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726호(2025. 4. 7. 월요일).
시편 114:7-8.
찬송 310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훅 하고 뜨거운 게 명치에서부터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면 견딜 수 없었어. 집이 싫었어. 외딴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30분 넘게 걸아야 하는 길도 싫고, 버스에 실려 도착하는 학교도 싫었어. 수업을 시작하는 <엘리제를 위하여>가 싫었어. 수업시간이 싫었고, 아무 것도 그리 싫어하지 않는 것 같은 아이들이 싫고, 주말마다 빨아서 다려 입어야 하는 교복이 싫었어” 한 강, 작별하지 않는다, pp.76-77. 사족. 모든 것이 다 싫었던 시절이 우리들에게도 있었다.
2. “무화과 두 바구니(1-10절)”을 읽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뜻하지 않은 곤경에 처하기도 하고, 난데없이 순풍이 불어 기쁜 일로 들뜨게도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낙담하지도 말아야 하고, 너무 호들갑을 떨고 교만해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큰 전쟁이 끝난 후에는 그것도 승전이 아니라 패전이라고 할 때, 그 절망감과 두려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런 패전 후의 절망감을 한가득 안고 있는 예언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전 앞에 나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두 개의 무화과 바구니가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보여주신 장면이었습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보고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무화과가 보인다면서, 보이는 대로 말씀드립니다. 바구니 하나에는 무척 좋은 무화과가 담겨있고, 또 다른 바구니에는 썩은 무화과가 담겨 있다고 말입니다. 그때 야훼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유다 사람들을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하겠으나, 좋은 무화과처럼 잘 돌봐주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말입니다. 헐지 않고 세우며, 뽑지 않고 심을 텐데, 이런 일을 하는 분이 야훼인줄 알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야훼께 돌아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유다 왕 시드기야와 고관들, 그리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거나 이집트로 망명한 자들은 썩어서 먹지 못하는 무화과처럼 만들겠다 하십니다. 이들에게는 재앙을 내려서 세상 만국 백성들이 놀라 넘어지게 하겠는데, 세상 사람들에게 쫓겨다니며 욕을 먹고 희롱과 조롱거리가 되고, 전쟁과 기근과 염병으로 죽어나가겠고, 선조들의 땅에서 한 사람도 남아 있지 못하게 하겠다고 저주하십니다.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유다가 이스라엘보다 크게 잘못한 것도 없을텐데 말입니다. 도진 개진인데 말입니다.
신앙인으로써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하나님은 어찌하여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시련과 고통을 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충분히 그럴만한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모르는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바르게 살고 옳은 판단을 하는 것을 물론,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르고 성실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심을 가질 사람이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적어도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자녀들로 살려고 힘쓰며, 남들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살려고 노력한 것을 가상히 여기실 수 있는데, 저 오랑캐 같은 우상의 자식들처럼 취급받는다는 것은 너무 억울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중/意中을 짐작케 하는 말씀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나 야훼인 줄 알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헐지 않고 세우기도 하시고, 뽑기도 하시고 심으시기도 하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살피시는 것은 상대적인 평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신만의 깊은 뜻에 따른 것이라고 말입니다. 가령 제가 7년간을 대학입학을 두고 공부를 할 때의 고뇌를 회고해 보면, 이런 기도가 떠오릅니다. “제가 당신의 종이 되겠다고 작정하고 살아왔는데, 그 길이 왜 이리 어렵습니까? 공부가 게을렀습니까? 그렇다고 산과 들로 즐겁게 세상과 친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얼마나 더 참고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대답을 듣지도 못했고,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비로 알게 되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생들에게는 뜻 모를 시련과 고통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이삭을 제물로 바치러 예루살렘의 바위산 모리아에 이를 때의 그 심정 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의문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도록 하셨을 때, 이해할 수 있었다는 어느 구약교수의 고백처럼, 제 가슴 속에도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품고 살도록 말입니다. 그러니까 뜻 모를 고통을 겪을 때는 바로 하나님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라는 교훈으로 알기로 하였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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