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749(2025. 4. 30. 수요일).

시편 118:25-27.

찬송 20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좋은 습관은 기적을 만들지만, 나쁜 습관은 파멸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나쁜 부모가 있을까 의문을 품는다. 나쁜 부모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 넘치는 사랑과 필요하다면 희생까지도 아끼지 않는다. 문제는 그런 부모의 뜻을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진다는 점이다.

 

2. “새로운 계명2(12-17)”을 읽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사도 요한이 쓴 편지입니다. 그 대상은 사랑하는 자녀들, 아버지 된 사람들, 젊은이들, 그리고 어린 자녀들입니다. 한 편지 안에 다양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썼다는 것부터가 특이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비록 처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함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특정 대상 한 부류만이 아니라, 다양한 부류의 대상에게 권고하는 내용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까지도 함께 돌아보며 공유/共有할 필요가 있어서 라고 말입니다. 첫 번째 대상한 사랑하는 자녀들이여는 남녀노소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의 용서를 받았음을 선언하는 의미를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크리스천들 가운데는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사람들이 매우 적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죄로부터 용서받은 사람다운 모습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죄가운데 머물고 있는 자신의 모습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이 점을 강조하였는데, 이른바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용어를 가르친 것입니다. 두 번째 대상은 아버지 된 사람들이여입니다. 적어도 자녀를 둔 아버지로써는 하나님께서 창조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실제로 크리스천들 가운데는 하나님에 대해서 막연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크리스천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우리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창조주 신앙은 우리들 신앙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 대상은 젊은이들이여입니다. 젊은이들은 뜨거운 피와 불타오르는 신앙으로 마귀와 싸우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힘이 넘칠 때와 힘이 사그라질 때가 있는 것을 경험합니다. 대부분의 위인들이나 순교자들은 그들의 젊은 날에 이룩한 역사들이었습니다. 네 번째 대상은 어린 자녀들이여입니다. 우리들의 어린 시절은 부모에게 위탁된 때입니다. 부모의 신앙과 삶이 자녀들에게 계승되는 때문에, 좋은 신앙의 부모를 두었다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편지의 발신자인 사도 요한은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 공동체에게 전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교회를 구성하는 부름 받은 신자들(교회)는 죄로부터 용서받은 사람들이라는 점을 항상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당에 들어갈 때, 세례대의 생수를 손가락으로 찍어 이마와 양쪽 어깨로 번갈아 가면서, 용서받은 죄인인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의식인지 모릅니다. 나는 용서받은 죄인이다 는 심정으로 기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이 세상 한 가운데 계셔서 세상을 섭리/攝理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비록 거센 비바람과 풍파와 난리가 그치지 않는 불안하고 두려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말입니다. 그리고 악마와 싸워 날마다 승리하는 기적을 맛볼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롭고 신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기도하고 가르쳐 주시는 부모님의 신앙을 따른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은총인지를 새삼스럽게 감사하면서 말입니다. 저는 닷새 후에는 아홉 남매가 부모님의 추모일을 기념하여 모임을 가지려고 합니다. 틀림없이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신앙에 대해서 감사하는 기도와 말씀들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가정에서 심어지고 자라며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악한 부모란 없습니다. 언제나 위대한 부모가 있을 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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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48(2025. 4. 29. 화요일).

시편 118:22-24.

찬송 50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내게로 와, 나의 이름을 불러주며, 당신을 증거하라 부탁했네. 저 가난한 이에게 복음을 주며, 죄인은 자유를 얻게 되며, 눈 먼 사람 볼 수 있고, 얽맨 자 풀려진다. 너 가서 외치라, 그 나라가 땅위에 왔다고, 너 가서 외치라 참 자유를 주노라고.” 70, 80년대 불려졌던 H. Richard가 곡을 쓴 복음가입니다.

 

2.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그리스도(1-6)”새로운 계명(7-11)”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저의 80년 삶에서 올해만큼 법정 장면을 매일 보게 되는 일은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검사의 논고와 변호사의 여러 가지 진술들 그리고 참고인으로 나온 증인들의 증언들을 통해서 한 인간의 삶이 이렇게 여과 없이 송두리째 까 발라지는 것을 보면서 훗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어떤 장면으로 비춰질까 아찔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만평에 천국 입구에서 긴 줄이 있는 것을 보고 찾아가 보았더니 우리 한국 여성들의 줄이었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에 비해서 너무 길다 해서 물어보니까, 천국에 비치되어 있는 사진과 너무 다른 모습들이어서 그것을 대조하는데 시간이 너무 걸린다는 얘기였습니다. 한번만이 아니라 여러 번 공사/工事를 해서 더욱 어렵다는 천국 문지기의 말에 실소/失笑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읽는 성경에는 별의 별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쓸데없는 내용은 하나도 없다는 게 성경학자들의 주장입니다. 다만 우리들이 구원받기에 필요한 말씀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주장은 새겨들을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들 모두는 머지않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텐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말씀은 우리들에게 해박한 그러면서도 정확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우리의 삶과 신앙을 변호해 주실 변호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라고 오늘 말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분은 의로우신 분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친히 제물이 되셨는데, 우리 뿐 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화목제물이 되신 분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세계에서 이른바 의식교회/儀式敎會(로마 가톨릭교회, 정교회, 루터회, 성공회)에서는 예배의 말미에 반드시 예배 인도자와 회중 사이에 나누는 인사가 있습니다. “이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세상으로 나갑시다.”, “하나님께 감사드리세.”가 그 인사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는 확인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대로 은혜받기 위해서 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받은 하나님의 은총을 세상과 나누어야 할 과제와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인사말 때문에 우리 기독교회는 지난 2천 년간 복음의 핵심을 유지할 수 있었고, 교회가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풍요의 시대를 살게 되기까지 기독교의 영향이 대단했습니다. 교육과 의료 사업 그리고 사회복지 등이 교회의 활동영역이다 보니까, 세상은 이를 환영하였고, 교회 또한 부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부흥과 성장에 큰 성공을 거두게 되자,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회까지도 초라하게 빛이 바래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의미가 성공과 출세라는 장벽에 멈추고 만 것입니다. 복음의 의미는 세속적인 성공과 출세가 최종 목적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처음부터 복음은 우리 인간을 인간다운 삶을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익부 빈익빈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의 가치관을 새롭게 배우고 실천할 운동이 필요해졌습니다. 아메리카 퍼스트! 라거나 한국 퍼스트! 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온 세상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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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47(2025. 4. 28. 월요일).

시편 118:19-21.

찬송 42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절반의 진실은 완전한 거짓보다 더 무섭다.” 오스트리아의 시인 포히터슬레벤이 남긴 명언이라는데, 작금 우리 사회에서 떠다니고 있는 유령 같은 가짜 정보에 식상한 사람들이 충분히 공감할 말이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이 죽었다고 하질 않나, 잘 살고 있는 부부를 이혼했다고 온갖 악담을 퍼붓는 유튜브가 그 진원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시간을 두고 기다려볼 일이다. 그래야 절반의 진실에 현혹당하지 않고 제대로 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2. “생명의 말씀(1-4)”하나님은 빛이시다(5-10)”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젊은 날에는 빛 보다는 어두움이 좋았습니다. 고단한 육신이 쉴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은퇴하기 전까지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은퇴를 하고 시골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처음 몇 해를 제외하고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단하지 않아서인지 많은 쉼이 필요 없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밤이 너무 길다 생각했고, 빨리 아침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빛과 어두움의 창조자가 하나님이시라 말씀합니다. 그리고 둘 중 어느 것을 더 낫다고 앞세우지도 않습니다. 빛은 빛대로, 어두움을 어두움대로 좋은 점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말씀이시다.” 또는 하나님은 생명이시다.”는 구절들과 함께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말씀입니다. 빛과 어두움은 그 자체로는 귀하고 중한 가치를 가진 것들입니다. 문제는 그 빛과 그 어두움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 가치가 바래거나 나쁜 이미지를 덮어씌운 것입니다. 성경에는 마귀 또는 사탄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어두움을 악용해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안겨다 주었고, 여러 가지 슬픔과 비극들을 몰고 온 것입니다. 어두움 속에서 수군거림이 쉬워졌고, 각종 음모와 무서운 모의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결과 마치 어두움이 문제가 있는 것처럼 책임을 전가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환한 빛 가운데서도 이런 무서운 음모와 작당들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빛의 위력조차도 어두움의 세력들을 이겨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에서도, 그리고 신성하다는 법정에서도 어둠의 음모는 진행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은 빛이시다 는 이 말씀을 심각하게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빛에 관한 성경의 첫 번째 말씀은 창 1:3에 나옵니다. 히브리어로는 두 가지 낱말이 사용되는데 첫째는 오르(אוֹר)라는 명사인데 구약성경에 120-133회 사용되고 있다 소개합니다. 두 번째는 노가흐(נגהּ)라는 명사입니다. 그런데 이 두 낱말은 서로 구별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 예가 이사야 60:3입니다. "열방은 네 빛(오르)으로, 열 왕은 비취는 네 광명(노가흐)으로 나아오라" 라고 하십니다. 요한서신의 저자 요한이 살던 1세기의 이스라엘과 소아시아는 영지주의와 같은 헬라 철학의 영향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빛과 어두움 같은 이원론이 보편적인 사고라고 볼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원론에서는 진리와 거짓, 선과 악 그리고 영과 육처럼 전혀 상반되는 두 종류의 물질이나 가치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빛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고, 우상을 따르는 사람들은 어두움의 자녀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사고방식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편리한 기준이 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의 한 사람인 요한은 교우들로 하여금 어두움이 아니라 빛 가운데 살아갈 것을 강하게 주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칫 이런 강조는 도덕이나 윤리적인 측면으로 기우는 경향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우리 자신의 의로움이나 도덕이 아니라, 예수의 피로 씻어지는 것만이 하나님의 빛가운데 거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죄의 씻음은, 우리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죄씻음에서 온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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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46(2025. 4. 27. 부활절 둘째 주일).

시편 118:16-18.

찬송 22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한 눈먼 사람이 소리쳤네. 한 눈먼 사람이 소리쳤네. 한 눈먼 사람이 소리쳤네. 어디가 길이냐 말해다오. 예수님 그에게 대답했네. 예수님 그에게 대답했네. 예수님 그에게 대답했네. 내가 곧 길이오. 내게 오라.” 복음가의 한 구절입니다. 쉽게 부를 찬양이 아니라, 오히려 깊은 사색과 결단이 필요한 가사입니다.

 

2. 부활절 둘째주일의 사도서간은 계 1:1-8세상 모든 성도들이 들어야 할 경고.”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요한 사도는 성령님을 통해서 세상 모든 교회가 반드시 들어야 할 경고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계시록의 줄거리입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들어야 할 하나님의 경고에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감춰져 있던 하나님의 비밀을 밝히는 까닭에 대해서 묵상해야 합니다(1-3).

계시/啓示 혹은 天啓/란 오랫동안 감춰져 있던 비밀을 밖으로 드러낸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계시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계시하셨고, 그 다음에는 제자인 요한에게 계시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계시의 정통성과 진정성을 밝히는 내용입니다. 그 까닭은 세상에는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까지도 너무나 오염되었고, 가짜 정보가 판을 치고 있는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시의 전달자가 된 요한은 이 계시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과 자신이 본 것들에 대해서 증언하겠다고 언급합니다. 그러니까 요한 자신의 계시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에 관해서만 밝히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증언하려는 내용은 자신의 창작물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것만을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시의 증언을 듣고 삶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강조합니다. 행복의 비결이 예 있다고 말입니다.

 

세상 모든 교회가 들어야 할 계시의 중심주제는 경고의 말씀입니다(4-5).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등장하는데, 이는 특정한 그 역사적 교회를 지칭/指稱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교회를 분류한 말씀입니다. 교회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는 하나님의 백성들/εκκλνσι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속 좁은 인간들처럼 세계 최고의 교회를 지향/指向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내가 속한 교회는 어떤 부류에 해당되는가에 주목하면 충분합니다. 첫 번째 에베소 교회는 첫 사랑을 잃은 교회들을 경고합니다. 둘째 서머나 교회는 환란을 겪고 있으나 죽기까지 충성하는 교회가 되라 하십니다. 세 번째 버가모 교회는 사람들을 죄짓게 하고 잘못 인도하는 것을 돌이키라 명령하십니다. 네 번째 두아디라 교회는 우상숭배로 썩어가는 것을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섯 번째 사데 교회는 무력한 채 죽어가는 교회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섯 번째 빌라델피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 면류관을 끝까지 사수하라 격려합니다. 일곱 번째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청산하고 분명한 자세를 요구하십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심판주께서 곧 오실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6-8).

성경의 종말/終末에 관한 말씀을 오해하거나 곡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에는 3가지 종말을 말씀하는데, 임박한 종말(-), 실현된 종말() 그리고 미래적 종말()입니다. 3가지 종말은 다 옳습니다. 그 중 임박한 종말이 가장 오해와 곡해에 빠졌다 하겠습니다. 곧 심판의 날이 온다는 가르침은, 온 세상의 파국을 가리키는 미래적 종말이 아니라, 우리 각 개인의 죽음으로 인한 종말을 뜻합니다. 모든 사람은 죽어야 하고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죽음의 요단강을 건너야합니다. 그런데 그 죽음의 강은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 순간을 마지막 날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날까지 주님과 동행하기를 기도하고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길 외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오 주여, 나를 도우소서 !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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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45(2025. 4. 26. 토요일).

시편 118:13-15.

찬송 41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깊고도 넓도다 깊고 넓은 샘물 흐르네. 깊고도 넓도다 깊고 넓은 샘물 흐르네.” 1970년대 교회에서 소창으로 많이 불렀습니다. 대구대학에 재학 중인 열 명의 시각장애 대학생들과 지리산 뱀사골로 하루 소풍을 갔을 때, 그들은 높고 낮고 깊고 너른 개념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걸 알게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정상인은 알 리 없을 겁니다.

 

2. “법정에 선 베드로와 요한2(13-22)”을 읽었습니다. 변화가 없는 일상은 매우 단조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골 생활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목해서 바라보면 모든 주위환경은 날마다 새롭게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잔디밭의 잡초는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자라납니다. 그래서 사 나흘이 되면 반드시 뽑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채전의 상추와 부추 역시 빠른 속도로 자라나서 기쁨을 배가해 줍니다. 엊그제 피었다 생각한 목련꽃과 수선화가 지자, 이번에는 철쭉이 보라색 연분홍 그리고 백색 등 서로 자랑이라도 하듯 야단법석을 떨면서 피어납니다. 둥글 레 꽃망울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꽃잔디는 여름 내내 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이제 라일락이 꽃망울을 맺고 있고, 내일 모레 쯤이면 작약 꽃이 입을 벌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삶에서 변화는 축복입니다. 아침 햇살이 어둠을 몰아내고, 검은 구름이 푸른 하늘을 덮어줍니다. 잔잔하던 공기를 거센 바람이 소용돌이를 몰고 옵니다. 비가 오고 햇볕이 내리 쬐이고 눈이 내립니다. 나뭇잎도 연둣빛에서 파란 빛으로 그리고 노란 황금색으로 옷을 갈아입습니다. 채전의 식물들도 저마다 제 길을 가겠다며 앞 다투어 키 재기를 합니다. 시골 생활 17년이 되었지만, 감사한 일상을 누리고 있습니다. 봄철은 나이 드는 사람에게는 더 없이 좋은 일상입니다. 산새들과 산비둘기가 매일 찾아와 주고, 아랫집 강아지가 짖으면 온 동네 개들이 합창을 합니다. 오늘은 또 다시 법정에 서 있는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들 삶도 평온하지만 않은 것 같습니다. 의지와는 다르게 강요된 대답을 해야 하고, 때로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억지소리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 인생은 불편과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법정에 세운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고민이 생겼습니다. 무식한 어부 출신으로만 생각했던 그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스마트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로 대책을 세웁니다.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 것을 예루살렘 사람들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만 경고를 해서 쫓아냅시다.” 그러나 제자들은 단호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게 하나님보시기에 옳은 일인지 한번 판단해 보시오.” 라고 말입니다.

     서슬 퍼런 법정에서 그것도 중인환시/衆人環視 속에서 저 같은 입도 뻥긋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하였습니다. 입안에서만 맴도는 그런 숫기 없는 촌뜨기가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당당하게 한 마디 한 마디를 외쳤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사람들이 수천 명이었고, 설교를 듣는 회중의 수는 5천명 정도였다 하였으니(4:4), 아무리 백성의 지도자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두 제자가 받았던 심문은 세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첫째는 무슨 권한으로 그리고 누구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고쳤느냐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준비되었다는 듯이 대답하였습니다. 저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앉은뱅이에서 건강한 사람으로 바뀐 것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그리 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나사렛 예수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바로 그 분입니다. 둘째는 절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엄히 명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분명히 거부의사를 밝힌 것입니다. 아산시 영인면 공세리에 있는 공세리 성당에는 병인박해 때 32 분의 순교비와 함께 박씨 3형제(의서, 원서, 익서)의 순교비사도 기록되어 있는데, 죽음이 코앞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순교의 제물이 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고백한 맏형 박의서의 고백은 우리가 배워야 할 신앙의 장엄함과 고결함을 가르치고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자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깨우치고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744(2025. 4. 25. 금요일).

시편 118:10-12.

찬송 25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용한 점쟁이라도 미래를 정확하게 내다볼 수는 없다. 미래에 관한 한 모든 인간은 장님과 같다. 모르면서, 짐작도 하지 못하면서, 그래도 우리는 계속해서 다음 모퉁이를 열심히 돌고 돈다. 이것은 관성이나 습관 때문만이 아니다.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다. 다음 모퉁이를 돌면 현실의 아픔을 싹 씻어주는 새로운 희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면서 걸어간다.” 희망씨, 가슴에 새기는 한 줄 명언, p.4.

 

2. “법정에 선 베드로와 요한(1-12)”을 읽었습니다. 요즘은 법정 구경이 일상처럼 되었습니다. 별을 단 장성들이 재판을 받는 모습이나, 총리나 장차관 그리고 심지어 대통령까지 재판을 받는 모습이 일상처름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법정에 가서 앉아보면 왠지 모르게 내가 죄인이 된 듯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아마도 들어가는 절차에서부터 사람의 기운을 쏙 뽑아놓는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법정에 소환되어 심문을 받는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산헤드린 법정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와 생활에 관계된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시시비비를 논하는 자리로, 형사적인 권한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소개하는 산헤드린 법정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엄포를 놓을 뿐 아니라 채찍과 온갖 수모를 겪게 할 뿐 아니라,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끔찍한 말들을 서슴지 않고 떠들어대곤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에게는 사형을 전제로 하는 형사재판을 빌라도와 헤롯에게 요청한 일도 있었습니다. 중세기의 종교재판을 연상하게 하는데, 21세기인 작금에도 아랍 세계에서는 이런 종교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문제는 한 인간의 신념이며, 그 어떤 누구도 그 신념을 강제로 체벌/體罰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자신의 견해와는 상반된다 할지라도,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는 다른 재판과 동일하게 취급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솔로몬 행랑에서 설교하고 있을 때, 제사장들과 성전을 지키는 시위대장 그리고 사두개파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가 부활했다는 증언에 대해서 분노해서 그들을 붙잡아 이틀씩이나 감옥에 감금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심문하기를,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했느냐고 앉은뱅이를 고쳐준 일에 대해서 따졌습니다. 베드로는 성령으로 충만해서 대답하였는데,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는 마치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과 같았으나, 그분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으로, 그분을 힘입지 않고는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며, 우리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예수 이름밖에 없다고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종교적인 박해 뿐 아니라, 정치적인 박해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두려움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모든 종교가 갖는 신앙이란 이런 결심이 있지 않고서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타 종교인들에게서도 이런 결기를 볼 수 있습니다. 신라시대의 이차돈이라는 승려가 순교함으로 불교가 공인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법흥왕 14/527), 1095년부터 1456년까지 360여 년간 기독교와 이슬람 교도들 사이에 벌어졌던 십자군 전쟁에서는 무려 800만 명이라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잃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동남아시아와 중동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당하고 있습니다. 차제/此際에 우리는 신앙의 목적과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숙고해 보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앙하는 일이란 목숨을 걸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그런 각오와 결단으로 산헤드린 앞에 서 있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과연 오늘의 우리들에게 신앙이란 우리의 전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목적인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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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43(2025. 4. 24. 목요일).

시편 118:10-12.

찬송 24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세상을 살고 싶은가는 어쩌면 우리 자신에게 그 답이 있을지 모른다. 모든 일의 밝은 면을 보고자 노력한다면, 기회와 행운은 쉽게 찾아오고,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이루어지기 쉽다.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리고 매일 아침을 어떻게 맞이하고,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자주 살펴보는 게 좋겠다.

 

2. “솔로몬 행각에서 한 베드로의 설교(11-26)”을 읽었습니다. 솔로몬 행각이란 헤롯 대왕이 새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의 바깥 뜰 동쪽에 있는, 지붕과 기둥만으로 된 방(10:23; 3:11; 5:12)으로, 예수님도 이곳을 이용하여 제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을 가르치셨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곳은 이방인들도 들어갈 수 있었고, 종교적인 가르침을 주고받기에 적합한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설교학에서는 성경 자신의 삶의 자리(context)도 중요할 뿐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설교의 삶의 자리(contemporary context)도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말씀이나 표현은 text 뿐 아니라 그 배경이 되는 context역시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10:23을 참고로 예수님의 경우는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예수님이 오시기로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인지 여부를 묻는 내용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메시아 문제는 첨예한 문제였고,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고 십자가형을 받게 된 것도, 메시야 문제가 그 핵심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전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예수의 추종자들이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점도 그렇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예수의 사상과 정신이 온 유다를 흔들고 있다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베드로의 설교는 따져볼 가치가 있다 하겠습니다. 첫째 베드로의 설교는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죽인 예수께서 부활하셨는데, 베드로 자신과 여기에 배석한 제자들이 바로 그 목격자라는 것입니다(13-15). 둘째 베드로의 설교는 앉은뱅이 거지가 걷게 된 놀라운 기적은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 된 것이라는 점입니다(12, 16). 셋째 베드로의 설교는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보내주실 것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들의 잘못이며, 성경은 분명히 모세와 사무엘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야를 통해서 복을 받을 것을 말씀하고 있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17-26).

    오래 전 인도에서 선교사로 일했던 세인트루이스 신학대학원의 선교학 교수의 안내로 주일 예배를 보고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예배를 마치고 인도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는데, 성경과 찬송을 공중으로 던지면서 장난을 치고 있었습니다. 선교학 교수는 한국 기독교인들도 성경찬송을 휴대하고 교회생활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 교회는 성경과 찬송을 군인이 무기를 들고 살아가듯, 항상 성경과 찬송을 휴대할 것을 가르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당시 미국교회는 성경찬송을 예배실 의자에 꽂아두고 있어서 빈손으로 교회를 다니고 있었고, 예배 중에 읽게 될 성경본문도 이미 프린트가 되어 있어서 성경을 찾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가 있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말씀이 오늘의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가에 주목하자는 뜻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성도들에게 성경을 많이 읽게 합니다. 50, 60년대만 해도 교회당 벽에는 성경읽기표가 막대그라프로 표시되고 있었습니다. 제 고등학교 친구중 하나는 한 주간에 성경을 200-300장도 읽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훗날 경찰서장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성경을 많이 읽게는 하였지만, 성경의 배경설명이 부족해서, 결국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심각한 부작용을 양산/量産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한국기독교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성경구절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8:7)이라고 하니, 이런 아이러니도 없습니다.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안 되는 말씀인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였던 빌닷이 욥을 비난할 뿐 아니라 심지어 저주하다시피한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서공회 총무로 오래 일하신 민영진박사의 저서 <성경 바로 읽기>에는 이런 지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씀되거나 기록되던 역사적 배경 뿐 아니라, 오늘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도 이해할 과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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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42(2025. 4. 23. 수요일).

시편 118:7-9.

찬송 45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에 대한 얘기는 자화자찬이거나 자학, 둘 중의 하나이다. 자화자찬은 허영을, 자학은 듣는 자를 고통스럽게 한다. 그대가 자신에 대해 입을 열 때마다 사람들은 그대의 마음속을 들여다본다. 그대 자신에 대해 말하지 말라. 모든 것을 다 얘기하는 것과 정직하다는 것은 다르다. 비밀을 가진한다고 해서 정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서만 간직하고 있으면 그동안은 자유로울 수 있어 좋다. 타인에게 털어놓아 버리면 당장엔 시원하지만 차츰 구속을 받게 된다. 윤문원, 지혜와 평정, pp.22-23.

 

2. “앉은뱅이를 고친 베드로(1-10)”을 읽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종교들은 나름의 규칙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어느 종교나 공통적인 실천 강령 중에는 기도생활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도생활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시간과 장소를 정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 기도하는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는 일화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들어가는 문, 미문/美門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앉은뱅이 거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거지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서 구걸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종교심을 이용하는 것이 구걸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목을 잘 잡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늘 보았던 거지였지만, 오늘은 베드로의 마음에 성령께서 임재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경제적인 면에서만이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지를 향해서 베드로는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를 보시오. 나는 돈이 없소. 그러나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이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가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였던 거지가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후에는 껑충껑충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거지가 앉은뱅이로 미문에서 구걸하던 것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놀라서 어리둥절하였다 했습니다. 오래 된 유럽의 성당들에는 기적이 일어난 곳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곳에 가면 목발이 많이 걸려있었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찾아왔다가 건강한 발로 돌아갔다는 표시입니다. 사실 이런 기적은 우리 기독교 안에서만이 아니라, 일반 종교에서도 흔히 찾을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런 종교들은 아주 오래 전에 다 사라져버렸을 것입니다.

    성령을 체험한 초대교회는 놀랍고 엄청난 기적과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길이 달라졌다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오늘 문명화된 시대에도 달라지지 아니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경의 사람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고, 사랑으로 충만한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었고, 예수님의 마음이었으며 그리고 성령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베드로가 가졌을 때, 성령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와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셨고 당신과 같은 마음임을 아시고, 그를 통해서 놀라운 일들을 수행하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초대교회에 강하게 불었던 성령의 바람은 지금 여기에서도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야 한다고 믿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려고 힘쓰는 사람들이 일어서게 된다면 말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말씀은 우리의 삶과 무관한 구름 저 편의 얘기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사람들을 우리들도 불쌍히 여길 수 있고, 하나님께서 넘치도록 쏟아 부으시는 사랑을 우리도 따라 하려고 힘쓴다면, 세상은 한 걸음 한 걸음 더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워질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저를 다른 누구보다 더 사랑해 주세요.”가 아니라, “하나님, 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주시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3. 우리는 또 한 분의 좋은 하나님의 종을 떠나보내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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