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행전 15장 36-41절

우리도 우주 기지국을 갖는 나라가 되었다고 합니다. 과학수준을 최고 수위로 끌어올린 성과입니다. 
작은 지구에서 넓은 우주를 향해 눈길을 돌리는 위대한 발걸음을 내디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위대함의 내면에는 여전히 비겁하고 연약하며, 한없이 초라하고 어리석은 인간성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현저히 다른 우리의 두 모습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초대 이방인교회에서 가장 돋보이는 두 인물은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그들은 이방교회인 안디옥 교회를 
대표하는 걸출한 지도자들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방인 기독교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자, 
사마리아와 유대를 거쳐 시리아의 안디옥에 자리를 잡은 이방인 교회는 활발하게 자라났습니다. 
이를 본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지도자로 파송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자신과 함께 일할 동역자로 
바울을 선택하고 그를 찾아 다소로 갔습니다(행11:25). 한 때 이방인 기독교도를 박해하던 유대교의 골수
분자인 바울을, 이방인 교회의 지도자로 모셔들인 것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너그러운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바울 같은 인물을 인정하고 
존경하는데 인색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반대가 있었을 것입니다만, 그는 반대자들을 잘 설득해서 바울을 
기쁘게 맞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절친한 관계를 맺고 있던 두 지도자가 갈라서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그 발단은 너무도 빈약한 문제였습니다. 바나바의 생질인 요한 마가가 1차 전도여행 때,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2차 전도여행을 계획하던 두 지도자는 요한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로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갈라서고 만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들에는 항상 약점이 노출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투거나 싸우는 것을 구경하는 것은 재미있습니다. 모든 싸움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문제에서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자랑을 하다가 싸움으로 번지고, 커피를 타들고 시험공부를 하는 아이들을 
돌보다가 싸웁니다. 저는 이번 고향 방문에서 그리운 옛 추억들을 많이 떠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동생들과 다투던 일들이 많이 그리웠습니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던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늘 장터같이 복잡했고, 시끄러웠습니다. 동생들과 매제들이 저를 맞는 저녁식탁에 낯선 여인이 앉아있었습니다. 
우리 가족으로 받아달라는 청을 하러왔다는 것입니다. 매달 모이는 남매 모임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요란한 관계이지만 그것이 부럽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나바와 바울의 싸움은 
침묵이 흐르는 무거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어떻게 책임감도 소명의식도 없는 사람을 또 다시 일꾼으로 
세울 수 있느냐는 바울의 주장과, 그래도 한번 실수였는데 너그럽게 받아줄 수 있지 않느냐는 바나바의 주장은 
다 옳았습니다. 이제 한 걸음씩만 뒤로 물러나면 해답이 있을 법 했는데, 그게 안 된 것입니다. 그렇게 
위대한 사도들 역시 어린애 같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연약한 인생에게서 완전함을 기대하지 맙시다.

종종 하나님을 어머니에 비유하곤 합니다. 어머니는 끝이 닿지 않는 깊은 마음으로 우리들의 허물과 약함을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성적이 좋지 않다고,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내치지 않으시고, 못난 것은 못난 대로, 
잘난 것은 잘난 대로 한 없이 넓은 가슴으로 품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앞에서는 언제나 자유함과 
평화가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바로 그런 어머니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들이 완전하고 사랑스러울 
때까지 기다리실 뿐 아니라, 비록 아직은 철부지처럼 말하고 행동할지라도 그래도 똑 같은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지금 우리들이 이런 어머니와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할 차례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용서하고 감싸주는 그런 사랑의 마음 말입니다.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만일 고칠 수 없는 일을 기대한다면 얼마나 힘빠지는 일입니까? 그러나 만일 사랑으로 용납해 줄 
수만 있다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참된 이해와 자유가 그것들입니다. 누군가에게서 온전히 
받아질 수 있다면, 그는 참 자유와 기쁨을 누리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겠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이 귀한 진리를 먼저 듣고 깨달은 사람입니다. 연약한 인생을 완전한 
사람으로 기대하지 말고, 있는 대로 용납합시다. 

사람은 사람들 속에서 부대끼며 살게 마련입니다. 복잡하지만 흥미와 즐거움을 갖고 살수 있는 비결은, 
인간의 연약함을 너그럽게 받아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실천하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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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9월 3일 박성완 목사님의 수요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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