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236장.

   오늘부터 4주간 보내게 될  대림절은, 이 세상에 구주로 오시는 주님을 맞기 위해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교회력은 변화하는 세상에 살고 있음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변하는 세상 속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 있어야 함도 가르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의 한복판에는 “너를 사랑한다. 너를 지켜주노라. 너를 살려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변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겨울을 알리는 전령은 차가운 바람입니다. 나무를 풍성하게 했던 잎들이 차가운 바람이 불자 다 땅에 떨어졌습니다. 파랗게 움트던 봄날이 엊그제 같은데, 몇 차례의 변화를 거친 것입니다. 이렇듯 자연현상만이 아니라, 세상의 대부분의 것들이 변하는 것들입니다. 입시제도가 자주 바뀐다고 학생들은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변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요즘 사람들의 화두는 크게 두 가지인 듯 합니다. 국보법을 비롯해서 몇 가지의 법을 고쳐야 한다는 얘기와, 다른 하나는 수능과 장성인사에서 부정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법이란 절대로 바뀌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어떤 법이라고 하더라도 시대가 달라졌다면, 당연히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논란의 초점은  바뀔 때가 되었다는 쪽과 아직은 아니라는 것일 뿐입니다. 변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변화에 익숙해지는 것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문제는 변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는것 같습니다. 사람의 도덕심이나 윤리가 그것입 니다. 커닝에 대해서, 진급심사에서 도덕심과 윤리가 깨트려졌다는 사실입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노력의 대가로 대학에 진학해야 했습니다. 정정당당한 평가를 받아서 장군이 되어야 했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윤리를 최고의 덕목으로 규정하는 분들은, 윤리가 파괴되는 요즘의 세태에서  서글퍼할 뿐만 아니라,  말세라는 말까지 사용합니다. 부모의 잔소리가 듣기 싫다고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다른 가족들까지도 다 죽일 생각을 했었다는 한 일본의 젊은이 얘기는 그리 특별한 얘기가 아닙니다. 인간의 도덕이나 윤리도 변해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찾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삶의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서라도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천지는 변하겠으나  내 말을 없어지지 않으리라고(35절)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하신 변하지 않는 말씀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혼란과 무질서로 뒤죽박죽이 된 세상을 정리하는 심판의 날에 관해서 말씀합니다만, 이 말씀의  배경에는 변하지 않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향한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대한, 그리고 구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십자가에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주님의 말씀이 있음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변화는 삶을 생기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돌 듯 하는 일상에서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변화의 바람을 원하면서도, 어딘가에 붙들려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소년 시절에 나이 많은 장로님께서 유행에 관해 들은 얘기입니다. 유행하는 옷은 몇 가지 변화의 테두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나팔바지와 붙은 바지, 긴 바지와 짧은 바지 등, 그 테두리 안에서 바뀐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변화를 위해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킵니다. 이런 변화에 대해서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이제 젊은이들은 새로운 세상을 향해서 변화를 찾아 나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주님의 말씀을 매일 먹는다면 말입니다. 새로운 학교, 새로운 직장을 향해야 하고,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끝없는 변화는 두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주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 변화를 호기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변화 가운데서도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시는 때문입니다.

   우리는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변화는 삶을 신선하게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줍니다. 그러나 변치 않는 주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변화속의 삶을 당당하게 즐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Posted by 박성완
,


시편  109:21-26.
찬송  93장.

  오늘은 교회력 마지막 주일로, 인생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시간이며, 추수감사절로 지킵니다. 우리에게 절대 복종해야 할 왕이 계시다는 사실과, 그 분의 은혜 아래서 살아왔음을 감사해야 하는 것을 진심으로 배우는 주일입니다. 우리 왕은 하늘과 땅을 잇는 십자가를 지신 분입니다. 하늘이 땅에 닿았고, 땅이 하늘에 닿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은 끝이 없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는 불쌍한 민족을 등에 업고 축재를 한 지도자 얘기를 듣고 분노합니다. 기업의 약점을 이용한 허울 좋은 정치자금 얘기는 이젠 낯선 얘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왕이신 예수님은 참된 왕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베들레헴의 마구간에 태어나, 나사렛의 목공소에서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일평생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그리고 힘없고 무지한 사람들의 좋은 이웃으로 사랑을 나누며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너무 평범한 삶을 사셨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보지도 대접도 받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시면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셨습니다. 말과 행동이 하나임을 보이신 유일한 왕이 되셨습니다. 이 왕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높아지려고 한다면, 먼저 낮아지라고 하시면서, 섬기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위인이라고 강권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지금 많은 지도자들에게 귀감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들은 앞을 다투어서 섬기는 일을 하겠노라고 약속을 합니다. 예전 같으면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문제는 말과 생각은 깨었는데,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빈 약속으로 끝나버리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왕의 성품과 삶으로 우리 곁에 우뚝 서 계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왕이 되셨습니다.
   우리 사회를 갈등과 대립으로 규정하고, 그 해답을 찾는 대화의 장이 열렸습니다. 한 연사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습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라고. 사람들에게는 자기만의 관점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그 관점을 앞세울 때 심각한 갈등 속에 살 것이며, 동과서가 이 관점을 포기하지 않는 한 갈등의 골은 깊어질 것입니다. 이 세상이 짊어진 문제는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죄악의 대립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서로 타협할 일말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십자가를 놓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으로 세상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셨고, 동시에 십자가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눈뜨게 해 주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온 세상의 왕이 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도 그리고 인간도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갈등과 대립을 감싸 안아 주는 위대한 희생의 다리가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하늘을 땅에, 땅을 하늘에 닿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있는 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갈등과 분쟁이 하루도 떠나지 않는 세상입니다. 평화는 아주 멀리 있는 것 같습니다. 세대차가 더욱 뚜렷해지고 있으며, 인간관계는 더욱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합집산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생명경시 현상입니다. 자살테러는 전혀 동정을 받지 못하는 범죄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인간성이 무참히 파괴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세상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우리의 왕을 모시는 일 밖에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중심 사상입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손해를 보는 일을 뜻하며,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세계이든지, 거기에 누군가 희생의 짐을 지는 사람이 있다면,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인류의 왕이신 예수님, 그 분만이 평화의 왕이 되십니다.  우리의 지난 1년은 평화의 왕이신 주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실패와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모시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감사할 제목이 많은 한 해였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건강과 소망, 그리고 힘과 용기를 주신 것을 감사합시다.  평화의 왕이 여러분의 왕으로 섬김 받기를 기도합니다. 


Posted by 박성완
,


시편  107:40-43. 
찬송  219장.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끝없는 시련속에 살았다는 말씀은 많은 실망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고통없이 살아야 당연하다고 생각한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역시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시련과 고난속에 살았고,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서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는 것 입니다. 

슬픔과 고통 속에 사는 인생을 주목하는 분이 계십니다.
주전 7세기의 이스라엘은 애굽과 앗수르 그리고 바벨론이라는 초 강대국들의 세력다툼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을 여행한 한 여고생이 난처한 질문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곳의 자동차는 80%가 한국산이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부자인 한국 사람들이 왜 미국 눈치를 보며 사느냐고 하더랍니다. 그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세도가들은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고, 자기만의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사슬에 묶여 사는지도 모릅니다. 지천에 깔린 것이 슬픔이고 고통입니다. 누구도 예외없이 그 멍에를 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모순이나, 부조리로 단정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재와 무능력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들 신앙인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성경속의 하나님은 슬픔과 고통을 짊어진 인생들을 주목하고 계시다고 말씀합니다. 고통이 없는 인생이 아니라, 고통을 짊어진 인생들에게 끝없는 사랑을 보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어느 한 순간도 우리 인생을 잊어버린 적도, 눈길에서 놓친적도 없을 뿐 아니라,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십니다(시121:4,8).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28:20).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생들과 함께 하신 아버지이십니다.
현대인을 <고독한 군중>으로 정의한 사람은 리츠먼입니다. 군중속에서 외롭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기쁨도 슬픔도 나눌 이웃이 없다는 서글픈 얘기입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아버지를 상실한 결과입니다. 그것을 죄의 결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창조하신 아버지를 잃어버린 인간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놀랍게도 하늘 아버지는 죄로 멀어진 자녀들을 주목할 뿐 아니라, 처음부터 지금까지 항상 그들과 함께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을 마음속에만 염려할 뿐이겠지만, 우리 하늘 아버지는 사랑의 눈길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누웠을 때에도, 모세가 애굽의 바로 앞에 나설 때에도, 다윗이 골리앗을 마주해 나갈 때에도 함께 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어떤 처지에 있다고 하더라도, 홀로 있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가까이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손을 내밀기만 하면 언제든지 붙잡아 주실 지근거리에 계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고통의 심연에서 잘 들립니다.
저는 어릴 때 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자주 불렀습니다. 콩밭에서 김매는 어머니를 따라갔다가 아무도 보이지 않아서 놀라기도 했고, 동생과 나무를 하러 산에 가서 길을 잃고 겁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창피하지만  어머니를 찾고 동생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이름을 부르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범죄한 아담을 하나님이 찾으셨습니다(창3:8). 모세를 찾으셨고(출3:4), 기드온을 찾으셨습니다(삿6:12).  언제나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부르셨고, 찾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든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주한 세상 속에서는, 승승장구하는 때에는 하나님도 그 음성도 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과 슬픔속에서 훨씬 분명하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가장 힘들고 외로운 시간에 하나님은 우리의 어깨위에 손을 얹고 말씀하십니다. “아무개야! 내니라. 내가 네 곁에 서 있으니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내 의로운 오른 팔로 너를 붙들어 주리라”(사41:10).  

하나님의 눈길이 우리들에게 머물고 있습니다. 결코 혼자도 아니고, 홀로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신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니라” 


Posted by 박성완
,



    미국 대통령 선거가 끝났습니다. 미국에 의한 평화라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세계가 주목했습니다. 그런데 걱정은 여전합니다. 테러와의 전쟁을 강화하겠다고 합니다. 나라 안 사정도 비슷합니다. 가정들이 학교들이, 직장들이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이런 흔들리는 세상 한 복판에서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는 지혜와 힘이 절실히 필요할 때입니다. 

세상의 터전은 항상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참 평안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없습니다. 겉으로 보아서 잘 모를 뿐, 나라마다 사회마다 개인마다 흔들리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나라만 국민 부채가 수백만 원인 것이 아니라, 미국도 일본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어떤 사업하는 교인에게 어리석은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빚없이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 때 이런 대답을 들었습니다. 빚없이 장사를 어떻게 합니까? 사업가들의 부도는 심각한 문제이지만, 그런 가능성은 언제든지 안고 있다는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떻습니까? 항상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합니다만, 발표가 안되었을 뿐이지, 모든 사람들이 심각한 질병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시간이 언제냐 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불안과 두려움을 억지로 보여주지 않으려고 애쓸 뿐입니다. 청년 실업문제는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제가 미국에 갔을 때 3년 전에 박사학위를 받은 한 미국 사람을 똑같은 식당에서 만났습니다. 어떻게 왔느냐고 물으니까, 3년 내내 여기에 그냥 실업자로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교육문제는 우리나라만 엉망진창이 아닙니다. 속사정을 잘 몰라서일 뿐, 세계 어느 나라나 크고 작을 뿐, 문제투성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주님 품에 안길 때 참 평안이 있을 뿐입니다.” 

참된 문제는 정치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세상을 흔들고 있는 문제들이 정치나 경제 사회와 같은 일반적인 문제들만이 아니라는데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부여안고 있는 흔들리는 이 세상의 문제들은 사회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 세상의 문제들처럼 취급할 수도 있지만, 그 근원을 추적해보면, 그것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더 강력하게 수행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파병한 자이툰부대 장병들이 처음 목적과는 다르게 진흙탕 싸움에 끌려들어갈 것이 뻔합니다. 유전자 연구는 틀림없이 뜨겁게 찬반양론으로 일대 격전을 치룰 것입니다. 종교 간의 갈등과 대립은 종교전쟁으로 치닫을 전망입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모든 문제들의 밑바닥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깔려있습니다.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영적인 문제들로 발전해 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기독교가 제자리를 차지하느냐? 아니면 일반 종교와 다를 바 없이 떨어져 내려갈 것이냐가 판가름 날 형편입니다. 기독교는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저는 지난 주간 내내 <십자가 신학>이라는 주제로 씨름을 했습니다. 기독교회의 정체성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고민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질병의 노예가 되어서 맥없이 끌려 다니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사람들이 비참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찌하여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고난과 시련에 꽁꽁 묶여서 사는 것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능력의 오른 팔로 마귀들을 쳐부수고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풍성한 복을 내리시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십자가 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누구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더 이상 기댈 희망이 사라진 절망의 처지가 되어서야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망과 실패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시련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세상이 흔들립니다.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문제이며, 우리들이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의 기회를 맞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기회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


  오늘은 종교개혁 487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옥수동교회 주일 설교 초록을 묵상자료로 보내드립니다.
   무엇이나 기초가 튼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높이 오를 수도 있고, 오래 버틸 수도 있습니다. 건강도 사업도 그리고 신앙도 예외 없이 기초에 관심을 써야 합니다. 눈속임으로 는 그 생명력이 짧습니다. 바탕이 부실해서 몽땅 무너지는 때문입니다. 종교개혁 487주년 기념 주일에 적절한 말씀입니다.  신앙의 기초에 주목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성경 속에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담겨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에만 참된 인생의 행복의 길과 구원의 길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신앙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위에 서 있는 것일까요? 슬프게도 100명중 1명만이 매일 성경을 읽는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 기독교인의 신앙의 기초가 부실하다는 사실이 들어납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아야만이 신앙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신앙은 잘못되기 쉽고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오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성경말씀을 잘 배워서 그 위에 여러분의 신앙을 세우려는 목적입니다. 그러면 신앙이 건강해지고, 그 건강한 신앙으로 복되고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무리 다른 것들은 열심히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엄격히 말해서 기독교 신앙이라고도 할 수 없고, 그저 기독교흉내만 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읽은 말씀의 뜻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깨달아 지는 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십시오. 이것이 신앙으로 사는 일이며, 올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여타의 신앙들과 구별되는 것이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믿음입니다. 일반 종교들이 인간중심적 신앙체계라고 한다면, 기독교회는 하나님 중심적 신앙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회가 가르치는 신앙은 하나님의 행동에 주목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죄와 죽음아래서 고통당하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주신 일을 주목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하나님의 구원행동만이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종교들은 인간의 행동에 주목합니다. 인간의 행동이 자신의 구원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만큼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로주의나 선행을 최선의 가치로 내세우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계산인지 모릅니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행하신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행동만을 믿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야말로 그 어떤 선행보다도 더 귀하고 값진 것입니다. 다만 선행은 믿는 후에 반드시 맺어야 할 열매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은총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은총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은총이란 아무런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넘치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은총이라는 말은 하나님만인 사용하실 수 있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예외 없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세례 받은 이들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세례를 받게 되었고, 가정을 이루어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 자신의 장점이나 능력에 의해서 누리는 축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총에 눈뜨게 될 때, 그 삶은 기쁨과 감사로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물론 입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삶으로는 이 은총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실패나 병들었을 때,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을 잘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기초는 중요합니다. 종교개혁절은 이 신앙의 기초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성경위에 서 있고, 믿음위에 서 있고, 은총위에 서 있어야 든든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박성완
,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종>이라는 용어는 적절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에서는 흔히 사용하는 말이기에 그 의미를 잘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종은 주인 앞에서 자기의 생각이나 행동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주인의 뜻과 행동에 철저하게 복종해야 하는 피동적인 존재입니다. 종은  자율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종>이 된 사람들 입니다.
오래전에 베델회관을 건축하는 일꾼들을 우리 교회 여선교회가 격려차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음식을 준비하고 기도를 드리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처럼 그 일꾼들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기도했습니다. 장로님 한 분이 그 말을 변명하느라고 진땀을 흘렸습니다. 일반 세상에서 종이라는 말은 낮고 천한 자리에 있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리고 오늘 시대에는 종이라는 말조차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기독교인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하는 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란, 하나님 앞에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따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있겠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앞에서는 무시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종 된 자세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장례식날 비디오를 통해서 어머니께서 생전에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 오셨는지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농사일이 얼마나 바쁘고 분주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권사님 심방합시다. 라고 말씀하면, 하던 일을 멈추고 심방에 따라나섰습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종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종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주인입니까? 

종의 길은 주인을 위해서 사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운명적인 것도 있습니다. 어느 민족, 누구의 자녀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타고난 성품 등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만의 삶을 향한 꿈이 꾸고, 그 꿈을 좇아 갈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느냐? 보다는 어떤 자세로 사느냐? 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종의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종은 농사꾼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 나가서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수고했다. 여기 와서 먹고 쉬어라”는 말이 아니라, “부엌에 가서 먹을 것을 준비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인생살이가 이와 흡사하지 않습니까? 열심히 그리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감당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 삶이란 말입니다. 칭찬을 받지 못하고, 상을 받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그것이 종의 길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살이 입니다. 상 받지 못했다 고해서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맡은 일을 말없이 짊어진 삶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종의 길을 주목해서 바라보시는 분이 계십니다.
저는 시편 23편을 읽을 때마다 항상 감동을 받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구절이 그렇습니다. 목자는 양들의 생명을 돌보는 분입니다. 건강한지 병들었는지를 살펴봅니다. 바르게 사는지 비뚤어지게 사는지도 살펴봅니다. 해야 할 일을 하는지, 해선 안 될 일을 하는지도 주목합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일생동안 내내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물론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의인이 인정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죄인이 상을 받는 세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어쩌면 땅에서 상 받는 것을 포기해야 할지 모릅니다. 거짓투성이 속에서 이와 맞서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 지금 대학과 정부가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거짓말 학적부를 가지고는 좋은 학생을 뽑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332명 중에서 1등이 225명이 나왔다면 그런 성적표로 어떻게 좋은 학생을 뽑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삶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사는 것은, 무엇을 하든 모두 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일합니다. 그 때 건강한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삶의 자세를 주목하십니다. 


Posted by 박성완
,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지족하며 살라고 권고합니다.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하고, 허락된 삶을 감사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성장할 수 있고,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을 때, 삶은 복되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지족해야 할 이유입니다.

분수를 모르기 때문에 불평불만이 생겨납니다.
거창고등학교는 오래전부터 영어와 수학 과목에 대해서만은 등급제를 적용해서 가르칩니다. 영어반이 ABC반으로 나눈다는 말입니다. 실력차가 현저한 학생들을 함께 가르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졸업 때가 되면 학생들의 실력이 비슷한 수준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독일교육도 그런 방식이라고 합니다. 자기 수준에서 공부를 시작하도록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불만의 소리로 가득 차 있는지 모릅니다. 거의 매일 머리띠를 한 사람들이 종로 네거리를 가득 매우고 있습니다. 원자력 발전소를 설치를 두고, 국가보안법을 두고, 반대와 찬성하는 사람들로 갈려서 야단들입니다. 대부분의 문제들에는 분수를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 같습니다. 오직 남아 있는 것은 이해관계뿐인 듯 합니다. 무슨 이익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세태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언제나 자기 분수에 기초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도록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남들을 따라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만의 삶을 사는 사람을 분수가 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깊이 잠들어 있을 때, 깨어 책상을 지키는 사람이나, 굵은 땀방울을 흘리는 사람은 결코 불평불만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분수를 알고 있기 때문에 헛된 일에 마음 쓸 시간이 없습니다.

삶을 긍정하고 감사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인생살이는 그것을 짊어진 사람에 의해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행복한 인생살이를 할 수도  있고, 반대로 불행한 인생살이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삶에 대한 태도여하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하겠습니다. 평택에 국립 재활대학이 있는데, 그 학장이 김형식박사입니다. 그는 한국전쟁 때 부모를 잃고, 오른 팔까지 잃은 장애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허락된 삶을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노래를 잘했는데, 저하고는 남성 4중창단으로 친하게 지냈습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지만, 양부모님을 주신 것을 감사했고, 팔 하나가 없지만, 아직 다른 한 팔이 남아 있는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어둡게 바라보지 않으려고 힘썼습니다. 오히려 밝게 바라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원망하지 말고, 세상을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탓하자고 다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여전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들을 맡겨주셨습니다. 우리가 밝은 눈으로 바라보고 감사할 때, 그것들이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할 때 지족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살고, 왜 살아야 하는가? 이 물음은 자주 되풀이 할만한 가치 있는 것입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일터로 나가는 까닭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것이라면 너무 초라합니다. 사도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축재가 삶의 목적인양 살아갑니다. 성공과 출세가 신앙의 목적인양 가르치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빗나간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복을 달라고만 기도할 것이 아니라, 복 받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삶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들입니다. 저는 우리들 신앙인들이 세상 어디에서 살던지 간에,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세상을 섬기며 사는 것 말입니다. 그렇게 살면 반드시 향기 나는 복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따라 떼어놓을 수 있는 물음이 아닙니다. 주어진 삶을 긍정합시다. 그리고 주어진 삶에 가득 담겨진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합시다. 


Posted by 박성완
,



     너무 억울해서 하는 말 중에, 하나님이 벌주실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을 때, 하늘을 향해서 던지는 말이긴 합니다만, 매우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벌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심판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심판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아모스는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아모스는 짙게 깔린 사회악을 고발하였습니다.
세상이 아름다울 수도 있고, 반대로 추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 세상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따른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해묵은 문제들을 놓고 야단법석입니다. 과거사 청산이 그렇고 국보법 폐지 등의 문제들이 그런 내용입니다. 지난주에는 어느 방송국 앞에서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이 기도회라는 이름으로 데모를 하고 있었습니다. 방송국에서 준비한 교회의 문제들을 방영하겠다는 계획을 취소하라는 항의성 기도회였습니다. 아모스 선지자 시대만이 문제투성이는 아니었습니다. 우리 시대도 예외가 아니며, 이 세상 끝날 까지 계속될 문제들입니다. 아모스는 사회정의가 잠들어 버린 문제를 고발하였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보호를 받고 도움을 주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학대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다면, 이것은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반드시 고쳐져야 할 일입니다. 사람을 돈으로 사고파는 인신매매가 환한 백주에 일어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만히 보고만 계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시대를 향해서 법과 질서를 관리하는 책임 있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한 패거리가 되어서 불의한 세상을 친구로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모스는 외톨이가 되어서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벌주실 것이라고. 

아모스는 교회가 병들어 있는 것도 고발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불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중심에 계시다고 믿기 때문에 어떤 시련과 역경에도 당당하게 견디고 살아온 사람들 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신앙이 깊이 병들어 버렸습니다. 신앙의 순수성과 목적이 사라지고, 오히려 출세와 성공의 수단정도로 바뀌어 버렸던 것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월삭과 안식일은 신앙생활을 유지하게 하는 중요하고 의미 있는 날이었습니다. 월삭이란 매월 첫째 날로, 그 날이 되면 사람들은 성전에 나아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전제와 번제 그리고 소제를 드렸습니다(대하 8:13, 민28:11-15, 호 2:11). 그런데 이런 날들이 오히려 귀찮은 날로 바뀌었고, 공공연히 월삭과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불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런 잘못에 대해서 막아서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상은 잘못된 것을 바꿔보자고 야단들인데, 교회는 여전히 세습제로, 불투명한 재정관리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신사참배와 독재정권을 비호했던 것에 대해서 침묵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긍정적인 뜻을 가졌습니다.
아모스의 고발은 결코 부정적인 목적에서 출발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특히 이 세상에서의 심판은, 긍정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새로운 기회로의 초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고발이란 형식적인 면에서는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모스는 오늘 우리 시대에도 주목해야 할 선지자라고 하겠습니다. 쓴 소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역사 바로 세우기는 어두운 과거 들추기가 되어선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앞으로 올 세상을 밝고 희망적으로 만드는 방향성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사회가 고발하기 전에 교회 스스로 자정하는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습니다. 교회지도자 선발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나, 교회재정을 투명하게 관리하는 일은, 기본적인 일인데도 개선될 기미가 전혀 없자, 사회 언론매체가 수술 칼을 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 때 불교가 재정문제로 큰 시련을 겪었는데, 불투명한 관리의 결과였습니다. 교회는 이 시대와 역사를 선도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활발한 활동이나 외관보다 더 훌륭하고 귀한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벌주신다는 것은, 우리들의 신앙을 격려하는 말씀입니다. 약한 양심을 흔들어 깨워주고, 하나님의 심판만은 언제나 공의롭다는 격려를 주는 때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