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절 아침에 나눌 인사말입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 사건은 인류의 역사와 미래를 새롭게 만드는 최대의 사건이 되었습니다. 부활절 아침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우리의 눈을 돌리게 만든 은총의 소식을 전합니다.


망자를 위해 향유를 든 여인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관습은 죽어 무덤에 있는 망자에게 향유를 붓도록 하고 있습니다. 
절망을 껴안고 있는 인간의 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장면입니다. 썩어가는 시체의 부패를 막아보겠다는 안간힘을 보기 때문입니다. 절망들 한 복판에서 살고 있는 인간을 바라봅니다. 가난과 질병, 부조리와 부정, 약자와 강자, 인종과 문화의 차별, 이념의 대립, 남과 북, 동과 서로 찢기고 할퀸 절망의 메뉴들이 둘러싸인 그 한복판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들 모습 말입니다. 세 여인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들과 함께 우리들의 한계는 분명했습니다. 썩어가는 시체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딱한 모습이며, 무덤 문을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돌덩이를 누가 치워줄까 하는 한심한 걱정에 사로잡힌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오직 썩을 양식을 위해서 전력투구하는 가엾음이 그 세 여인과 우리들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길을 줄지어 가는 모습들이 보이십니까? 세 여인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둘러 걷는 모습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절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입술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눈은 아래로 무겁게 깔려 있습니다. 부활절 아침의 첫 장면은 절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바꾼 하나님의 승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무덤 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거기 누워 있어야 할 망자는 세마포 한 자락을 남겼을 뿐, 텅 빈 무덤이었습니다. 그리고 대신 천사가 앉아 있었습니다. 뜻밖의 장면이었습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여인들과 함께 우리들 역시 기대된 것이 빗나갈 때, 그것이 좋은 쪽이든 그른 쪽이든, 낭패를 느끼게 마련입니다. 슬픔은 슬픔대로, 기쁨은 기쁨대로 있는 그대로를 껴안고 울고 웃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길들여 온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무력한 죽음 한 복판에 하나님께서 오셨습니다. 악취를 풍기는 무덤을 향유로 막아보려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헛되고 헛된 수고를 멈추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57). 부활절 아침에 우리는 모든 절망의 어두움을 몰아내시는 생명의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 인생에게 포악자로 군림해 온 마귀의 군졸들이 십자가의 사랑으로 도망가는 기적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바로 그 자리에 다시 사신 주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새로운 삶을 향해 살겠다는 자세를 만나야 하겠습니다.

세 여인을 포함해서 우리들 인류에게서 찾게 되는 가장 큰 불행은, 가난과 질병이 아닙니다. 부조리와 불의도 아니고, 슬픔과 죽음도 아닙니다. 참으로 인생을 불행하게 하는 가장 큰 문제는,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는 불신앙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우리들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를 생각하며 한숨을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절 아침에 우리는 다시금“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회복할 신앙이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들을 의지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빈 그물이 찢어지도록 가득 채워졌고(눅 5:5), 말씀에만 의지했던 백부장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마 8장). 우리들이 힘써 살아야 할 새로운 삶이란, 주님의 말씀에만 의지해서 살겠다는 조용한 첫걸음으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 안에 머물겠다는 삶의 자세로 충분합니다. 그는 자신의 말과 행실이 주 안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항상 살펴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을 위해 세우신 꿈과 이상을 바라보며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부활절 아침은 동터오는 새로운 삶을 바라보게 하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절망하는 우리 모습을 다시 바라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만납니다. 그리고 주 안에 허락한 새 삶을 내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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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4월 20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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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스겔서 9:9-10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습니다. 관습대로 유월절 만찬을 드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성경대로 십자가를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옮기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엔 하나님께서 눈을 감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눈을 뜨고 계십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역사가 뒤바뀌듯 하는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 후세인 치하에서 20여년을 살았던 이라크 국민들이 그럴 것입니다. 정신적인 충격이 
심각할 텐데 잘 견뎌내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고 계시다는 믿음 때문에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마사태와 광주사태를 겪으면서, 하나님께서 주무시지 않기를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파도치는 
갈릴리 바다에서 주님이 잠드셨던 것처럼,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을까 해서 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염려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눈을 감으신 적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벨이 의로운 피를 흘릴 때에도(창4:1-12),  야곱이 돌 베개를 베고 잘 때에도(창28:10-19), 
이스라엘이 애급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에도(출3:7-10), 
주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한 사람을 상 주기 위해 바라보십니다(막9:41). 
세상이 모두 잠들고, 사람들은 모두 제 일에 잊어버린 순간에도 하나님은 눈을 뜨고 식물을 
자라게 하시고 (막4:26-29), 온 세상을 두루 감찰하십니다(대하16:9). 
이 세상은 인간의 무대이지만, 그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눈을 감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사건은(22:1-13)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은 눈을 크게 뜨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삭의 가슴에 
칼이 꽂히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말리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고 외마디 소리를 지를 때는 하나님께서 눈을 
감으셨던 것입니다. 역사에 단 한 번 하나님은 그 밝고 빛나는 눈을 감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들이 가장 수치스럽게 죽도록 내버려 두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비정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감으신 이 사건을 두고 복음서 기자들은 
일제히 침묵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어리석은 사람들의 추측하는 말을 옮겨놓을 뿐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눈을 감으셨는지를 침묵하는 하나님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통해 이루려는 또 하나의 하나님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온 세상을 죄와 죽음에서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행동이었습니다(요3:16). 
하나님이 눈을 감으신 사건, 이것은 하나님께는 비극이었으나, 우리 인생들에게는 
소망과 기쁨이 되었습니다. 한 알의 밀이 죽어 열매 맺는 원리를 
친히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눈을 감으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이 눈을 감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에 포로된 백성들에게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이 뽑으신 민족, 할례로 언약을 세우시고, 율법을 맡겨주신 민족이 뜻모를 시련을 겪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으로 눈뜨고 볼 수 없도록 죄를 먹고 마신 
때문이었다고(렘 8:5-13) 고발합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눈을 감기게 만들었습니다. 
강포하고 무정한 행위도 하나님의 눈을 감기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눈이 감길 때, 거기에는 
시련과 고통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는 쓴 뿌리가(신 29:18, 
히 12:15) 내리고 있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병든 정신을 걱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보다 탐욕에 어두워진 생활을 염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잠시 잠깐이라도 
눈을 감으실까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포로에서 귀환했던 한 유다인은 하나님을 <지키시는 분>으로 고백했습니다(시121:3-8).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지키실 때에만 참 평안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눈을 뜨고 지켜보신다는 믿음은 우리를 경건하고 근신하며 살도록 안내해 줄 것입니다. 
깨어있는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눈을 뜨고 계시기를 부단히 간구하는 신앙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눈을 감으신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픔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눈뜨심이 있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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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4월 13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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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한복음 12:20-33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깊이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에 대해서는 낯설어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십자가와 죽음과 잘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이 가르치는 교훈보다도 
더 적절한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한 알의 밀 비유>는 위대한 죽음을 주목하게 합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는 대부분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주는 교훈도 그런 진리들 중의 하나입니다. 튼실한 씨알을 상상해 보십시오. 
밭에 심겨진 씨알이 흙에 묻혀 죽게 될 때, 거기에서 수백 개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그 씨알이 죽지 않고 그대로 살아있다면 아무 열매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도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죽음의 미학이 있습니다. 죽음이 가르치는 
위대한 진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죽음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죽음을 비극이라고 한다든지, 죽음은 모든 것을 
단절시키고 만다든지 하는 고정관념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잘못된 것으로 
정죄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죽지 아니하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순절에 죽음에 대한 새로운 차원이 있음을 깨닫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죽음은 절망이나 비극이 아니라는 것, 죽음이 모든 것을 단절시키는 것은 더욱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오히려 죽음은 더욱 더 풍성한 관계를 맺게 하는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이며, 새로운 삶을 열어주는 첫 단계라고 말입니다. 


<한 알의 밀 비유>는 영원한 생명을 주목하게 합니다.

인간을 초라하게 하며 두렵게 하는 문제 중의 문제는 죽음에 대한 잘못된 통념입니다. 
저는 죽음에 직면한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겁에 질린 얼굴도 있었고, 
반대로 평화로운 얼굴도 있었습니다. 전자는 죽음을 절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후자는 죽음을 새로운 생명의 출발로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신자의 죽음과 불신자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에 대해서 
우리들이 가져야 할 자세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25절). 죽어야 할 육신에 
애착을 두지 말고 오히려 냉정할만큼 내던지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리려 죽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삶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말입니다.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준비하는 것은, 
더욱 충실하고 값지게 살려는 의지를 갖게 해줄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눈을 
더 크게 뜨게 해 주는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지려는 십자가의 죽음은, 
한 알의 밀알 같은 죽음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절망이 아니라 영원한 소망이며,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을 탄생하게 하는 위대한 새 역사의 출발점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첫 관문이며, 
영생을 알리는 서곡이라고 말입니다.


<한 알의 밀 비유>는 감격적인 삶을 주목하게 합니다.

전쟁의 포화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경시되는 슬픈 현실입니다. 
유명 배우가 자살을 했다고 하며,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암살되었다는 헛소문도 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삶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에 대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생명은 <한 알의 밀>이 죽어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태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사람의 탄생은 생물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라고 말입니다. 
육신을 가졌기에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 때문에 기뻐할 수 있고, 삶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어디이든지 간에, 
우리가 사랑과 소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사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신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갈 2:20).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더 이상 죄와 죽음의 공포아래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허락된 
은총의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 모두는 감격적인 삶을 누릴 특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매일 매 순간 적극적인 자세로 삶을 노래할 사람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기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한 알의 밀 비유>는 십자가에 죽으실 우리 주님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감격적으로 살게 하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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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4월 6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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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베소서 2:4-10

중세 교회가 직면했던 위기는, 인간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냐 아니면 사람의 
공로로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인간의 힘으로 구원받으려는 
공로주의자들이 많습니다. 
기독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사람을 살립니다. 

 

구원을 위해서 인간은 철저하게 무력합니다.

여러 종류의 구원이 필요합니다. 가난과 질병에서, 죄와 죽음에서,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의 구원입니다. 어느 정도 인간의 노력으로 가난과 질병을 이길 수 
있습니다만, 죄와 죽음,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는 단 한 걸음도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정하고 인간 
힘으로 구원의 길을 개척하려는 헛된 시도가 있어왔습니다. 선행으로, 율법을 
지킴으로 말입니다. 이런 사상과 가르침은 초대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도 있었으며, 
지금도 그 뿌리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과 가르침은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비웃는 가장 큰 죄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무시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위기를 경험하였습니다. 바로 중세시대 때의 일입니다.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고, 
교회당을 세우고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에 공헌하는 사람들은 자신 뿐 아니라, 
죽은 조상들까지도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길 수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거짓이며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선행이나 율법준수가 나름대로 좋은 
것이지만, 인간의 공로가 될 때, 구원을 위해서라면 지푸라기보다 못한 것입니다.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보다 더 중요한 주제가 없습니다. 거기에서 기쁨과 소망이 시작되는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나 깨나 우리가 받은 구원을 생각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우리들 인간의 공로나 선행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분명히 믿음도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지각이나 의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놀랍게도 우리를 
믿음 가운데로 불러주셨고, 인도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서 
우리들이 한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자랑하지도 
교만하지도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른바 작은 믿음이든 큰 믿음이든 모두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직 그 귀한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고 
있음을 찬양할 뿐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도록 
무조건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것은 가장 지혜로운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종교를 율법의 종교로 바꾸지 맙시다.

바리새인의 신앙은 언제나 인간 중심적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자신만이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자신의 행위를 주목하고 자랑하며 거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자신의 행위만을 주목하는 결과입니다. 이런 바리새인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적이었습니다. 
정죄보다는 용서와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어찌 허물이 없고 잘못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자칭 의인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의를 열거합니다. 이레에 두 번씩이나 금식한다고, 세리나 
창녀들과는 확실히 의롭게 살고 있다고 말입니다(눅18:9-12). 
물론 행위만 비교한다면 자랑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욕되게 만들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좁쌀만큼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율법적으로 남을 정죄하는 
바리새 신앙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형제자매들 가운데서 
더욱 넘치도록 힘쓰고 기도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의 행위나 공로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은혜아래서만 참 자유와 기쁨을 누릴 뿐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나 행위는 사람을 주목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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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 30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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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체로 법과 규칙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법은 피할 원수가 아니라, 가깝게 지내야  할 친구여야 합니다. 법은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서 질서와 풍요를 주는 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은 여전히 현대인들에게도 풍성한 삶을 약속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2. 십계명은 참된 질서와 평화의 보루입니다.

지금 우리는 불행한 전쟁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대학생과 유치원생이 싸우는 전쟁이라고 비유합니다. 10년 이상 경제제재를 받은 
이락은 생존을 위해서 화학무기 개발에 힘써왔다는 것입니다. 전쟁을 시작한 미국은 
자국내에 떨어질지도 모르는 가공할 무기를 가진 이락을 무너트리지 않으면 
불안해서 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논리는 언제나 평안과 질서였지만, 사실은 힘센 자의 횡포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전쟁은 사악한 일이고 무법천지를 상징합니다. 이런 세상을 위해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십계명은 참된 질서와 평화를 
보장하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최후의 보루입니다. 그래서 법은 만민 앞에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배경은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생활입니다. 
자칫 혼란과 무법천지로 치닫을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엄격한 법만이 그들을 
안심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항구적인 평화와 
질서를 위해서 십계명을 제정하시고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되는 십계명은 인류가 
평화롭게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3. 십계명은 근본적으로 풍성한 삶의 약속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바라고 있습니다. 좋은 이웃들과 나라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소박한 꿈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규범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지킬 때, 그는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지킬 때, 그는 육신적으로도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십계명의 바탕에는 온갖 축복이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십계명의 정신을 곡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보다는 자기 중심적인 생활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풍성한 삶의 
지름길처럼 생각한 때문입니다. 얼마나 빗나간 생각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주변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까? 그런 분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누군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십계명의 정신을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필요하다면 도움을 주려고 힘씁니다. 언뜻 보기엔 손해를 
보는 것 같고, 희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신을 진정으로 위하는 일이며, 
행복한 삶을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사순절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절기입니다. 십계명의 정신을 실천함으로 
우리 이웃들을 주목하는 행복을 나누는 풍성한 은총의 계절입니다. 

4. 십계명은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우리의 과제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순종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설교를 귀로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에서 적용하는 설교가 
되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여러분은 설교를 듣지 않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십계명은 얼마나 잘 알고 기억하느냐로 충분한 말씀이 아니라, 반드시 우리들의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할 과제입니다. 
<하늘나라 프로젝트>라는 활동에 참가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와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자는 운동을 말합니다. 
그는 회사로 출근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할까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아내는 불쌍한 한 가정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정을 위해서 기도를 시작합니다.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를 친구들에게 
자문을 구합니다. 그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놀라운 힘을 느낍니다.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용기와 담대함이 그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에게 사랑의 마음으로 
손을 내밉니다. 상상할 수 없는 열매들이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절망 속에 살던 
한 가정을 구원할 뿐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자신 역시 
행복한 삶을 찾아낸 것입니다. 
십계명은 우리가 지킬 희망의 과제입니다.

5. 십계명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풍성한 삶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지혜와 힘을 합해서 십계명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되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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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 23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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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가복음  8:31-38

사순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난을 묵상하기에 적절한 계절입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 뿐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는 어두운 주제가 아니라 
밝은 주제입니다. 십자가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보는 두 견해가 있습니다.

베드로의 견해가 있는데, 우리들과 비슷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겉모습만을 보는 
견해입니다. 아픔과 치욕, 형벌과 실패로 보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견해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십자가의 깊은 의미를 보는 견해입니다. 
그것은 기쁨과 영광 그리고 완전한 승리입니다. 십자가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이처럼 엄청난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막노동을 하는 남편을 보고 창피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잘난 다른 남편들과 
비교할 때 못났다고 생각하는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성실하게 
일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게 아니라, 도리어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잘못된 풍조에 떠밀려 다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원대한 구원계획을 가지시고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어리석은 길도 실패의 길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세상이 사는 길이고 하나님과 함께 승리하는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이 없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고난의 땀을 흘려야 기쁨의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입니까?

십자가는 죄에 무력한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바울 사도는 한 가지 귀중한 깨우침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달리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겠다고 말합니다. 루터는 
이 구절을 해석하기를, 자신은 예수님의 여러 모습 중에서 십자가에 달린 모습만을 
제대로 알려고 한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다 알 수도, 제대로 알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중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은 꼭 알아야 하겠다는 것이 바울의 깨우침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이 우리가 주목하면서 살아야 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깨우침 뒤에는 바울 사도의 신앙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활동은 
바로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방법이면서 동시에 우리들 인생이 짊어진 모든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들을 대신해서 
죄의 값을 지불하신 것입니다. 유월절 저녁에 문설주에 바른 양의 피가 그 집 
사람들을 다 살려낼 수 있었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죽어야 할 사람을 살리는 가장 
확실하면서도 가장 적절한 방법이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당신의 아들에게서 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방법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맡겨져 있습니다.

십자가 지기를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저마다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성도가 질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기쁨으로 짊어진다는 점에서 
언제나 밝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자신을 살려준 주님의 십자가의 가치를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며칠 전에 한 평신도를 만났습니다. 그 분은 가난과 질병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과 지혜를 
그런 사람들을 돕는 일에 사용하려고 결심하신 분입니다. 안정된 직장, 단란한 가정, 
사회적인 보장, 어느 하나도 부족할 것이 없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하나님께 받은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죽음 같은 깊은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육신이 살아난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영원한 생명이 
다시 살게 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사는 것이 참으로 사는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짊어질 작은 십자가를 충실하게 짊어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천하보다도 더 소중한 예수님의 피 공로로 살게 된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모양이든지 자신의 십자가를 
기쁘게 짊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루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이 세상 전부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분의 피 한 방울로 우리가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랑의 위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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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 16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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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서 8:31-39

사람은 구원을 소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이 사람 자신의 노력이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라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이 주제는 우리들이 반드시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받은 최상의 선물입니다.

 

사랑은 감상적인 것만이 아니라 삶의 동력입니다.

사랑이란 젊은이들의 전유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사랑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일에 대한 사랑으로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부어야 하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환란과 고통과 핍박, 
배고픔과 헐벗음, 그리고 온갖 위험과 전쟁가운데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먹어야 살수 있는 존재입니다. 사랑이 주는 힘은 셈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위대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위대한 사랑을 나누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현실입니다. 
전생의 원수 운운하면서 부부들은 싸울 일만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이 주는 엄청난 힘을 서로 북돋기는커녕 내다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할 뿐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사랑 대신에 미움을 키우고 있으며 마침내 미움의 끝인 
파멸로 치닫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살게 하는 힘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과 세상을 바라볼 때 
아름답고 활력에 넘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들의 정신과 육신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는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영원한 것이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서서히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하면서 사랑도 예외가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것이며, 우리들이 세상에서 경험하거나 
이해하고 있는 사랑과는 전적으로 다른 사랑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정신을 차려서 배워야 할 주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은총이라고 말씀합니다. 
은총이란 주고받는 사랑과는 구별됩니다. 사랑받을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넘치도록 베풀어 주시는 사랑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사랑하셨습니다(요3:16, 롬5:8).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긍휼입니다. 마땅히 벌 받아야 할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길이 참으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는 사랑을 뜻합니다(롬11:30,32).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원천이십니다(요일4:8). 하나님은 사랑으로 
만물과 우리들 인생을 지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풍성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조물주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사람들이 자연을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이런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들과 세상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이라는 우리들 역시 많은 낙심과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낙심하거나, 너무 많은 생각으로 염려합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선한 일이 실패할까 두려워하며, 의를 위해서 고난당할 때 
실망합니다. 주님의 일꾼으로 수고하는데도 불구하고 시련이 떠나지 않을 때 
작은 믿음까지도 흔들립니다. 
어쩌면 자연스런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들에는 중요한 사실이 
빠져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것으로 소유해야 합니다. 
저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들에게 당부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고 계심을 
믿고 의지하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흐르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십시오. 그것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따뜻한 한 마디 말을 나누는 일입니다. 
가냘픈 손을 잡아주는 일이며, 위로와 소망을 함께 나누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넓게 자리 잡고 계시도록 초청해야 합니다. 
주님 제 안에 좌정하십시오. 그리고 풍성한 주님의 사랑으로 
생각과 말과 행동을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행한 대로 보응치 않으시는 긍휼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사랑을 끊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베풀어 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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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 9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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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왕기하 2:1-12a

사람은 희망의 존재입니다. 
꿈을 가지고 있는 한 어떤 처지에서도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런 꿈의 원천은 하나님께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에게서 그 꿈을 찾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일꾼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그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엘리사는 높은 꿈을 꾸고 살았습니다.

엘리야는 주전 9세기 북 왕국 아합 시대에 활동했던 예언자로 바알숭배가 절정에 달했던
때에 갈멜산 상에서 850명의 바알 제사장들과 혈혈단신으로 신앙대결을 펼쳐서 
승리했던 장본인입니다. 그후로도 왕과 왕후의 눈을 피해서 평생을 도망자처럼 힘겹게 
살면서도,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가르쳤던 정통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불의에 항거하였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핍박과 죽음의 위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엘리야에게 살아서 승천하는 명예를 안겨주시려고 했습니다. 엘리사는
이런 스승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 역시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섬기는 일꾼이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너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밖으로부터 오는 은총을 받는
일이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승 엘리야와 하나님에게서 받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자신의 꿈을 이루기도 전에 스승은 떠나시려고 합니다.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가시려고 합니다. 
엘리사의 꿈은 어디에서 이룰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는 단 한 걸음도 스승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꿈은 꿀 뿐 아니라, 성취해야 합니다.

엘리사에게서 우리는 꿈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불퇴전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는 스승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승은 
영원히 떠나가시려고 하십니다. 엘리사는 단 하나의 방법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결사각오로 스승을 떠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세번씩이나 뿌리치는 스승을 
붙들고 매달립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꿈만 꿀 뿐,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필요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꿈은 꿈일 뿐입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일어서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엘리야는 이 진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 그런 자세로 일생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 선생에 그 제자였습니다. 스승은 제자의 확고한 마음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무엇을 찾고 있느냐? 
엘리사의 꿈이 이루어질 순간이 왔습니다. 엘리사는 꿈만 꾸지 않았습니다. 꿈이 이루어질
절체절명의 기회를 만들어냈습니다. 그는 오래 전에 준비해 두었던 꿈을 고백합니다.
당신이 가진 영감을 갑절이나 달라고 말입니다. 너무 엉뚱하지 않습니까? 
영감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일인데, 어찌하여 엘리야에게 구합니까?
영감을 받은 자만이 영감받는 비결을 알고 있었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고 계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사와 같은 불퇴전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들 역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그 소망을
이루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행동하며 살고 있습니까? 꿈이 아름답고 고귀하면 할수록
그외에 다른 아무것도 비교될 수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불퇴전의 자세로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돈 땅에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마태 15:21-28). 병든 딸을 고쳐보겠다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과 예수님은 매몰차게 거절합니다.
개 취급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불퇴전의 자세로 소망을 이루려는 여인을 극찬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꿈을 이룰 뿐 아니라,
큰 믿음의 본으로 두고두고 귀감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런 불퇴전의 자세로 꿈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남김없이 은총을 베풀고 싶어 하십니다. 
엘리사는 갑절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요단 강물을 갈라지게 하였고(왕하 2:13-14),
가난한 제자의 아내에게 기름을 만들어 빚을 갚게 하였으며(왕하 3:20), 
사렙다 지방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렸고(왕하 4:35),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쳤고(왕하 5:14), 
물에 빠진 도끼를 떠오르게 하였습니다(왕하 6:6).

우리는 지금 무슨 꿈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엘리사와 같은 멋진 꿈과, 그 꿈을 이루려는 불퇴전의 자세를 갖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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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 2일 박성완 목사님의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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