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743호(2025. 4. 24. 목요일).
시편 118:10-12.
찬송 24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세상을 살고 싶은가는 어쩌면 우리 자신에게 그 답이 있을지 모른다. 모든 일의 밝은 면을 보고자 노력한다면, 기회와 행운은 쉽게 찾아오고,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이루어지기 쉽다.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은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리고 매일 아침을 어떻게 맞이하고,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자주 살펴보는 게 좋겠다.
2. “솔로몬 행각에서 한 베드로의 설교(11-26절)”을 읽었습니다. 솔로몬 행각이란 헤롯 대왕이 새로 지은 예루살렘 성전*의 바깥 뜰 동쪽에 있는, 지붕과 기둥만으로 된 방(요10:23; 행3:11; 5:12)으로, 예수님도 이곳을 이용하여 제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을 가르치셨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곳은 이방인들도 들어갈 수 있었고, 종교적인 가르침을 주고받기에 적합한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설교학에서는 성경 자신의 삶의 자리(context)도 중요할 뿐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설교의 삶의 자리(contemporary context)도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말씀이나 표현은 text 뿐 아니라 그 배경이 되는 context역시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요 10:23을 참고로 예수님의 경우는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예수님이 오시기로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인지 여부를 묻는 내용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메시아 문제는 첨예한 문제였고,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고 십자가형을 받게 된 것도, 메시야 문제가 그 핵심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전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예수의 추종자들이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점도 그렇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예수의 사상과 정신이 온 유다를 흔들고 있다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베드로의 설교는 따져볼 가치가 있다 하겠습니다. 첫째 베드로의 설교는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죽인 예수께서 부활하셨는데, 베드로 자신과 여기에 배석한 제자들이 바로 그 목격자라는 것입니다(13-15절). 둘째 베드로의 설교는 앉은뱅이 거지가 걷게 된 놀라운 기적은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 된 것이라는 점입니다(12, 16절). 셋째 베드로의 설교는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보내주실 것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들의 잘못이며, 성경은 분명히 모세와 사무엘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야를 통해서 복을 받을 것을 말씀하고 있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17-26절).
오래 전 인도에서 선교사로 일했던 세인트루이스 신학대학원의 선교학 교수의 안내로 주일 예배를 보고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예배를 마치고 인도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는데, 성경과 찬송을 공중으로 던지면서 장난을 치고 있었습니다. 선교학 교수는 “한국 기독교인들도 성경찬송을 휴대하고 교회생활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 교회는 성경과 찬송을 군인이 무기를 들고 살아가듯, 항상 성경과 찬송을 휴대할 것을 가르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당시 미국교회는 성경찬송을 예배실 의자에 꽂아두고 있어서 빈손으로 교회를 다니고 있었고, 예배 중에 읽게 될 성경본문도 이미 프린트가 되어 있어서 성경을 찾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가 있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말씀이 오늘의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가에 주목하자는 뜻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성도들에게 성경을 많이 읽게 합니다. 50, 60년대만 해도 교회당 벽에는 성경읽기표가 막대그라프로 표시되고 있었습니다. 제 고등학교 친구중 하나는 한 주간에 성경을 200-300장도 읽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훗날 경찰서장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성경을 많이 읽게는 하였지만, 성경의 배경설명이 부족해서, 결국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심각한 부작용을 양산/量産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한국기독교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성경구절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욥 8:7)이라고 하니, 이런 아이러니도 없습니다. 이 구절은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안 되는 말씀인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였던 빌닷이 욥을 비난할 뿐 아니라 심지어 저주하다시피한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서공회 총무로 오래 일하신 민영진박사의 저서 <성경 바로 읽기>에는 이런 지적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씀되거나 기록되던 역사적 배경 뿐 아니라, 오늘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도 이해할 과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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