직접 원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절망과 두려움의 원인은 
믿음없음에 있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건강한 믿음을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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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 13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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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린도후서 5:1-10


수정교회 종탑안의 기도자들, 열심히 장사하는 이들, 그리고 노숙자들, 미국의 모습이며 또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저마다 현실과 다른 삶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삶을 꿈꿔야 
하겠습니까? 우리들이 풀어야 할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늘의 주제입니다.

 


[장막 집]에서 [하늘 집]을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힘들지 않게 사는 인생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 뿐 아니라, 미국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장막 집]의 특징입니다. 분주하고 치열한 싸움을 싸운 후에 주일을 맞는 풍경은 또 다른 세계
였습니다. 성장을 한 교인들이 교회당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일어서서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듣기 위해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장막 집]에 살면서 [하늘 집]을 향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들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저는 귀국 후 어느 교우의 [병상]을 찾아갔습니다. 물 마시는 것까지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 [장막 집]에서 우리들이 겪고 있는 현실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만난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게서도 비슷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육신적인 절망을 
안고 있는 사람, 경제적인 고통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 마음이 상한 사람, 소망을 잃은 사람, 온갖 
사람들이 거기에도 가득했습니다. 4-5명의 아이들을 앞세우고 학교로 가는 히스페니아 어머니는 그래도 
밝게 웃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우리들을 향해서 말씀합니다.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이 지으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발은 땅에, 
다른 한 발은 하늘을 향해 서로 교차하며 이 [장막 집]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 집]을 덧입고 [장막 집]에서 살아갑니다.

[장막 집]과 [하늘 집]은 서로 낯선 모습입니다. 슬픔과 고통이 있는 생활과, 이와는 전혀 다른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찬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세계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두 세계에 십자가로 다리를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장막 집]에서 살면서도 [하늘 집]을 맛보는 것이며 이를 사도는 덧입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장막 집] 위에다 [하늘 집]을 옷을 입듯이 입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공동번역). 
그렇습니다. [장막 집]에 살면서도 얼마든지 [하늘 집]에서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새 옷을 입으면 새로운 
모습이 되듯, [하늘 집]에서 하는 일을 [장막 집]에서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늘 집]에 사는 사람들이 
하는 일을 [장막 집]에서 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섬기면서 사는 일입니다. 
사랑하고 섬기는 일입니다. 사도는 이런 일을 하나님께서 바라고 계시다면서,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하늘 집]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교회생활은 [하늘 집]의 모형일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법을 배우고 익히는 
사람들이 될 까닭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려고 곁에 계십니다.

세상살이가 사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뿐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이것을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장막 집]에 살면서 
[하늘 집]을 경험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도우실 때 입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오래 전부터 우리 곁에 서 계셨습니다. 우리들이 손을 내밀기 훨씬 전부터 우리를 안타까운 눈길로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필요할 때마다 선한 생각과 마음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도움을 청할 때는 언제고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셨습니다. 저는 생면부지의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많은 경험을 가졌습니다. 지난 중국 선교여행과 이번 미주 선교여행에서도 똑 같은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식탁을 준비해 주신 자매님이 집회 직전에 실직하였다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슬픈 
일이었지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잘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들을 잘 섬긴 후에 곧 바로 
일자리가 생긴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면, 그것은 참된 
실패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형통함 속에서 뿐 아니라,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중단치 않고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눈에 보이는 [장막 집]에서 살지만, 
보이지 않는 [하늘 집]을 경험하는 삶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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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7월 6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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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편 61:1-8
(2003년 6월 29일 이상곤 전도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성령 강림절 기간을 맞이해서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과 어떤 관계 가운데서 
살아야 할지를 시편61편을 통해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그리고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는 
같은 의미를 두 번이나 반복해서 간절히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것을 숨기지도 부인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가장 먼저 할 일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하나님은 들으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를 아픔과 고통 가운데서 건져내시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그의 삶을 통해서 
그러한 하나님이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 자신의 죽음에 이를 만큼 심한 고난과 번민의 상태에서 
자신의 고통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그는 땅 끝까지 간 자신의 상태에서 건져내서 나보다 
높은 바위로 올려 달라는 간구를 합니다. '나보다 높은 바위', 그곳은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곳은 안전하고 지친 몸과 상한 마음이 쉴만한 장소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보다 높아서 
내가 스스로 도달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나보다 높은 곳입니다. 내가 문제와 절망 중에 있을 때는 땅만 쳐다보지만 하나님이 계신 곳에 함께 
오를 때는, 그곳에서 나의 처지를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아픔과 고통을 나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먼 곳까지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이사야 55:8-9)


둘째로, 하나님과 끊임없는 만남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주께 부르짖겠다고 말하면서 나를 인도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의 
피난처가 되고 견고한 망대가 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윗은 주의 장막에 거하고 
주의 날개 밑에 피하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의 서원을 들어 주셨고 기업을 허락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다윗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그러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했기에 그러한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목동으로서 양들을 치면서 자신이 
목자로서 양을 인도하듯이 하나님이 자신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배웠고 들판에서 하늘을 지붕삼아 수금을 
타며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꾸준히 하나님과 대화를 하면서 지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죽음의 위협 속에서 쫓겨 다닐 때에도 그를 안전 가운데  지키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을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살아온 삶을 통해서 자신을 지키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을 마음속에 새겨 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가운데서 생겨진 그 신앙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지워질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이 살아 있으려면 그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과 
늘 연결되어진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나의 영적 아버지로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고, 그럴 때, 우리는 
아담처럼 숲 속에 숨는 그런 삶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때 우리는 사무엘처럼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하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가운데서 살며 우리의 삶은 생명력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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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6월 29일 이상곤 전도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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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서 8:14-17

오늘은 성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삼위요 일체이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주일입니다. 이 교리는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어려운 내용입니다만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어쩌면 이런 신앙에 이른 것은 가장 큰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 신앙보다도 더 분명한 하나님인식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긴 <아다나신안 신조>를 고백했습니다. 어려운 내용입니다만, 알기 쉬운 말로 설명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야훼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믿는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으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앉아계시는 그런 점잖은 하나님만이 아니라, 우리 인생을 
위해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지금도 우리들의 평범한 삶 속에 오셔서 
우리들을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는 분이라는 점을 설명하는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역할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목사이면서 교수이고 동시에 아이들에게는 아버지인 
것처럼, 한 사람이 세 가지 역할을 할 수 있고 그래서 세 가지 다른 이름을 가질 수 있습니다만, 
그 보다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성부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우리들의 역사 속에 
구세주로 오셨던 성자 하나님이시며, 마지막으로는 지금도 우리들의 삶 속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믿는 자녀이기 때문에, 
남다른 특권과 함께 사명을 가진 값진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특권에는 반드시 엄청난 의무가 뒤따르게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눈을 떴습니다. 이런 횡재가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여러 차례 해외여행을 갔을 때, 처음 만나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았습니다. 지난 12월에는 중국 공산당원인 호텔 사장에게서 <할렐루야!>라는 인사와 함께 따뜻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시체말로 공짜는 없습니다. 
특권을 누리기 때문에 그에 맞먹는 의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을 라틴어로 <노블리스 오블리게>라고 
합니다. 신분에 걸맞는 의무이행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사도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다운 고난의 멍에를 당당하게 짊어져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서 주님과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받는 고난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품위있는 고난이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시편기자는 주를 위해서 종일 죽임을 당하는 일이며, 
도살할 양처럼 취급받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고난없는 기쁨이 없으며, 십자가없인 면류관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다운 고난이 자랑스럽게 여겨져야 합니다.


최상의 의무이행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는 오늘, 우리들은 야훼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인간중심적인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매사에 책임적인 자세로 
능동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훈련받았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래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과는 정반대로 살아왔다는 말입니다. 뒤늦게 제대로 살아야 하겠다고 깨달았을 때는,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자신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이 낯설 뿐 아니라, 기피하는 엉뚱한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능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수동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너무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서 사는 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하고 따르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우리들의 몸으로 세상에 보여주는 일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의 
도구들인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일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 삼위일체로 우리들 삶의 현장에 친히 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이런 은총을 입었기에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순종할 거룩한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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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6월 15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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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스겔서 37:1-14

우리들 삶에는 불가능한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절망과 자포자기에 빠져버리곤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만났던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라와 주권을 빼앗긴 이스라엘의 
형편이었습니다. 마른 뼈들이 뒹군 세상 속에 하나님의 능력만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났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에는 마른 뼈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절망과 슬픔의 상징입니다. 무슨 방법으로 마른 뼈들을 
살려낼 수 있겠습니까? 논리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절망과 비극의 실체인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났습니다. 이는 에스겔 선지자가 보았던 환상입니다. 인간의 불가능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입니다. 역사 속에 하나님이 들어오시는 일, 그것은 기적이며 신비입니다. 
에스겔의 환상이 환상에 머무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본 환상은 하나님의 
역사 개입에 대한 예표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언제 어디서든지 마른 뼈들이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마른 뼈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 도처에 깔려있습니다. 에스겔 시대에는 나라의 멸망과 
여호와 신앙의 파산을 들 수 있습니다. 어떤 누구의 힘으로도 회복시킬 수 없는 철저한 절망이었습니다. 
마른 뼈들로 가득 찬 골짜기입니다. 알카에다로 소개된 자살특공대는 분명 마른 뼈들이며, 김정일 집단의 
도박행위는 우리 민족 앞에 가로놓여 있는 마른 뼈 입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할 부부들을 원수처럼 
만드는 문제들이 마른 뼈들이며, 교사와 학생, 사업주와 노동자들 사이를 불화하게 하는 것들은 분명 
마른 뼈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성령님을 통해서 나타나십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보내시기로 약속하셨던 성령께서 오셨고, 
이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은 위로자요 협력자이십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실 하나님이십니다. 여전히 이곳저곳에서 마른 
뼈들을 부둥켜안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못살겠다고 야단들입니다. 절망하는 남편의 얘기와 
슬픔에 찬 아내의 얘기도 들려옵니다. 사용자와 고용자가 서로 힘들고 어렵다고 호소합니다. 
어쩌면 양쪽이 모두 진실일 수 있습니다.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만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마른 뼈들에게 임하셨던 에스겔의 환상이 보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능력만이 깨어진 마음들과, 
상처 난 마음들을 싸매어 주실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쪽도 물러설 기미가 없는 팽팽한 줄다리기는 
Neis와 Cs에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악한 마음을 녹여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선하고 아름답게 움직여 주시기를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멀리 바라보게 합니다.

마른 뼈들의 환상을 보고 있는 에스겔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살게 하고 
내가 너희를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알리라>(14절)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절망하는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할 것입니다. 절박한 심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가쁜 숨결을 고르도록 기다리게 하십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 
조금 나중을 생각하라고 말입니다. 에스겔은 자기 민족의 미래를 내다보아야 했습니다. 
잃어버린 조국으로 돌아올 뿐 아니라, 새롭게 재건할 희망의 민족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처참한 현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우리를 더욱 불행하게 만들어 줍니다. 시궁창과 같은 현실에서 눈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푸른 창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제가 시골에서 농사꾼으로 살고 있을 때, 신앙의 어머니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어떤 계산으로도 답이 나오지 않는 그런 처지일 때, 성령님은 
저의 마음속에 계속 속삭이셨습니다. 절망을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보이지 않는 먼 곳을 바라보게 하는 성령님의 음성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한 인격이십니다. 어리석고 연약한 우리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신 능력이 우리를 영원히 따르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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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6월 8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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