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741(2025. 4. 22. 화요일).

시편 118:4-6.

찬송 30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격이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본 하루였다. 지성은 인격의 한 요소일 뿐 다른 두 가지 즉 따뜻한 감성과 바른 판단력인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무서운 칼이 되어 상대를 후벼 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인격은 훈련의 산물이며, 근면 덕행 선행이라는 자질을 키워야 한다. 기독교인 가운데는 싸움닭처럼 살고 있는 이들이 너무 많다는 게 슬픈 일이다.

 

2. “개종한 첫 사람들(36-41)”신도들의 공동생활(42-47)”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하루에 결신자가 3천명이나 되었다는 기록은 제 눈을 의심하게 하였습니다. 언젠가 아는 목사님이 진중/陣中 세례에 참가한 얘기를 하셨습니다. 확실한 기억은 아닙니다만, 수백 명은 넘었을 진중세례에 대해서 제가 비판적인 생각을 했었습니다. 주일이면 주로 사역을 하는데, 부대 막사를 고치거나 길을 정비하는 등의 일로, 쉬지 못하게 하는데서 오는 불만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거짓 신자를 자처하고 교회로 향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군대에서는 명령과 복종이라는 엄한 규율로 인해서, 진중 세례는 많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곤 하였습니다. 정해진 숫자를 채우기 위해서, 이미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병사들에게도 다시 재세례를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3천명의 세례자를 모집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 일어난 이 회심사건은 성령님의 역사로 인해서 충분히 가능했을 것입니다. 주종관계에 억눌려 있고 빈부귀천이 고착/固着되었으며,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과 이방인에 대한 극심한 차별사회에 초대교회가 보여준 사랑의 빛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도 남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앙적 위로와 각성 뿐 아니라, 서로 돕고 나누는 공동체의 분위기는 사람들의 마음에 얼어붙은 냉담함을 녹이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원의 불길처럼 기독교회의 부흥의 불길은 타오르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이른바 유무상통/有無相通하는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가장 理想的인 공동생활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마치 천국이 된 듯한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했습니다.

    하루는 제가 일하던 신학교의 교장선생께서 저와 차를 나누면서 제안을 했습니다. 가까운 훗날 아파트 한 채를 지으려고 하는데 한 10여 세대가 살 수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공동생활 규약에 동의하는 가정들이 입주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입주비용은 가지고 있는 자금이 많든 적든 그 전부를 내놓게 하고, 모든 가정은 매달 생활비 전액을 내놓게 하고 공동 관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능에 따라서 기여하는데, 식사 준비를 기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일을, 청소나 수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일을, 분담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저녁 공동식사를 한 다음에는 한 자리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데, 저보고 예배를 인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미를 얻은 며칠 후에 대답을 했습니다. 기쁘게 동의하고 참여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일장춘몽/一場春夢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파트를 짓겠다던 분이 그 뜻을 실천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아름다운 일장춘몽이었다 생각하곤 합니다. 그 뒤로 비슷한 공동생활을 시도했던 기록들이나 실례를 볼 수 있었습니다. 고 문동환 박사님의 <새벽의 집>이나, 고 원경선 선생님의 <풀무원공동체> 등이었는데, 오래 지탱하지 못하고 접어야 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욕심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배려가 절실한 데도 불구하고 이를 방해하는 욕심이 문제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출발했다 하더라도 그 처음 정신과 의미를 계속 교육하고 다짐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욕심을 배려로 바꿀 수 있는 세상은 이 땅에서는 참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1940년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던 떼제 공동체는 희망의 불씨로 남아있긴 하지만,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기에는 너무 작은 일렁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2013년 서대문구에 새로운 공동체가 11년째 순항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하심재/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집, 하나 교회(담임목사 김형원목사)가 바로 그 교회인데, 하의재/하나님의 뜻을 품은 집, 하담재/하나님의 말씀을 품은 집 등 2채를 더 사들여 25가구 150명이 공동생활을 하고 있다 합니다. 아무쪼록 이 공동체가 초대공동체를 계승하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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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40(2025. 4. 21. 월요일).

시편 118:1-3.

찬송 28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하는 후회는 세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그때 좀 더 베풀 걸, 좀 참을 걸, 좀 재미있게 살 걸. 그러니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란 앞 서 말한 후회의 세 마디 말을 하지 않거나 줄일 수 있도록 힘쓰는 일일 것이다. 좀 더 베풀고, 좀 더 참고, 좀 더 재미있게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실천하는 일이다. 충실하게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가져다주듯, 충실하게 보낸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다 줄 것이다. 윤문원, 지혜와 평정, p.171.

 

2.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14, 22-32)”을 읽었습니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이 있는데, 어쩌면 베드로를 두고 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부 출신인 베드로가 주님을 삼년 따라다니더니 마침내 설교를 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사실 요즘은 6개월이면 신학 수업을 마치고 목사가 되게 해 주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속성과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신학 수업을 10년 배운 후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모르는 것투성이입니다. 지금도 신학 책을 끼고 살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몇 백배나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저보다는 훨씬 더 똑똑하고 잘 배운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설교는 많이 배운다고 해서 좋은 설교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설교자는 성경 본문의 중심점을 설교의 중심점으로 잘 옮길 수 있으면 충분합니다. 때로는 많이 배웠다는 것이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생각을 앞세우거나 세상의 풍조를 따라가는 어리석음에 취해서 본문의 중심점을 무시하거나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그 초점이 분명하였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것을 반증하는 것이 수많은 기적과 놀라운 일 그리고 표징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계획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는 그 분을 죽음에서 살려내신 것이라 선포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에서 밝히지 않은 것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계획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저 역시도 아쉬운 대목입니다. 그러나 설교는 누구나 알기 쉽게 전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암시하거나 질문을 통해서 궁금하게 하고, 더 깊은 생각을 하도록 유도/誘導할 수도 있습니다. 설교자의 결론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것이 무리하다거나 깨우침의 기쁨을 남겨두기 위해서 그런 여유를 둘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선배 목사님은 당신의 설교 말미에 거의 대부분 시의 한 구절을 옮기시곤 했습니다. 시인이 품었을 생각과 비교해 보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을 다음에 오랫동안 여운이 남게 하였습니다. 또 어떤 분은 결론 대신에 질문으로 청자/聽者에게 그 기회를 넘겨주는 방식을 택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기간에 부활에 대한 신앙을 북돋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 신앙이란 십자가 신앙처럼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인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으려는 신앙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성으로 접근하는 한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교자가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설교는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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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39.

시편 117:1-2.

찬송 2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배려(配慮)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 건 현실은 반대라는 뜻입니다. 사전적인 의미는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거나 도와줌.”인데, 역지사지/易地思之가 딱 어울리는 대안입니다. 1세기의 크리스천들은 가난하고 병들고 억눌린 사람들을 감싸주었습니다. 세상 풍조와는 아주 다른 공동체였습니다. 21세기의 기독교회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자기중심적인 인간들의 모임이 되고 말았습니다.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했던 선한 사마리안을(10:29-37) 다시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2. 오늘 주님의 부활절의 구약성경 이사야 65:17-25을 본문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이신 야훼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주님의 부활절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꿈을 꾸게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세계를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소개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곳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곳이라 말씀합니다(17-20).

요즘 제가 사는 마을엔 집을 고치는 일로 야단법석입니다. 저도 17년째 살고 있으니까 손봐야 할 곳이 너무 많아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마음만 분주합니다. 그런데 낡은 것들을 고치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훗날 부활해서 살게 될 세상이 낡고 부서진 것이라면 걱정이 태산 같을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들이 들어가게 될 세상이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예루살렘도, 함께 어울려 살아갈 사람들도, 다 새로운 사람들이라 말씀합니다. 그뿐 아니라 더 이상 슬퍼 우는 일도 없고, 어린 아이든 청년이든 그리고 백세 노인이든 죽는 일이 없다 하십니다. 죽음이 없으니 영원한 삶이 보장된 곳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을 믿음으로 기대해야 하겠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헛수고를 하지 않는 곳이라 말씀합니다(21-23).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짓게 될 것이고, 자기 손으로 가꾼 과일 나무의 열매를 따 먹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은 새 하늘과 새 땅은 할 일이 없어서 무미건조한 삶이라 얘기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 아주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손으로 집을 짓고, 자신이 심고 돌본 과일과 채소를 거두어 먹을 수 있는 곳이라 말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새 하늘과 새 땅은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곳이 아니라, 부지런히 일하고 땀 흘리는 세상이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제게 물었습니다. 편히 쉴 나이에 어찌하여 힘든 농촌생활을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답했습니다. 억지로라도 일할 수 있는 곳이라서 일부러 찾아온 농촌이라고 말입니다. 일한 보상이 없는 헛 수고에 실망한 때문일 것입니다. 엿새 일하고 하루 쉼으로 충분한데 말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평화로운 곳이라 말씀합니다(24-25).

우리가 부활한 후에 만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는 곳이라 말씀합니다. 우리의 중심을 훤히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부르기도 전에 대답하시고, 우리가 청을 하기도 전에 들어주시는 참된 소통이 되는 세상이라고 말입니다. 그 뿐 아니라 늑대와 어린 양이, 사자가 소들과, 뱀이 흙을 먹는 평화의 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황금과 보석이 가득한 나라니, 고대광실 높은 빌딩이 즐비한 곳으로 생각하지만, 크게 빗나간 얘기입니다. 제가 성경을 가르친 학생 중에 시각장애를 가진 분이 있는데, 중도실명자로 대구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그가 쓴 석사 논문의 제목은 배려가 있는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을, 가진 사람이 덜 가진 사람을 배려하자는 주제입니다. 그런 나라가 천국에 가깝다고 암시하고 있습니다.

 

3.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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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38(2025. 4. 19. 성주간 토요일).

시편 116:16-19.

찬송 47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쉬운 일은 어려운 것처럼, 어려운 일은 쉬운 것처럼 하라. 호랑이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에도 전심전력을 다한다. 쉬워 보이는 일도 막상 해보면 어려움이 있고, 못할 것 같은 일도 시작해 놓으면 이루어진다. 같은 물건도 무겁게 여기고 들면 가볍고, 가볍게 여기도 들면 무겁다. 쉽다고 얕보지 말며, 어렵다고 팔짱만 끼고 있지 마라. 쉬운 일에는 신중하고, 어려운 일은 지레 겁먹지 말라.”

윤문원, 지혜와 평정, p. 71.

 

2. “욥의 답변(21-27)”을 읽었습니다. 1990년도에 성경필사 운동을 벌이셨던 지 상섭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제 강습회에 참가하셨는데, 제게 찾아와 성경 필사의 유익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무래도 쉽게 눈으로 혹은 입으로 읽는 것에 비해서, 한자 한자 성경 말씀을 자신의 글자로 옮겨 적는 것은 노력도 노력이지만, 마음에 새김질할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약점은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욥기는 다섯 부분으로 분류하는데, 서론(1-2)과 결론(42:7-17), 그리고 시로 된 대화(3-31), 엘리후의 연설(32-37)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38-42:6)이 그것들입니다. 욥에게는 3명의 친구가 있었는데, 엘리바스는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경험을 바탕으로 평가하려 하고, 전통주의자인 빌닷은 하나님은 공의를 굽히지 않는다는 점을 공식화하며, 교리주의자인 소발은 욥의 고통과 범죄를 율법적인 잣대로 따지듯 참여합니다. 이른바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이나 자세가 이렇듯 차이가 나는 것이 우리의 삶을 대하는 다양한 인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욥의 친구 빌닷의 충고에 대한 답변 형식의 시입니다. 빌닷은 매우 공격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18). 욥에게 충고하는 빌닷의 말을 한 구절만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악인의 집은 이렇듯이 비참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의 거처는 이렇게 되고 마는 법일세.”(18:21) 라고 말입니다. 친구인 빌닷이 한다는 충고는 욥을 악인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심지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처럼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로써 때로는 성경공부를 지도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질문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답하기도 힘들고, 설득하기도 힘든 것은 의로운 자의 고난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찌하여 의로울 뿐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직면하게 되는 시련을 설명하는 일입니다. 그때마다 제가 하는 대답은, 알 수 없는 고통도 부지기수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경험한 바로는 알 수 없는 고통도 사실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이해하는 필요충분조건이 된다고 말입니다. 프랑스의 심리학자, 수학자, 과학자, 신학자, 물리학자, 발명가, 작가였던 블레즈 파스칼(1623-1662) 역시 생전에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많은 질문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가 내 세운 한 수학적 공식이 있는데, 저 유명한 파스칼의 도박/Pascal’s Gambling이 있습니다. 그가 발표한 파스칼의 도박의 결론은, 믿음을 가지는 것은 플러스 무한대라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니, 의심과 회의를 가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믿음을 갖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어제는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기념하는 성 금요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세상에 오셔서 온 세상의 모든 죄를 다 끌어안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이런 성경의 중심 사상에 대해서 믿음으로 받아들이거나, 반대로 거부하는 것은 순전히 누구도 강요할 수 없는 우리들 개개인의 자유입니다. 파스칼은 그런 사람들에게 믿음을 가지고 받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플러스 무한대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오늘 본문에서 친구라는 얼굴로 가장 아픈 고통을 안겨주는 빌닷에게 나의 살갗이 뭉그러져 이 살이 질크러진 후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뵙고야 말리라. 나는 기어코 이 두 눈으로 뵙고야 말리라.”고 대답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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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37(2025. 4. 18. 성주간 금요일).

시편 116:13-15.

찬송 46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품성 중 관대함, 자비심, 공정함, 정직함, 준비성은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 반대로 최악의 성품인 탐욕 인색함, 무절제, 방탕함은 돈을 잘못 쓰는 데서 비롯된다. 돈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훌륭한 자질이다. 돈은 삶에 필요한 영양소이자 윤활유이지만, 돈에 탐닉하면 사기 부정과 같은 악습이 나타난다. 악의 뿌리는 돈 그 자체가 아니라 돈에 대한 집착이다. 논이 삶의 목적이 되면 노예처럼 돈에 종속된다.” 윤문원, 지혜와 평정, pp.80-81.

 

2. “산 희망(10-12)”거룩한 생활(13-20)”을 읽었습니다. 이 두 단락을 요약하면 구원과 거룩한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을 기억하는 성주간 금요일입니다. 기독교의 오랜 전통중 하나는 오늘 금식을 하거나 오락을 금하는 그런 어두운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주제로 하는 가상칠언/架上七言을 묵상하는 특별한 기도회를 갖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역사적인 사실들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을 지탱하는 가장 힘 있는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마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세계에 널리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처럼 말입니다. 물론 이슬람에서도 2025년도 성지순례일 하즈(Hajj)66일 저녁부터 611일 저녁까지 진행한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할 말씀은 벧전 1:10-20, 첫 단락은 우리가 가진 믿음이 영혼을 구원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것을 깨우쳐 주신 분이 성령님이시고, 이를 우리에게 전해주신 것 또한 성령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말씀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락에서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은총을 간직하고 끝까지 거룩한 삶을 살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거룩한 삶이란 크리스천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순결하고 아름다운 삶을 의미할 뿐 아니라, 실제적인 의미는 구별된 삶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사람들의 삶과는 다른 모습을 뜻합니다. 어쩌면 이를 일찍 깨우친 사람들이 바리새파 사람들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거룩한 사람, 곧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구별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바리새라는 말은 주전 135년 요한 힐카누스 통치 때에 처음으로 나타났는데, 그들은 하나님께 충성하는데 삶의 의미를 둔 하시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사람이라는 표시로, 눈에 띄는 차림새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강조가 지나쳐서 예수님 당시에는 가장 교만한 사람으로 비춰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바리새파의 전성기 때 6천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을 것입니다.

    엊그제 동창 몇 분과 오찬을 하면서, 오늘의 우리 교회의 모습을 전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하극상은 물론 평신도들에 의해서조차 불신임을 받고 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목회자인 저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문제들은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서 시작하고 끝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출발은 겸손과 충성이었으나, 그 끝은 교만과 탐욕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제가 가끔 인용하는 아프리카 돼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100여 마리 돼지를 몰고 가는 목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목자의 긴 회초리에 맞으면서 걸어가는 돼지가 있었습니다. 그 돼지는 무리에 섞여서 고분고분 살아가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뒤로 자꾸 뒤쳐지면서 어딘가 있을지 모를 먹이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두고만 볼 목자가 아니었고, 목자는 그 돼지의 엉덩이를 회초리로 때렸고, 맞은 후 무리와 합류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돼지가 계속 맞으면서 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그 돼지는 자신은 남처럼 살지 않겠다 결심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모험심을 발휘해서 대열에서 이탈, 목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교만과 탐욕의 자세이고, 불순종의 전형/典型입니다. 거룩한 삶 곧, 남들과는 다르게 살겠다는 의지는 바람직하지만, 교만과 탐욕에 이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겸손과 순종은 너무 평범해서 흥미를 잃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런 평범한 삶이란 그 자체가 축복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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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36(2025. 4. 17. 성주간 목요일).

시편 116:10-12.

찬송 31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래된 속담 중에 비난의 위험을 경고한 말이 있다. “비난은 한 번에 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비난하는 사람 자신과, 비난을 듣고 전하는 사람, 그리고 비난의 대상이다.” 이 셋 중 가장 심하게 상처를 입는 사람은 비난을 한 사람이다. 그러니 비난할 생각을 아예 하지 마라.

 

2. “하나님께 불평을 털어놓다(7-11)”을 읽었습니다. 성경이 다른 종교들의 경전과 많이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들을 만나 대화할 때, 사람이 가진 감정(희로애락)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대목이나, 격하고 사랑스러운 감정대립이나 감정표현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성경이 고상하고 품격 있지 못하다고 폄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가진 생각은 많이 다릅니다. 비록 조물주이신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그 상대가 인간이라고 한다면 가장 인간다운 처지에서 대할 수 있어야 진정성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저의 반려견인 순진이와 이런저런 얘기를 합니다. 땀을 흘리며 체전을 일구거나, 생각을 켜질하고 있을 때, 곁에 앉아서 졸고 있는 반려견에게 장난을 걸기도 하고 심통을 부리기도 합니다. 그것은 반려견의 입장과 처지는 제가 알 수가 없으니, 그 반대로 저의 처지로 끌어올려서 대화를 하거나 장난을 치는 것입니다. “참 너는 마음 편하겠다. 뭐가 근심 걱정할게 있니? 주인이 알아서 먹을 것 마실 것 챙겨주지를 않나. 네 눈치를 보며 소변이 마려우냐? 큰 것을 보려느냐? 하면서 아무리 추워도 문을 열어주고 또 문을 닫아주니 말이다. 그러니 너도 내게 잘 해야 한다!” 함께 살아가는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한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언자 예레미야가 하나님을 향해서 불평을 늘어놓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가 지나쳐서(?) 망발에 가깝습니다. “제가 어수룩하게도 주님의 꾐에 넘어갔습니다. 주님의 억지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사람들의 웃음거리고 되고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중략> 그래서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길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수군거립니다.”

    어디다가,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을 하나도 감출 생각 없이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친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훗날 후환이 두려워서 해야 할 말도 못하는 세상살이에서 말입니다. 그만큼 자신의 속내를 잘 알고 계시며, 누구보다도 가깝게 서로를 대하고 있다는 반증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서로 불평을 나눌 상대라는 건 가장 편한 관계가 되었다고 말입니다. 어렵게 생각되는 대상에게는 푸념을 늘어놓거나 함부로 불평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일 거라고 말입니다. 이런 말을 누구나 함부로 꺼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힘센 장사처럼 야훼께서 계시기에 저를 박해하다가는 당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것입니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끄러움으로 머리를 들지 못하고 길이길이 잊지 못할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11). 사면초가에 몰렸다며 고발하자 걸어 넘어트리고 잡아 족치자 앙갚음을 하자는 사람들 속에서 내 뱉은 말이었습니다. 요즘 무슨 게이트다 하면서 세상의 치부와 시끄러움을 들춰내는 일이 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잘 나가던 시절에 서로 주고받았던 험담들, 그리고 음모들이 뭔가 뒤틀어지자 봇물처럼 빗장이 풀려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우린 그런 얘기들이란 사태가 불리하게 되면 스멀스멀 터져 나올 것들이라 생각합니다. 무덤까지 가져가자 맹세했던 얘기들이란 실은 이해관계로 얽힌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와 야훼 사이에는 생명을 두고 한 약속들이었고, 그래서 진심이 담긴 불평(?)으로 참된 소통이 되었던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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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35(2025. 4. 16. 성주간 수요일).

시편 116:7-9.

찬송 30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부정적이거나 금기사항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과 남은 가족을 위한 현명한 배려라고 생각한다. 이를 몇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 가까운 가족이 숨을 멈췄을 때, 119를 통해서 사망확인을 하도록 권하는 것은 법적으로 중요하다. 둘째, 사망진단서를 발급해 줄 주치의 연락처를 알려주는 것도 중요하다. 셋째, 장례식장 가까운 곳에 2-3곳 알아 두고, 빈소와 함께 화장장 예약도 동시에 진행하도록 권한다. 넷째, 사망신고와 재산정리를 빨리하는 것이 좋다고 권한다. 특히 연금공단에도 알리고, 자동이체 해지를 위해 이체 목록 등을 준비해 두는 것도 중요하다. 다섯째, 죽음은 끝이 아니라, 남은 자들에 대한 새로운 출발이 될 수 있음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다.

 

2. “죽음을 예고하신 예수(27-36)”을 읽었습니다. 우리들 인간의 삶에는 몇 가지 통과의례/Life Passage 가 있는데, 마지막 단계인 장례는 많은 사람들이 소홀하게 여기는 경향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죽음만큼 중요하게 고려할 사항은 없지 않나 싶습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최종 정리단계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사람이 별세했을 때 망자가 건강 진료를 받았던 주치의가 누군지 연락할 수가 없어서, 사망 진단서를 준비하지 않고 장례식장으로 곧장 감으로 며칠 씩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남은 자들의 불편은 물론 망자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결례를 범하게 됐다는 애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통과의례 못지않게 미리 그리고 신중하게 장례를 준비해야 함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1991년 어느 날 연세대학교 100주년 기념회관에서는 특별한 모임이 있었는데,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라는 것이었습니다. 내용은 삶 못지않게 죽음도 우리 인간에게는 중요한 삶의 내용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 존엄사/尊嚴死 라든가, 연명치료 거부권 그리고 호스피스 봉사와 웰 다잉, 적극적인 장기기증 운동과 같은 주제들이 화두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벌써 2천 년 전 아득했던 시절에 우리 주님은 당신 자신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공개했다는 점을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죽음을 마주대하는 주님에게서 몇 가지 특징을 찾을 수 있는데, 첫째는 주님 역시 죽음과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27-28). 그러나 주님은 곧 바로 당신의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기를 바라는 말씀으로 바꾸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주님의 죽음을 기쁨으로 받아주셨음을 확인했습니다(29-30). 셋째는 주님의 죽음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나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길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31-33). 넷째는 주님은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주님을 따라서 빛의 자녀로 살 것을 권고하십니다.

    저는 인생의 통과의례, 생로병사 가운데서 죽음을 통해서 가장 많은 깨달음과 교훈을 얻는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한 젊은이가 뜻을 펼쳐보지 못하고 요절해서 자신의 모든 장기를 기증하고 떠나가는 자리에서 많은 교훈을 받았습니다. 일부이긴 하지만 생명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말입니다. 나이 많아 쓸 만한 장기가 없으니 해부학에는 사용할 수 있겠다고 몸을 기증한 노신사에게서도 큰 울림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한평생 수많은 제약과 악조건 속에서도 끝까지 그 여린 어깨에 자신의 자녀들을 둘러매고 보살폈던 연로하신 권사님과 장로님의 죽음은 헛될 것 같은 인생이 결코 헛될 수 없음을 일깨워주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선하게 떠오르는 한 여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말기 암 치료를 받고 있는 중에도, 호스피스 병동을 찾아다니며 삶의 의미와 존엄을 지키도록 격려하고 기도하던 모습을 말입니다. 그 분을 마지막 심방했을 때, 원자력 병원의 한 병상에서 제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목사님, 이젠 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웅변처럼 했던 말,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3-14).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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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734(2025. 4. 15. 성주간 화요일).

시편 116:4-6.

찬송 34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손수건으로 새를 감싸 들어 올리자, 서늘하고 가벼운 몸의 전부가 천 아래로 느껴진다. 반쯤 펼쳐진 날갯죽지들을 모으고 손수건을 한 번 더 감아 비스킷 통 가운데 내려놓는다. 잘 여며도 위쪽이 벌어지며 얼굴이 드러난다.” 목공일을 하는 제주도 친구가 손가락이 잘려 서울로 치료하러 서둘러 올라오는 바람에, 키우던 앵무새 아마가 목이 말라 죽을 것 같다며, 제주도로 가서 앵무새에게 물을 주고 와달라는 부탁에, 비행기를 타고 눈보라를 뚫고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버스를 겨우 타고 집에 당도했을 때는 앞서의 글처럼 앵무새 아마는 싸늘하게 죽어 있었다. 그 얘기가 무려 172페이지나 되었다. 한 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한 토막이다. 그런데 앵무새 아마 이야기는 그걸로 끝날까 걱정이다.

 

2. “능력과 지혜이신 그리스도(18-25)”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께서 고난당하심을 기억하며, 이른바 고난 주간 화요일을 맞이했습니다. 이 고난 주간에는 우리 인류와 세상을 위해서 속죄양이 되신 주님의 십자가를 주목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엊그제는 미네소타에서 목회하시는 묵상식구 엥글러 목사님께서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축하한다며 전자 카드를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병을 앓거나 힘든 일을 겪는 이웃에게는 축하한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당하신 고통은 우리에게는 말도 다할 수 없는 은총이기에, 그런 은총을 입고 있는 우리들끼리는 축하의 인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양 정서로는 그런 인사말이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는 최고의 축복이 될 테니 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주님이 짊어지신 십자가를 진지한 마음으로 묵상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저는 대학과 대학원을 같은 곳에서 다녔는데, 그때 하루 첫 30분은 학생회관 안에 있는 작은 기도골방에서 보내기로 결심하고 실천하였습니다. 물론 대학원 시절에는 강의 시간이 들쭉날쭉해서 첫 시간을 맞출 수가 없었고, 가끔 빼먹기도 하였습니다만, 그때 그 기도골방에는 십자가에서 생명이 다하신 주님의 십자가로 훗날 알게 되었습니다만, 제목은 <십자가 성 요한의 그리스도>로 스페인 출신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50가 그린 것으로, 영국 글라스고 미술관 소장품이라 합니다. 이 그림을 두고 이 요한 신부님은 하느님의 두 속성, 우리 가까이 계시는 내재성과, 우리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 차원에 계신 초월성을 표상하고 있다.” 고 해설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요약했습니다. 첫째로 이성적인 헬라인은 십자가를 어리석고 미련하다 생각한다 했습니다. 어떻게 똑똑한 사람이라면 허망하기 짝이 없는 바보 같은 죽음이라고 말입니다. 둘째로 율법적인 유대인들에게는 부끄럽고 치욕적이라 생각한다 했습니다. 죄인이 짊어졌던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질문을 우리 자신들에게 돌려야 한다고 바울은 암시합니다. 첫째로 영원히 멸망 받게 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어리석고 미련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바보 천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는 우리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가 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인류의 죄를 기억치 않으시려 깨끗이 지워버리시는 유일한 하나님의 구원행위인 때문입니다. 둘째로 표적만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수치와 형벌의 상징일 뿐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보다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이란 다시 찾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래 전에 우리 주님은 아주 적절한 소개를 하셨는데,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11:30) 고 말입니다. 까닭은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는 의미입니다(No Cross, No Crown).

 

3. 앞에서 언급한 엥글러목사님은 오는 56-16일 대가족을 인솔하고 한국을 방문하십니다.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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