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교회학교를 위해서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신앙으로 양육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들은 우리의 미래인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 가운데서 자라게 될 때, 세상을 빛내는 값진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젊은 엘리사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배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젊은이를 주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야 합니다(잠22:6).
저는 매일 책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많은데 기억력이 떨어져 보존하는데 한계를 느낍니다. 지금 제가 외울 수 있는 성경구절들은 아마도 주일학교 시절에 암송했던 것들이 전부입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성경말씀들은 대부분 학생시절에 배웠던 내용들입니다. 조기 교육의 열풍이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나이에 알맞은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을 외면한 때문입니다. 유아기는 영어나 글자 읽히기 보다는 감성이 풍부하게 자라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유년기에는 생각의 바탕을 든든하게 놓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학생시절에는 위대한 삶을 내다보도록 마음의 눈을 띄워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학시절에는 진리를 찾아서 밤을 새며 공부해야 합니다. 감성이 눈을 떠야 할 나이에 억지로 영어다 수학이다 하면서 가르치는 것이 과연 잘 하는 것일까요? 가치관을 세우기도 전인 아이에게 명품에 눈뜨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모의 자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최고의 스승의 자리(잠1:8)인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부지런히 주의 교양과 훈계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늙어도 그 길을 떠나지 않고 똑바로 제 길을 걸을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복된 삶으로 인도하십니다(왕상8:35-36).
어떤 사람은 멋진 삶을 살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어리석게 사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을 평가할 때마다 각자의  결심과 행동에 주목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초점을 그들 인간 안에서 찾으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은 청년 엘리사가 어떻게 엘리야의 제자로 부름 받는 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2겨리 소가 끌는 장기 질을 했다니까, 24마리 소를 부리는 힘센 장정이었습니다. 그가 성공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엘리야의 부름을 받았을 때, 주저하지 않고 따랐고 마침내 위대한 선지자의 반열에 서게 되었습니다. 엘리사의 결단과 행동에서 그의 위인 됨을 찾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엘리사를 포함해서 우리 모든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엘리사의 마음을 사로잡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겉으로 나타난 현상에만 주목하지만, 사실은 그 현상 뒤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손에 쥔 복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지금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뜻 보다는 자신의 목적이 너무 강합니다. 자기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헌신의 삶을 눈뜨게 해 주어야 합니다(왕상19:21).
안정된 현실을 박차고 일어나서 고난이 기다리는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기드온이 그랬으며, 바울이 그랬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과 그 나라를 위해서 헌신의 삶을 살려고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엘리사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엄청난 도전에 몸을 던질 수 있었을까요? 엘리사의 사람됨 때문일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여러 도구들을 사용하시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이 그렇게 사람들을 사로잡아 주신다고 믿습니다. 엘리야는 그 일에 불린 도구였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 부모로서 혹은 교사로서,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도록 눈을 열어줄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엡6:4). 모든 인간은 그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이 사는 목적이며 삶의 의미인 때문입니다. 요사이 진정한 삶의 목적에 대해서 질문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이란 자신의 현재의 일을 하나님의 일로 함 입니다.

   무엇이 잘 사는 것입니까? 젊은 엘리사가 고민했을 문제입니다. 그는 엘리야를 보면서 그를 따르는 일로 뜻을 정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삶이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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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고보서 3:16-4:6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신앙과 생활에 대해서 분명한 태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머무는 
신앙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신앙이 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구체적인 신앙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평화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정신적인 혼동상태를 맞고 있습니다. 엊그제 남북의 정상들이 만나 이른바, <남북 평화 선언문>을 
온 세계에 발표하였고, 곧 바로 금강산 관광길이 열리고, 개성에 대규모 산업단지가 조성되는 등, 통일이 
가까운 듯한 기분 속에 살았는데, 새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치적인 불안이 계속되더니, 마침내 재신임을 
받겠다는 선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정치적인 혼란과 경제적인 불안감이 역역합니다. 이런 문제들의 밑바닥
에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었던 것입니다. 선명성을 내세우고 개혁을 기치로 
내세운 새 정부로써는 자신들의 부정부패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배수진의 일환이라고 생각 
하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이런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평화>라는 큰 틀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하는 점입니다. 우리나라의 방향이 어디로 가야하는가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경험했던 대로 공산주의를 미끼로 하는 독재시절이 아닙니다. 핵무기 개발을 
카드로 세계를 향해서 협박해서 살아남으려고 하는 저 북쪽의 망나니를 잘 설득해서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를 
만드는 일입니다. 분열과 분쟁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지는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선한 욕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에게는 어떤 종류이든 욕망이 있어야 삶이 지탱될 수 있습니다. 그런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삶의 내용이 
치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악한 욕망이 활발할 때 입니다. 분노나 탐욕에 사로잡혀 있다면, 이것은 엄청난 
비극을 가져올 뿐입니다. 사도는 이런 욕망을 세상적인 것이요, 마귀적인 것이라고(15절) 규정합니다. 
이런 욕망의 끝은 슬픔과 고통이며 마침내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질 욕망은 이와는 전혀 다른 
선한 욕망이어야 합니다. 선한 욕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자기중심적인 것에서, 
이웃과 함께 사는 열려진 눈을 뜨고 보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항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남편과 
아내를 그리고 자녀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일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바쁜 길을 가던 
한 나그네가 깊은 신음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돕는 얘기가 <선한 사마리아 인 비유>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거룩한 욕망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이런 선한 욕망
가운데로 부르시기를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겸손한 태도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우리가 살아갈 원칙은 겸손한 자세입니다. 자기를 잘 알려야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겸손이라는 말처럼 해묵은 단어는 없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겸손에 대한 
이해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무조건 자기를 낮추거나 모른다는 식은 참된 겸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겸손과 반대 개념인 교만을 물리치시는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교만은 제 분수를 넘어서는 
모든 말과 행동을 말합니다. 아담이 교만해질 때 하나님께 반항하고 불순종했습니다. 사울이 교만해질 때, 
제사장의 직무까지 무시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조차도 말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겸손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이 가르치는 최상의 겸손은 첫째는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일이요, 둘째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는 것일 뿐이겠습니다. 그것은 결코 비굴해 
지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자리를 확인하는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모두가 제가 잘났다고 하는 
세상입니다. 다른 사람은 안중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이웃에게서 존경과 신뢰를 받겠습니까?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사실은 너무도 멋지고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숨쉬고 일할 곳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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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12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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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가복음 8:27-35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한 복판에 우뚝 서 있습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합니다. 문제는 모든 기독자
에게도 자기 십자가가 있다고 할 때는 달리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이미지로 바꿔야 
하겠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짊어질 때, 거기에 빛나고 아름다운 삶이 
익어가는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생각해선 안 됩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12제자들과 오붓한 시간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지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어느 순간이 되었을 때, 예수님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 까닭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반드시 예수님을 떠나가는 그런 슬픈 일이 생기고 말 
것입니다. 베드로가 대답을 했고 칭찬까지 들었습니다(마16:16-19). 그런데 실제로는 이렇게 정답을 
말했던 베드로까지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대답은 자신이 
깨달아서 한 말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하셨을 때, 두 팔을 벌리고 가로막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를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형벌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짊어지시게 될 십자가라고 하더라도, 
부끄러운 일로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온 세상의 죄악을 짊어지는 위대한 것임을 알지 
못했기에, 지금까지 습관처럼 알고 있는 십자가만 생각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지실 십자가의 깊고도 
넓은 의미와 목적을 전혀 살피려고도, 살피지도 못했습니다. 

 


기독자인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를 살펴봅시다.

십자가는 본래 흉악무도한 사람을 처벌하는 가장 잔인한 형벌의 하나였습니다. 그것도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 처형장면을 목격하도록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사건 이후로는, 십자가 이해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아름다운 십자가, 의로운 십자가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실수와 어리석음의 옛 십자가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서 대신 짊어져주는 사랑스럽고 감사한 십자가 말입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짊어지는 십자가도 그 중 하나입니다. 조국을 위해서 흘리는 애국자들의 피도 해당됩니다. 
그러나 기독자들이 져야 할 십자가는 이런 것들과 차원을 달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짊어지는 십자가입니다. 어찌 보면 영적인 것만으로 치우쳐 볼 수 있지만, 사실은 그 십자가는 
영육을 아우르는 참된 십자가입니다. 기독자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아픔에 대해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기회주의자처럼 이로운 쪽으로 변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솟아나는 세상을 
위해서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기독자는 자신의 구체적인 삶을 부정하지 않고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성실하게 사는 삶으로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금 십자가를 짊어지는 사람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영광의 자리에는 누가 앉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자리에는 아무나 앉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 
기독자들만이 앉을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 가보면, 거기엔 반드시 십자가를 
짊어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은 서로 맡겠다고 팔을 걷어붙입니다. 이런 가정에 
여러분이 살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직장에 여러분이 속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기독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우리 직장의 보배입니다. 당신 때문에 저는 늘 행복합니다.”이런 말을 
들으면서 살아야 할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기독교인은 약아빠진 사람들이다.”이런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들의 모습이 그렇게 비춰지고 있다면, 이것은 보통 큰 문제가 아닙니다. 
“과연 기독교인은 뭐가 달라도 달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기에 십자가를 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항상 그 배후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십자가는 
결코 바보가 하는 짓이 아닙니다. 그는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도록 불리어진 기독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은 고통과 괴로움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이 되어 여러분의 마음을 
행복으로 채워줄 것입니다. 세상은 이런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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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5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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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사야서 35:3-7a

사람들은 저마다의 꿈이 있습니다. 전쟁이 없는 세상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내전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입니다.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도 있고, 건강하고 재미나게 사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세상을 어떤 것입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제안하는 새로운 세상을 
들여다봅시다.

 


새로운 세상은 모두가 당당하게 사는 세상입니다.

우리에게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약한 사람이 있으니까 강한 사람이 있고, 가난한 사람이 있으니까 부자가 있다고 
말입니다. 이런 이분법은 피할 수 없는 진리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은 잘못된 것입니다. 오랜 시간 굳어져 
내려오는 동안 진리처럼 행세하게 되었을 뿐, 잘못되어도 아주 잘못된 고정관념일 뿐입니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한 교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미국은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은 기회와 자유를 주며, 자신만 원한다면 얼마든지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나라라고 말입니다. 물론 미국이 완전한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당당하게 살아가려는 분명한 의지를 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그 나라 시민이 되기만 하면, 똑같은 권리를 주장할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유색인종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이 존재하고 있고,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힘이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하고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가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수 있는 세상, 권력
이나 학력이라는 말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저마다의 개성과 능력이 존중되고 발휘되는 곳이 새로운 
세상입니다. 
"약한 손을 강하게, 떨리는 무릎을 굳게, 겁먹은 자를 굳세게"해 주는 세상은, 분명 새로운 세상입니다.

 


사람들이 본래의 자신을 회복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은 대단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까지 부러워하는(시8:5), 하나님의 형상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온 후로, 처음 모습을 잃게 되었고, 엄청나게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정신적으로도 불구인 삶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을 주목해서 바라보십시오. 
모두다 하나같이 불구들로 살고 있습니다. 카드 빚이 커져서 일가족이 자살하는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사람들만의 얘기가 아닙니다. 무려 7년 동안이나 한 나라의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하던 전직 
대통령이 한평생 사용하던 식탁이 5만원에, 심지어 정든 진돗개 2마리가 40만원에 팔리는 수모를 겪고 있는 
것은 한참 잘못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모습은 본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도 예외 없이 밝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밝은 귀로 들어야 합니다. 모두가 사슴처럼 
뛸 수 있어야 하고, 하고픈 말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병든 마음도 싹 고쳐져야 합니다. 
서로 사랑의 대상으로, 서로 섬김의 대상으로, 서로 함께 사는 세상 말입니다. 물론 차이는 있겠지요. 
그러나 그 차이로 차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섬길 기회로 삼고 기쁘게 봉사하는 세상 말입니다.

 


자연이 제 구실을 하도록  배려되는 세상입니다.

사람의 발 길이 닿지 않은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합니다. 거꾸로 뒤집어 말하면, 
사람이 세상을 망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환경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주제입니다. 숨쉬기가 
힘들고, 마실 물이 없어진다고 생각해 보시면 금방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우리들 인간에게 
맡겨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인간들은 자연환경을 학대하였습니다. 그저 편하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생각을 고쳐먹어야 합니다. 온갖 성인병이 생기는 것은, 이런 편리한 생활
이 가져다 준 재앙이라고 합니다. 10리 20리를 걸어서 장보러 다니던 시절에는 지금처럼 많은 성인병이 
없었습니다. 저는 지난 20년 동안 10-15분 비탈길을 오르내릴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곤 했습니다. 미국은 매년 여의도 두 배 넓이로 사막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벌써 우리나라가 
물 부족국가에 드는 불명예를 얻었습니다. 새로운 세상은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 때문에 자연까지 
신음하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상쾌하게 숨쉬고 마시며 건강하게 함께 사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 세상을 천국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지금 여기에서 그런 세상에서 사는 사람처럼 생각하며 
행동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이 새로운 세상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당당하게 저마다의 삶을 살고, 하나님이 
지으신 옛 모습을 회복하며, 자연도 건강해지는 그런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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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9월 28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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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베소서 6:10-20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란 어쩌면 전쟁터에서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용어까지 그렇게 
사용합니다. 작전세력, 전략, 공격적, 배수진 등 무시무시합니다. 어린아이들도, 어른들도 
싸우듯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서도 싸움얘기가 낯설지 않습니다. 오늘은 영적 싸움을 
싸우라고 명령합니다. 우리에게 영적 싸움이 있습니다.

 


영적 싸움의 상대는 마귀입니다.

최근에 누구와 싸워보신 적이 있습니까? 직장 상사나, 가족 중 하나와 싸우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상대라면 
한번 겨뤄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싸울 상대는 마귀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싸울 상대의 
정체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옛말에도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마귀와 싸워야 했습니다. 마귀는 어떤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마귀는 변장술에 능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자신의 졸개를 만들려고 합니다. 마귀와 싸워서 이긴 사람은 예수님 한 분 외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와나 가인, 사울과 다윗 그리고 모세와 아론, 베드로와 가룟인 유다까지 마귀에게 
패한 인물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영적으로 싸울 상대는 마귀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세력이 막강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힘과 지혜로는 이겨낼 수 없는 상대라는 점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칠 때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고> 기도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시험에 빠지는 일은 바로 마귀가 우리를 유혹해서 넘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마귀는 항상 
유혹자로 접근하는 특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영적 싸움의 상대는 마귀입니다. 
이런 마귀와의 싸움은 실제상황입니다.

 


영적 싸움의 무기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마귀를 대항해서 싸울 때 반드시 필요한 무기란,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들로 완전무장을 하는 것입니다. 머리
에서 발끝까지 철저하게 무장을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만큼 마귀와의 싸움은 빈틈없는 준비가 필요
하다는 말씀입니다. 완전무장을 해야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무기들인지 사도는 소개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허리 띠, 정의의 흉배, 평화의 복음이란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인 말씀이 그것들
입니다. 이 여섯 가지 무기를 갖춘 후,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 성령님의 도움을 위해서 기도
하되,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자들을 
위해서도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어떻습니까? 영적 싸움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로 완전무장
하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는 점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 가운데서 진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귀와의 싸움이지만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비결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싸우는 싸움일 때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와 하나님의 도와주심 가운데서만 
이길 수 있는 싸움이 바로 영적 싸움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적 싸움은 교회 안과 밖에서 진행되는 실제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살고 있는 곳이면 어디이든지 거기에 마귀가 있습니다. 마귀는 경건한 기독교인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막아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넘어트리려고 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진 가장 취약한 쪽으로 침투해 들어옵니다. 경제적인 시련을 통해서 넘어트리려고 
하고, 건강을 헤쳐서 주저앉게 만들려고 합니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모아서 성도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도록 충동합니다. 겉으로는 육적인 시련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는 영적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영적 싸움은 교회 안과 밖에서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영적 싸움을 싸울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무기들, 
진리의 허리 띠, 정의의 흉배, 평화의 복음이라는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인 말씀을 매일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깨어있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마귀와의 
싸움은 승리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적 싸움에 패했던 성경의 인물들이, 
나중에는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들이 승리했다면, 우리들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들이 마귀에 대해서 무방비 상태로 사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영적 싸움은 심각하지만, 
사도의 충고를 따라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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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9월 21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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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한복음 6장 60-69절

예수님의 인기가 바닥에 떨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오직 열두 제자들만 남고 그 많던 사람들이 떠나가 버리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신앙하는 근본 이유와 목적이 퇴색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이 보물처럼 
값진 것인데도, 오히려 헛된 것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행동_1


신앙의 첫 단계는 경험적이나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다양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출발점을 보면 대체로 경험적인 신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습니다만, 따뜻함과 위로, 특별한 종교경험 등을 가진 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적인 신앙이 순수하고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수많은 무리들이 바로 이런 범주에 드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그들은 떡을 
먹었고, 수많은 기적들을 목격하였습니다.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장면도 보았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자리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경험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또한 개인적인 경험의 차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관적인 신앙이 
아니라, 객관적인 신앙 혹은 공유하는 신앙의 차원으로 자라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따뜻한 미소와 부드러운 
감촉으로 사랑에 눈뜨게 됩니다. 어머니를 통해서 배우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자신만 독차지하는 사랑이 아니라, 
다른 형제 자매들에게도 나눠주어야 할 어머니의 사랑임을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폭을 넓히는 단계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행동_2


신앙을 보물처럼 소중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지척에서 따라다니던 사람들이, 어떻게 한 순간에 발길을 뚝 끊었을까를 생각합니다. 그들이 가졌던 신앙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6:26). 수단이라고 하는 것은 목적이 충족되는 한 가치가 있습니다. 목적이 채워지지 않는다고 하면 
언제든지 내다 버릴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근면하고 성실한 생활태도를 만드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공과 강건한 삶을 살도록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신앙은 초보적인 단계라고 하겠습니다. 
신앙하는 일이 보물처럼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여겨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신앙을 확실히 가진 
사람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과 동행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알 수 없는 시련과 역경을 만나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맞이하는 고난은 기쁘게 짊어질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그에게 보물입니다. 

 행동_3


신앙을 생활 속에서 꽃 피울 수 있어야 합니다.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 시대에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을 혀끝에만 달고 다녔지 
생활 속에 옮겨놓지는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문은 분명했습니다. 너희도 저 무리들처럼 
나를 떠나가려느냐? 고 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는 똑똑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겠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고 생활에서는 부인한다면, 이것은 엄청난 
잘못입니다. <두 아들> 비유에서 예수님은 차라리 입으로는 부인했지만, 나중에 행실을 바로 가진 둘째 아들을 
아비의 뜻대로 행하였다고 칭찬했습니다(마 21:31). 1950년대 현동완이란 분은 장관에 두 번씩이나 발탁이 됐지만 
사양하고, 난지도에서 여생을 살았는데, 3가지 결심을 실천에 옮겼다고 합니다. 국고를 위해서 커피를 마시지 않고, 
세계평화를 위해서 고기를 먹지 않으며, 고아를 위해서 하루 한끼를 금식했다고 합니다. 
행동하는 신앙이 절실합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설교를 머리로만 듣고 있습니다. 행동에 옮기는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숱하게 하나님과 약속합니다. 어떻게 그 책임을 짊어지려고 하십니까? 듣기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을 모래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행동하는 신앙인들의 주님이십니다. 실천적인 신앙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주님, 우리로 믿는바를 행동으로 옮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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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9월 14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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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언 9장 1-6절

우리의 삶은 공통점 몇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 장점과 단점, 짧은 시간 등이 그것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지혜롭고 복된 인생을 사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어리석은 인생을 사는 것이 분명
합니다. 지혜롭게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하지를 배우고자 합니다. 지혜롭고 복된 사람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롭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지혜롭게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잘 분별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공부를 많이 했다고 지혜로운 사람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고
지혜로운 사람도 아니고,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지혜로운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이들 가운데도 지혜롭기는 커녕 정말 바보처럼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가지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변이 좋은 이웃들이 없다고 하면, 외골수로 
지낸다든지,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런 조건들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만난 노 목사님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런 말씀을 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 한국에서 
잘나가던 남자들보다는 천덕꾸러기 여자들이 훨씬 지혜로운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지식과 지혜는 다른 것입니다. 지위와 지혜도 다른 것입니다. 물질과 지혜 역시 다른 것입니다. 지혜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아름답고 풍부하게 가꾸는 행동입니다. 삶을 지탱하게 하는데 필요한 
행동이 지혜입니다. 그 목사님은 영어를 잘했지만, 가족들을 돌보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아는 것이나 경력, 그리고 물질이 지혜가 아니라, 건강한 삶을 만들어가는 힘이 지혜입니다.




지혜는 좋은 이웃들 속에서 행복하게 사는 일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소유하는 일에 관심을 쏟으며 살아왔습니다. 소유가 행복을 창조하는 힘으로 오해하였기
때문입니다. 평생 먹고 남을 재산을 쌓아두고서도 자살하는 사람들을 보지 않습니까? 행복은 너무 
멀어서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꿈이 아닙니다. 행복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매우 평범하면서도 
일상적인 삶을 누리면서도 재미나게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분명합니다. 좋은 이웃들이 그들의
주변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이해하여주고,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 행복한 사람들의 이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매우 신중하게 다룹니다. 그들은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기본 자세가 되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좋은 이웃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도움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좋은 이웃으로 우리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남편을 찾아가십니까? 아내를 
찾아갑니까? 모든 사람들은 찾아와 주기를 바랄 뿐, 찾아가지를 않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촛점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누구나 
좋은 이웃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삶은 하나님 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사랑하려고 하는데, 몸이 
거부하는 것이나, 마음으로는 일하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누구든 마음이 
지시하는대로 살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고민하게 되고, 낙담하게 되고, 절망합니다. 마음대로 안되는 세상이라고 항변합니다. 분명 
우리들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죄에 붙들린 인생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선한 생각을 실천하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합니다. 가족 사이에 냉기류가 흐르고 있고, 일터가 즐겁지 않습니까? 인생이 
무의미하고 답답합니까?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이 밀려듭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우리들의 아버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혜의 근원이시고, 마르지 않는 
지혜의 샘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내게 오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좋은 이웃들 속에서 살려고 애쓰십시오. 형제와 연합하여 동거하는 일이 아름다운 일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달라도, 서로 이해하고 감싼다면 얼마든지 함께 살 이웃이 될 것입니다.


행복은 멀리 떨어진 신기루가 아닙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얻을 수 있는 복입니다. 지혜는 행복을 만드는 
묘약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런 지혜를 먹고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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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9월 7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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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도행전 15장 36-41절

우리도 우주 기지국을 갖는 나라가 되었다고 합니다. 과학수준을 최고 수위로 끌어올린 성과입니다. 
작은 지구에서 넓은 우주를 향해 눈길을 돌리는 위대한 발걸음을 내디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위대함의 내면에는 여전히 비겁하고 연약하며, 한없이 초라하고 어리석은 인간성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현저히 다른 우리의 두 모습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초대 이방인교회에서 가장 돋보이는 두 인물은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그들은 이방교회인 안디옥 교회를 
대표하는 걸출한 지도자들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방인 기독교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자, 
사마리아와 유대를 거쳐 시리아의 안디옥에 자리를 잡은 이방인 교회는 활발하게 자라났습니다. 
이를 본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지도자로 파송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자신과 함께 일할 동역자로 
바울을 선택하고 그를 찾아 다소로 갔습니다(행11:25). 한 때 이방인 기독교도를 박해하던 유대교의 골수
분자인 바울을, 이방인 교회의 지도자로 모셔들인 것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너그러운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바울 같은 인물을 인정하고 
존경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반대가 있었을 것입니다만, 그는 반대자들을 잘 설득해서 바울을 
기쁘게 맞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절친한 관계를 맺고 있던 두 지도자가 갈라서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그 발단은 너무도 빈약한 문제였습니다. 바나바의 생질인 요한 마가가 1차 전도여행 때,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2차 전도여행을 계획하던 두 지도자는 요한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로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갈라서고 만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들에는 항상 약점이 노출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투거나 싸우는 것을 구경하는 것은 재미있습니다. 모든 싸움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문제에서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자랑을 하다가 싸움으로 번지고, 커피를 타들고 시험공부를 하는 아이들을 
돌보다가 싸웁니다. 저는 이번 고향 방문에서 그리운 옛 추억들을 많이 떠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동생들과 다투던 일들이 많이 그리웠습니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던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늘 장터같이 복잡했고, 시끄러웠습니다. 동생들과 매제들이 저를 맞는 저녁식탁에 낯선 여인이 앉아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으로 받아달라는 청을 하러왔다는 것입니다. 매달 모이는 남매 모임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요란한 관계이지만 그것이 부럽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나바와 바울의 싸움은 
침묵이 흐르는 무거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어떻게 책임감도 소명의식도 없는 사람을 또 다시 일꾼으로 
세울 수 있느냐는 바울의 주장과, 그래도 한번 실수였는데 너그럽게 받아줄 수 있지 않느냐는 바나바의 주장은 
다 옳았습니다. 이제 한 걸음씩만 뒤로 물러나면 해답이 있을 법 했는데, 그게 안 된 것입니다. 그렇게 
위대한 사도들 역시 어린애 같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연약한 인생에게서 완전함을 기대하지 맙시다.

종종 하나님을 어머니에 비유하곤 합니다. 어머니는 끝이 닿지 않는 깊은 마음으로 우리들의 허물과 약함을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성적이 좋지 않다고,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내치지 않으시고, 못난 것은 못난 대로, 
잘난 것은 잘난 대로 한 없이 넓은 가슴으로 품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앞에서는 언제나 자유함과 
평화가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바로 그런 어머니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들이 완전하고 사랑스러울 
때까지 기다리실 뿐 아니라, 비록 아직은 철부지처럼 말하고 행동할지라도 그래도 똑 같은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지금 우리들이 이런 어머니와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할 차례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용서하고 감싸주는 그런 사랑의 마음 말입니다.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만일 고칠 수 없는 일을 기대한다면 얼마나 힘빠지는 일입니까? 그러나 만일 사랑으로 용납해 줄 
수만 있다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참된 이해와 자유가 그것들입니다. 누군가에게서 온전히 
받아질 수 있다면, 그는 참 자유와 기쁨을 누리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겠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이 귀한 진리를 먼저 듣고 깨달은 사람입니다. 연약한 인생을 완전한 
사람으로 기대하지 말고, 있는 대로 용납합시다. 

사람은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며 살게 마련입니다. 복잡하지만 흥미와 즐거움을 갖고 살수 있는 비결은, 
인간의 연약함을 너그럽게 받아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실천하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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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9월 3일 박성완 목사님의 수요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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